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民主化運動の象徴」の死をめぐって

この人物の死去に伴っては、すでにたくさんの報道がなされており、コメントも数多く出されていますが、ここではここなりの観点から、その死について記録を留めておくことにしましょう。

韓国民主化運動の象徴、金槿泰顧問が死去
2011年12月30日09時26分


故金槿泰(キム・グンテ)民主党常任顧問。

盧武鉉ノ・ムヒョン)政権当時、「開かれたウリ党」議長を務めた金槿泰(キム・グンテ)民主党常任顧問が30日午前5時31分に死去した。64歳。

金顧問は京畿(キョンギ)高、ソウル大経済学科を卒業した後、ソウル大内乱陰謀事件、緊急措置9号違反、民主化運動青年連合(民青連)・全国民族民主運動連合(全民連)事件などで20年以上も手配と拘束を繰り返し、「反独裁闘争」をしてきた民主化運動の象徴的な人物。

1985年には民青連議長として活動して、安全企画部南営洞(ナムヨンドン)分室に連行され、‘拷問技術者’と呼ばれた李根安(イ・グンアン)元警監から半月近く電気拷問と水拷問を受けたりもした。

95年に金大中(キム・デジュン)元大統領から民主党副総裁として招聘されて政界に入門した金顧問は、96年、ソウル道峰甲で第15代国会議員に当選した後、第17代まで3選を果たした。その後、盧武鉉政権時代に「開かれたウリ党」院内代表、保健福祉部長官、「開かれたウリ党」議長などを務め、旧与党の指導級に浮上した。

しかし80年代に受けた拷問の後遺症に苦しみ、07年にパーキンソン病の診断を受け、事実上、政治活動を中断した。昨年は状態がやや好転し、6・2地方選挙当時は首都圏地域で支援遊説もしたが、最近また健康が悪化、先月29日には脳静脈血栓症という診断を受け、ソウル大病院で闘病生活をしてきた。入院治療を受けながら一時は健康を回復するかに見えたが、臓器活動が鈍って肺炎になるなど2次合併症が重なって死去した。

遺族は夫人イン・ジェグン氏と1男1女。斎場はソウル大病院葬儀場。

http://japanese.joins.com/article/924/146924.html

明洞聖堂・全泰壱橋・南営洞旧対共分室と朴鍾哲・牡丹公園など、ここに出てくる場所や人物のリストには、まさに「韓国民主化運動の象徴」総まくり、といった感があります。

そして全泰壱に会う

電鉄京春線に乗って知らない人のお墓参りツアー

"영원한 청년 동지이자 이정표… 우리는 그대를 잊지 못하리"
■ '민주주의자' 김근태 모란공원에서 영면
명동성당서 영결미사 후 전태일 동상 앞에서 노제
"그의 고통은 역사의 문신" 정치인·시민 1000여명 눈물로 마지막 길 애도

남양주=권영은기자
손현성기자
입력시간 : 2012.01.04 02:38:45 수정시간 : 2012.01.04 09:56:04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운구 행렬이 3일 오전 노제가 열린 서울 청계천 전태일다리로 들어서고 있다. 오른쪽에 전태일 동상이 보인다. 조영호기자

'민주주의자' 고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는 700여명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3일 모란공원에 울려 퍼졌다. 하늘도 이승과 작별을 고하는 그의 마지막을 애달파하는 듯 눈발이 거셌다. 정희성 시인은 이날 영결식에서 조시 '그대를 잊지 못하리'를 낭송하며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구나"라고 고인을 영영 떠나 보내는 아픈 마음을 담았다.

김근태 고문은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이날 오후 1시40분쯤 하관식이 진행되자 내내 차분해 보이던 김 고문의 부인 인재근씨도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흐느꼈다.

고인과 고교ㆍ대학 친구로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서울대 65학번 삼총사'로 불리던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도 울음을 터뜨렸다. 홀로 맑게 웃고 있는 고인의 영정 사진 앞에는 십자가에 박힌 예수의 상이 놓여져 그가 살아온 천로역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경기 안산시에서 온 신윤관(44)씨는 "고인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민청련) 활동을 좇아 청년운동을 했던 후배로서 그는 영원한 청년 동지이자 따라가야 하는 이정표였다"며 "그런 그가 고문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는 게 너무나 비통하다"고 말했다.

이날 진행된 하관식에선 김 고문의 웃는 얼굴이 그려진 대형 걸개그림 아래에서 추모객들이 고인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라고 적힌 붉은 천으로 관을 덮고 흙으로 취토했다. 김 고문은 문익환 목사, 노동자 전태일 등이 묻힌 모란공원에서 그렇게 영면에 들어갔다.

앞서 오전 9시 서울 명동성당 본당에서 추모 인파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영결 미사가 열렸다. 함세웅 신부는 영결미사에서 "김근태 형제는 불치의 병마와 투쟁하면서도 블로그에서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며 참여하라고 당부했다. 이제 99%의 참여로 평화 민주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약속을 하며 이 미사를 봉헌한다"고 밝혔다. 추모 미사 마지막 순서에선 추모객들이 고인이 애창하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다 같이 불렀고 참석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어진 영결식에서 원혜영 민주통합당 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김 고문의 고통은 독재의 어둡고 참혹한 시절을 기억하라고, 그래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세워진 것인지 기억하라고 명령하는 역사의 문신"이라며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99%의 서민과 중산층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영결식 후 운구 행렬은 청계천 전태일 다리로 이동해 전태일 동상 앞에서 노제도 지냈다.

김 고문은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이었다. 그는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 후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83년 민청련을 만들었다. 이 일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89년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이끌었고 80년대까지 구속과 투옥을 반복했다.

김 고문은 민주화 투쟁 경력으로 재야파의 대부로 불렸지만 '직업 정치인'으로서 받은 평가는 박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을 털어놓고 '아름다운 꼴찌'로 남았다. 2004년 총선 후 공약이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놓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논쟁해보자"고 했지만 동료들로부터 "바보" 취급을 당해야 했다.

김 고문이 가장 아꼈던 이인영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고인은 전체 삶이 훌륭했다. 정치인은 수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 중요하다"며 "오랜 역사를 놓고 볼 때 정치가 좋아져야 세상이 좋아지는데 그런 밑자락을 깔아준 사람"이라고 고인을 기억했다.

김 고문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2007년부터 파킨슨병도 앓았다. 지난달 10일 딸 병민씨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면서 그의 투병이 알려졌고 지난달 30일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갔다. 병민씨는 이날 오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많은 분들께는 민주주의자 김근태로 기억되길 바라고, 저는 저에게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을 선물해준 가장 저의 사랑하는 아버지로 기억하고 싶다"고 말했다.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201/h2012010402384521950.htm

記事入力 : 2012/01/04 08:03
明洞聖堂で金槿泰氏の告別式、野党関係者が多数参列
清渓川のチョン・テイル橋で出棺の儀式


明洞聖堂を出る金槿泰(キム・グンテ)民主統合党常任顧問の遺体を運ぶ行列。この日は金槿泰顧問の葬儀ミサが同所で執り行われた。3日朝撮影。/写真=共同取材団

 故・金槿泰(キム・グンテ)民主統合党常任顧問の告別式が3日、ソウル市内の明洞聖堂で執り行われた。民主統合党の元恵栄(ウォン・ヘヨン)、李容善(イ・ヨンソン)共同代表ら同党執行部をはじめ、孫鶴圭(ソン・ハッキュ)、鄭東泳(チョン・ドンヨン)、イ・ヘチャン常任顧問、韓明淑(ハン・ミョンスク)、李仁栄(イ・インヨン)、金富謙(キム・ブギョム)同党代表候補など、1000人以上が葬儀に参列して故人の冥福を祈った。また、統合進歩党からは李正姫(イ・ジョンヒ)、シム・サンジョン、柳時敏(ユ・シミン)共同代表や魯会燦(ノ・フェチャン)報道官などが参列し、朴元淳(パク・ウォンスン)ソウル市長も葬儀に駆けつけた。野党側の主要な人物はほぼ全員が告別式に姿を現した。

 元恵栄代表は追悼の辞で「金顧問の苦痛は、独裁の暗く残酷な時代や、民主主義がいかに多くの人たちの献身によって得られたものかを忘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の、歴史に刻まれた記録だ」と述べた。咸世雄(ハム・セウン)神父は告別ミサで「(天主教正義具現)司祭団は、生前の金顧問にもっと闘争するよう求めていた。金顧問が拷問の後遺症に苦しんでいたことを忘れていた」などと語った。金顧問の娘キム・ビョンミンさんはこの日朝にあるラジオ番組に出演し「父が歩んできた道や、求めてきた価値に比べると、政治家としてはあまり力を発揮できなかった。その点は残念に思う。しかし金槿泰の娘として生まれたことを誇りに思っている」と述べた。

 告別ミサを終えた金顧問の遺体を運ぶ行列は清渓川に移動し、チョン・テイル橋の前で出棺の儀式が執り行われた。葬礼委員会はチョン・テイル橋に訪れた理由について「金槿泰顧問は労働運動に身を投じ、民主化運動を始めたため」などと説明した。

 儀式を終えると、遺体を運ぶ行列は、埋葬地となる京畿道南楊州市の磨石牡丹公園に向かった。金顧問は普段から故・趙英来(チョ・ヨンレ)弁護士が埋葬されているこの場所に、自分も埋葬されたいと語っていたという。趙弁護士は金顧問や孫鶴圭前代表らと京畿高校・ソウル大学の同期生で、1965年ソウル大学入学組の学生運動三銃士などと呼ばれていた。

 下棺(棺を墓穴に下ろす)の際には、故人の笑顔が写された遺影と共に「参加する者が権力を生み出し、この世の方向性を決めるだろう」と書かれた横断幕が掛けられた。金顧問は昨年10月にこの文言を自らのブログに掲載し、これが遺言のような形となった。「リトル・金槿泰」と呼ばれる李仁栄前民主党最高委員は「“責任を持って行動するには、参与の意識を持って投票せよ”という意味のメッセージだ」と述べた。金顧問の遺体は赤い布に巻かれて永眠の場所に安置された。この赤い布には、聖公会大学の申栄福(シン・ヨンボク)碩座教授 (寄付金によって研究活動を行えるよう大学の指定を受けた教授)の文字で「民主主義者・金槿泰の棺」と書かれていた。

黄大振(ファン・デジン)記者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2/01/04/2012010400651.html

고문 당한 남영동 대공분실에…
경찰관이 바친 ‘김근태 추모 조화’

[한겨레] 이충신 기자
등록 : 20120101 22:03
분향소 설치 제안도…장례기간 복도에 불 켜놓기로


» 1일 오후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고문을 당했던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5층 15호실 앞에 조화가 놓여 있다. 인권보호센터 한 경찰간부는 “대부분의 직원들 사이에서 고인을 기리자는 공감대가 이뤄져 30일 조화를 놓았다”고 말했다. 김봉규 기자

한 경찰관이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고문을 당한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에 조화를 바쳤다. 앞서 또다른 한 경찰관은 같은 장소에 김 고문의 분향소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등 김 고문의 별세를 계기로 경찰 일부에서 ‘과거사에 대한 자성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김아무개 경사는 1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김 고문이 별세한 지난 30일 고인이 조사를 받던 취조실 문 앞에 조화를 바쳤다”고 밝혔다.

김 경사는 옛 조사실 문 앞 탁자 위에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라고 쓰인 근조리본을 매단 조화 바구니를 놓아뒀다. 센터 관계자는 “25년 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안타깝다”며 “너무 쓸쓸하니 조화라도 놓자고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인권보호센터 쪽은 김 고문의 5일장이 진행되는 동안 옛 조사실 복도 쪽 불을 항상 켜 놓기로 했다.

김 고문은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당했으며, 박종철씨는 1987년 이곳 509호실에서 물고문을 당해 사망했다. 경찰은 불행한 과거를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이곳에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를 만들고, 509호 취조실을 그대로 보존한 채 일반인에 공개하고 있다.

앞서 경찰청 기획조정관실 이준형 경위도 지난 30일 경찰 내부망과 소셜네트워크 ‘위키트리’에 글을 올려 “과거 경찰의 불법 행위를 자성하는 차원에서 센터에 김 고문의 분향소를 설치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한편, 경찰청은 김 고문 빈소에 조현오 경찰청장 명의의 조화를 보냈으며, 이로써 경찰의 입장 표명을 갈음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충신 기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2895.html

'故김근태 고문을 추모합니다'…남영동 대공분실에 조화
뉴시스
입력 : 2012.01.01 16:33


'故김근태 고문을 추모합니다'…남영동 대공분실에 조화

고(故) 김근태(64)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추모하기 위해 김 고문이 조사를 받던 취조실에 불을 켜두고 문앞 복도 테이블 위에 조화를 올려둔 것으로 알려졌다.

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는 구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고인이 과거에 고문을 당했던 장소다. 1987년에는 고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장소이기도 하다.

사진은 김 고문이 조사를 받던 취조실 문앞 복도 테이블 위에 놓인 조화다. (사진=경찰청 제공)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1/01/2012010100910.html

上の記事にある南営洞の旧対共分室は、現在は「警察庁人権センター」となっているのですが、ソウル大生だった朴鍾哲が命を落としたことに代表されるように、民主化運動家が拷問を受けた場所として知られていて、警察庁としてはなかなか扱いが難しいようです。

「拷問」については、単なる「負の歴史」というだけではなく、去年は「陽川警察署拷問事件」も起きていますから。

被疑者を拷問した警察、証拠隠滅か…監視カメラの一部削除 - 中央日報

[社説]いくら悪質な容疑者でも拷問捜査は許されない - donga_com[Japanese donga]

MB식 성과주의가 자초한 강북서장 항명 - 시사IN Live

경찰청 인권센터 ‘있으나 마나’
기사입력시간 [146호] 2010.06.28 11:06:41
정희상 기자

서울 용산구 갈월동 88번지, 짙은 밤색 벽돌로 지은 7층짜리 건물은 경찰 고문수사의 상징이다. 옛 이름은 ‘남영동 대공분실’. 1987년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숨지면서 그 악명의 베일을 벗었던 장소다. 김근태 민주당 고문이 1985년 이곳에 끌려와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몸이 처절히 망가지는 전기고문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경찰은 치욕스러운 반인권 수사의 산실인 이곳을 거울 삼아 미래 인권 교육장으로 사용하겠다는 취지로 보존하기로 했다. 2000년에는 박종철 열사가 고문 치사당한 현장인 509호실을 보존하고 나머지 조사실의 집기를 들어내 개조작업을 했다. 2005년 2월에는 경찰청 수사국 소속으로 인권담당 총책임 부서인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라는 간판까지 달았다. 센터장은 총경이 맡았다.


ⓒ시사IN 조남진
인권 교육장소로 삼겠다던 취지가 무색해진 서울 남영동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그러나 남영동 대공분실을 거울 삼아 과거를 반성하고 인권 경찰로 거듭나겠다던 ‘민주 경찰’의 의지는 현 정부 들어 한없이 퇴색했다. 촛불시위에 대한 무차별 폭력진압, 용산 철거민 강경진압 과정의 대형 참사 발생 등 굵직한 인권유린 사건이 잇따랐다. 급기야 최근 양천경찰서에서 피의자를 상대로 한 고문수사 망령이 되살아났다. 이런 인권 후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이곳 남영동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는 유명무실한 모습이다. 경찰은 정문 근처에 이곳을 알리는 표지판도 인터넷에 위치정보도 실어두지 않았다. 한동안 경찰 총경을 센터장으로 임명했지만 그마저도 현 정부 들어서는 몇 달째 공석으로 비워두고 있다. 이런 모습은 경찰에 왜 또다시 고문이 부활했는지를 짐작게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인권센터로 개방된 지 5년 만에 시민의 발길이 끊겼다. 공개 당시 경찰이 강조한 인권 배움터 구실도 더 이상 하지 못한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7763

3年ほど前に訪れたときには改装中ということで中には入れなかったのですけど、今はどうな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

李韓烈記念館と朴鍾哲記念館

[이사람] 치떨림·기막힘, 그 순간 잊지 못하기에…
[한겨레] 김경애 기자
등록 : 20120106 20:48 | 수정 : 20120106 21:06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모식 사회 맡은 조국 교수
박 열사와 고교·대학 동문 인연
“타인의 고통에 공감했던 후배
국가폭력, 경계하고 감시해야”



» 조국(47)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해마다 1월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1987년 1월16일 박종철군이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 피가 거꾸로 치솟던 ‘치떨림’과 장례를 마치고 유족들을 따라 내려간 부산 집의 마루에 놓인 영정사진을 보며 모두들 말을 잃었던 ‘기막힘’의 순간입니다.”
최근 초청 연사로 분주한 조국(47·사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14일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모식’에서 이례적으로 사회를 맡게 된 데는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조 교수는 박 열사의 부산 혜광고 1년 선배이자 대학 2년 선배다. 그가 초등학교를 2년이나 일찍 들어가고, 박 열사가 대학 재수를 하면서 엇갈렸던 만남은 84년 고교 동문회에서 신입생과 법대 학술지 편집장으로 처음 이뤄졌다. “그때 술자리 같은 곳에서 가끔 얼굴을 보는 사이였는데, 박종철군은 진지하면서도 소탈한 후배였죠. 타인의 고통,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의 아픔까지도 자기 일처럼 몸으로 아파하는 ‘공감력’이 아주 강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해 ‘6월 항쟁’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박 열사의 고문사 진상규명 투쟁에 합류했던 그는 “박 열사와 운동을 함께 했던 선후배들 모두가 지난 25년 동안 그날의 분노와 부채의식을 안은 채 저마다 그 뜻을 잇고자 노력해왔다”고 소개했다.

조 교수 역시 93년 고향과 대학 선배인 백태웅씨 등의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도운 혐의로 반년간 옥고를 치러, 국제앰네스티로부터 ‘양심수’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후 법학자로서 그는 박 열사와 같은 국가폭력 희생자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을 연구 주제로 삼아왔다. 2005년 박 열사의 영전에 헌정한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박영사)은 그 결과물의 하나다. “고문·가혹행위로 획득한 자백, 위법한 압수수색으로 획득한 증거물의 증거능력을 배제하는 이 법칙을 철저하게 적용함으로써 수사기관의 불법행위를 억제할 것을 제안한 책입니다.” 이후 대법원은 이 법칙을 채택했다.

이날 오후 2시 박 열사가 숨졌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열리는 올해 추모식에서는 특히 ‘박종철장학사업’의 본격 추진을 선언한다. 박 열사 후원회를 꾸려 기금을 조성해 서울대 재학생을 비롯해 학생운동가, 민주화운동 관련 유자녀 등을 지원할 예정이다. 또 유가족이 지원해온 혜광고의 ‘박종철 장학금’, 박 열사의 후배들이 저소득층 청소년을 주로 후원해온 ‘박종철 인권장학금’도 한데 모으기로 했다.

2007년부터 박종철기념사업회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조 교수는 “이명박 정권에서 촛불시민 무차별 탄압과 ‘양천서 물고문 사건’ 같은 공권력의 남용이 재연되고 있는 만큼 늘 국가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정당성을 감시해야 한다”며, 그것이 박 열사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경애 기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3790.html

ハンギョレ・サランバン - [このひと] 絶対に許せず、茫然とした その瞬間を忘れることができなく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