제주 4·3 70년 특집
만리재에서 ‘보통 사람’ 박진경
제1204호
등록 : 2018-03-19 14:58 수정 : 2018-03-19 15:09
4월이면 제주4·3이 70주년을 맞습니다. 70년. 생각해보면, 참 아득한 세월입니다.
4·3을 주제로 한 통권 특집호로 이번호를 준비하며, 한반도 최남단 제주에서 이같은 참극이 벌어진 이유는 뭘까 골똘히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그동안 나온 연구는 많습니다. 2003년 12월 정부가 내놓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볼까요. 보고서는 4·3에 대해 ‘해방 이후에도 온존한 친일 세력에 대한 제주 사회 내 불만이 쌓여 있는 가운데 △외지 출신 도지사의 편향적 행정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검거 선풍 △이후 발생한 여러 테러·고문치사 사건 등의 실정이 이어졌고, 여기에 1948년 5·10 단독선거를 막고 분단을 저지하려는 남조선노동당의 무장봉기가 결합돼 발생했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민중항쟁이 최소 3만 명 이상이 숨지는 한국사 최대의 비극으로 발전한 1차 책임은, 1948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제주 중산간 마을 초토화 등 강경 작전을 폈던 9연대장(송요찬)과 2연대장(함병선)이 져야 하고, 최종 책임은 이승만 당시 대통령에게 있다고 보고서는 적시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또 군의 강경 작전을 지휘·격려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책임도 잊지 않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제 눈길을 잡아끈 것은 군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살해된 박진경(1920~48·11연대장. 당시 9연대와 11연대는 합쳐진 상태였음)이란 20대 청년이었습니다. 그를 살해한 것은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등 그의 수하에 있던 군인들이었습니다. 군법회의에서 손선호가 남긴 발언을 들어봅시다.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작전과 비교해볼 때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살가량 되는 아이가 아버지의 주검을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했다. (중략) 사격 연습을 한다며 부락의 소 등 가축을 난살했으며 폭도가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했다. 또 매일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도 전연 없었다.”
박진경에 대한 정부 인사 기록을 뒤져보면, 그는 경남 남해 출신으로 진주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과에 진학했습니다. 이후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한 뒤 제주에서 일본군으로 복무했다는 기록과 증언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부하들의 혹평과 달리 미군 쪽의 평가는 매우 좋았다는 것입니다. 박진경은 11연대장으로 부임하기 직전 통위부(현 국방부) 인사국장(인사국장은 어느 조직에서나 요직입니다)을 지냈고, 진급도 이례적으로 빨랐습니다. 노영기 조선대 교수(사학)의 박사학위 논문 ‘1945~50년 한국군의 형성과 성격’을 보면, 박진경은 “국방경비대에서 누구보다 능력을 인정받았던 최고 지휘관 중 한 명”으로, 1948년 6월1일 대령 진급이 이뤄질 때 군(당시 국방경비대)내 대령은 옛 일본육사 출신 까마득한 선배들을 포함해 채 10명이 되지 않았다 합니다. 당시는 영어 능력이 중요하던 시대였으니, 오사카외대 영어과 출신인 그의 어학 능력이 출세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제 때 대학 교육을 받고, 영어에 능통하며, 조직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28살 젊은이가 저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그가 살해된 당일 한국을 좌지우지하던 윌리엄 딘 군정장관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내려와 수사를 지휘했다 합니다. 비극을 몰고 오는 것은 ‘악인’이 아니라, 사회를 돌아보고 자신을 성찰할 줄 모르는 평범하고 유능한 ‘보통 사람’입니다.
(전국종합=연합뉴스) 제63회 현충일(6일)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을 비롯한 전국 현충시설에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졌다.
대전현충원 [연합뉴스 자료사진]
많은 시민이 오전 10시 전국적으로 울린 사이렌에 맞춰 묵념했고, 운전자들도 차량 운행을 멈추고 현충일 의미를 되새겼다.
올해 정부 추모식은 서울현충원이 아닌 대전현충원에서 열렸다. 1999년 이후 19년 만이다.
추념사 하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고(故) 김기억 육군 중사 등이 안장된 무연고 묘지를 먼저 찾아 참배했다.
'428030,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당신을 기억합니다'라는 주제로 거행된 추모식은 국가유공자와 시민, 유가족 등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묵념, 헌화·분향, 추모 헌시 낭송, 추모공연, 추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428030은 현충원부터 호국원, 민주묘지, 최근 국립묘지로 승격된 신암선열공원까지 10개 국립묘지의 안장자를 모두 합한 숫자다.
순직 소방공무원 3명 추모하는 문 대통령 (대전=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6일 오전 대전 현충원에서 열린 순직 소방관 3인의 추모식에서 참석자들과 참배하고 있다. 순직 소방관 3인은 올 3월 충남 아산에서 출동 임무 중 사고로 순직했다. 2018.6.6
현충일 추모식이 끝나고서는 지난 3월 충남 아산시 도로변에서 강아지를 구조하다 사고로 숨진 소방 공무원(사고당시 교육생 포함) 3명에 대한 추모식이 별도로 진행됐다.
추모식이 진행되는 동안 200여명의 소방공무원 동료들은 정복 한 번 입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동료의 희생을 안타까워했다.
전북 임실국립호국원에서 열린 추모식에도 2천여명의 보훈 가족이 찾아 호국영령을 추모했다.
이곳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 2만7천여명이 잠들어 있다.
부산 중앙공원 충혼탑에서 거행된 추모식에는 유가족과 보훈단체, 시민 등 5천여명이 찾아 현충일 의미를 되새겼다.
참석자들은 추념식이 끝나고 충렬사를 찾아 참배했고, 일부는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해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세계 각국의 영령들에게 헌화했다.
경남 함안의 달전사에서는 현충일을 맞아 전몰 군인과 경찰, 민간인 등 6·25 전쟁 희생자 넋을 기리는 '무차수륙대재'를 봉행했다.
함안은 6·25 전쟁 당시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간 낙동강 방어선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바다 건너 제주에서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다.
제주시 충혼묘지를 비롯해 한림·애월·구좌·조천·한경·추자·우도 등 충혼묘지에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가 거행됐다.
광주공원 협충탑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한 송원고등학교 3학년 문서영 양 등 학생 6명은 30명의 호국 영웅의 이름을 한명 한명 부르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경기 수원 현충탑을 찾은 2천500여명도 현충일 의미를 생각하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렸다.
추념식에 참석한 이재율 경기도 1부지사는 추도사를 통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가슴 깊이 새기고 보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국"이라고 말했다.
'7번째 국립묘지' 대구 신암선열공원 새로 단장해 개원(종합)
송고시간 | 2018/05/01 17:32
대구·경북 출신 독립유공자 52명 안장…관리권 정부 이관 이 총리 "파악 안된 애국열사 끝까지 찾아 합당한 예우 하겠다"
국립신암선열공원 [정종섭·정태옥 의원 제공=연합뉴스]
(대구=연합뉴스) 이덕기 기자 = 국내 7번째 국립묘지로 승격된 대구 신암선열공원이 1일 새롭게 단장하고 문을 열었다.
국가보훈처는 이날 오후 대구시 동구 신암동에 있는 국내 최대 독립유공자 집단묘역인 국립 신암선열공원 개원식을 했다.
행사에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 정부 주요인사와 독립유공자 및 유족,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해 개원을 축하하고 애국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기렸다.
행사는 국민의례, 헌화·분향, 생존 애국지사 인사말, 기념사, 기념공연과 안장된 독립유공자 이름을 차례로 부르는 '롤 콜'도 했다.
이 총리는 기념사에서 "이곳에 잠드신 선열들께서 독립운동에 헌신했을 때는 남과 북이 따로 있지 않았다. 선열들이 꿈꾼 독립은 분단된 독립이 아니었다"며 "그러나 해방 조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분단된 채 73년이 지났다"고 말했다.
이어 "나흘 전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획기적 토대가 마련됐다"며 "기적처럼 찾아온 평화의 기회를 우리가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더 올바르게 정리하고 의병과 여성 등 광복을 위해 희생했으나 여태 파악되지 못한 분들을 찾아 합당하게 예우하겠다"고 했다.
이 총리 등은 이어 을사늑약 이후 경북 영덕, 청송 일대에서 의병활동으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임용상(1877∼1958) 지사 묘역을 참배했다.
임 지사는 공원에 안장된 독립유공자 52명 가운데 훈격이 가장 높다.
분향 마친 이낙연 국무총리 (대구=연합뉴스) 김준범 기자 = 이낙연 국무총리가 1일 대구시 동구 국립신암선열공원 야외광장에서 독립유공자와 국립신암선열공원 안장자 유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개원식에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과 유족 대표들과 함께 헌화 및 분향을 마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2018.5.1
신암선열공원은 대구 남구 시립공동묘지 일대에 흩어져 있던 애국지사 묘 7기를 1955년 현재 위치로 이전한 것이 시초다.
대구시가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묘역 성역화에 나서 이듬해 3만7천800여㎡ 터에 위패를 모신 단충사, 관리실 등 3개 건물로 공원을 만들어 준공했다.
건국훈장 독립장(1명), 애국장(12명), 애족장(33명), 대통령표창(2명)을 받은 독립유공자와 서훈 미취득자 4명 등 대구·경북에서 태어났거나 주소를 뒀던 독립유공자 52명이 묻혀 있다.
이들은 3·1만세 운동, 광복군·의병 활동, 일본·만주를 포함한 국내외 항일운동 등에 참여했다.
신암선열공원은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한 현충시설로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적용을 받지 못해 그동안 국비를 지원받아 체계적으로 관리·운영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지자체 현충시설의 국립묘지 승격 전례가 없어 법률 개정이 쉽지 않았으나 지난해 대구·경북지역 여야 국회의원 25명이 법률안 개정 발의에 적극적으로 나서 7번째 국립묘지로 지정됐다.
대구시는 이에 따라 작년부터 특별교부세 등 예산 16억원을 들여 국립묘지 위상에 걸맞게 신암선열공원을 새로 단장했다.
묵념하는 이 총리 (대구=연합뉴스) 김준범 기자 = 이낙연 국무총리가 1일 대구시 동구 국립신암선열공원 야외광장에서 열린 개원식에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 참석자들과 묵념하고 있다. 2018.5.1
관리 주체도 대구시에서 중앙 정부로 바뀌었다. 또 독립유공자만을 안장하는 특화된 국립묘역뿐 아니라 유골을 찾을 수 없는 독립운동가 위패와 영정도 봉안할 수 있게 됐다.
대구 신암선열공원, 1일부터 국립묘지 승격 이낙연 총리 "6천여 독립지사들도 모두 국립묘지에 모실 계획"
18.05.02 10:13l최종 업데이트 18.05.02 10:13 l 정만진(daeguedu)
▲ 송서룡 독립지사의 유족들이 신암선열공원의 국립묘지 승격 기념 행사에 참여한 후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기념 촬영을 했다. ⓒ 정만진
대구의 '신암선열공원'이 1일부터 '국립 신암선열공원'이 됐다. 국가보훈처의 일반 현충 시설이었던 대구 신암선열공원이 이날부터 국립 묘지로 승격된 것이다. 쉰두 분의 애국자를 모신 국립 신암선열공원은 이로써 나라 안에서 유일한 독립지사 전용 국립묘지라는 위상을 가지게 됐다.
신암선열공원의 국립묘지 승격 기념 행사가 5월 1일 오후 2시부터 사당 단충사 앞 야외 광장에서 펼쳐졌다. 국가보훈처 주최로 진행된 기념식에는 이낙연 국무총리,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 중앙정부 요인들과 권영진 대구광역시장, 김관용 경북도지사를 비롯, 일반 시민 500여 명이 참석했다.
▲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상임대표 배한동) 회원들이 사당 단충사 앞에서 '경축 신암선열공원 국립묘지 승격' 현수막을 든 채 신암선열공원의 국립묘지 승격을 환영하고 있다. ⓒ 정만진
기념식에는 대구경북 지역에 단 세 분밖에 없는 생존 독립운동가(배선도, 권중혁, 장병하)들과 그외 많은 독립지사의 유족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광복회 김명환 대구지부장, 독립운동정신 계승사업회 배한동 상임대표(경북대 명예교수), 민족문제연구소 오홍석 대구지부장 등 독립운동 관련 단체 회원들도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기념식은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자 제창, 묵념으로 시작됐다. 이어 김원휘 독립지사의 유족 등 네 명이 나란히 단상에 올라 1919년 3·1 운동 당시 대구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서문시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김태련 지사 등 신암선열공원에 모셔진 독립지사 쉰두 분의 성함과 업적을 차례차례 소개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제2묘역과 제5묘역 울타리에도 쉰두 분의 사진과 업적을 간략히 소개한 현수막 52장이 게시되어 국립묘지 승격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켰다.
▲ 김삼도 독립지사의 유족들이 신암선열공원의 국립묘지 승격을 맞아 묘소에 참배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정만진
이낙연 국무총리는 기념사를 통해 "앞으로 정부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더욱 연구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업적과 명예를 더 찾아내고 숭모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라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된 분들을 합당하게 평가하고 예우하는 일은 후손인 우리들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이 총리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6천여 독립유공자들을 국립묘지에 모시는 조치를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까지 취하겠다"고 말했다.
'선열들의 희생, 국가가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표어가 나부끼는 가운데 기념식을 마친 이 총리 등 참석자들은 국립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된 독립유공자의 묘소를 순회했다. 특히 산남의진 임용상 의병장의 묘소, 김태련 지사와 그의 아들로 일제에 의해 고문 치사당한 김용해 지사의 묘소는 직접 참배했다(관련 기사 : 아버지 구하려던 아들, 일제에 끌려가 고문 당해 숨져). 보훈처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 총리 등의 묘소 참배는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선열들을 추모하고, 그 희생을 국가가 책임지고 기리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뜻"이라고 의의를 밝혔다.
▲ 신암선열공원이 국립묘지로 승격된 사실을 기념하여 사당 단충사 앞에서 행사가 열리고 있다. ⓒ 정만진
신암선열공원은 대구 남구 대명동 일대 시립 공동묘지 일대에 흩어져 봉분되어 있던 독립유공자들의 묘소를 1955년 현재 위치로 이장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1987년 대구시는 묘역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여 신암선열공원으로 가꾸었다.
대구시는 신암선열공원의 국립묘지 승격을 앞두고 작년부터 올 4월까지 중앙정부의 특별교부세 등 16억 원을 들여 묘역 잔디 교체, 휴게 시설과 보행로 개선, 관리사무소와 화장실 정비 등의 공사를 완료했다. 현재 신암선열공원은 묘역 1만23㎡, 사당 단충사 114㎡, 관리동 450㎡로 이루어져 있다.
▲ 국립묘지 승격 기념 행사를 위해 사당 단충사 앞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는 신암선열공원 ⓒ 정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