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智茢・朴正熙と朴槿恵

韓国語の元記事についているサブタイトルで記事の意図はわかりますけど、日本語記事ではそれが削除されていて、最初は「なんでいきなり維新末の話?」と思いました。

本題であるはずの朴槿恵の話は一段落しかありませんし、前後の脈絡への説明も特にありませんね。不親切といえば不親切ですし、ハイコンテキストな書き方と言えるかもしれませんが、それもまた悪くはないかな、と思います。



維新末の朴正煕、「車智茢カーテン」に囲まれ進言に耳を塞ぐ
FEBRUARY 02, 2013 07:32

朴正熙(パク・チョンヒ)元大統領は、政権序盤は外部との疎通を重視し、参謀の進言も積極的に聞き入れた。しかし、10月の維新で民心が離れ、車智茢(チャ・ジチョル)警護室長の勝手な行動もひどくなり、朴元大統領も周囲の声に耳を塞いだ。

●特別補佐官を外部疎通の窓口に

1969年、朴元大統領は当時、金正濂(キム・ジョンリョム)大統領秘書室長に特別補佐官の構成を指示した。できるだけ大家よりも研究成果を上げている若い教授の中から、兵役を終えた人、大学、出身の案配も考えて選ぶように言ったという。金室長は2ヵ月間、心血を注いで外交、国防、経済、社会、教育など各分野の最高の人材を選んだ。

その代わり、朴元大統領は大統領直属に委員会は置かなかった。効率性を高めるために、特別補佐官が事実上「1人委員会」となった。

特別補佐官は、該当分野の学界、言論界などの世論を朴元大統領に伝え、朴元大統領と虚心坦壊に討論する役割を担った。朴元大統領の統治哲学と方向を世間に伝える役割もした。特別補佐官は、申し入れればいつでも朴元大統領に会うことができたという。

朴元大統領は、若い教授でなければ内閣の長を務めた人を主に特別補佐官に任命したという。地位に欲のない人を選んだのだ。特別補佐官が長官職を狙って、現長官の弱点を探し、混乱をもたらすと考えたためだ。

朴槿恵(パク・クンヘ)次期大統領は、大統領選挙の時、李柱栄(イ・ジュヨン)特別補佐官団長の下、国防安保、統一外交、女性、雇用、ベンチャーなどの各分野の専門家から特別補佐官約10人を任命した。彼らは、公約に関する意見を朴次期大統領に伝える役割を担った。朴次期大統領は就任後、少数の特別補佐官を任命する予定だ。

●進言する人が徐々に減少

朴元大統領は1969年10月、秘書室長に就任した金正濂室長から大統領府秘書室の縮小を提案され、室長の思ったとおりにするよう快諾した。1970年代初め、柳赫仁(ユ・ヒョクイン)政務首席秘書官が、「閣下、学生をこれ以上捕まえては、悪循環が続きます。釈放してはどうですか」と言うと、朴元大統領が「まだ多く捕まっているのか。釈放しろ」と言ったエピソードもある。

しかし、朴元大統領は政権後半に車智茢警護室長のカーテンに囲まれ、十分に国民と疎通できず、側近の言葉に耳を傾けなかったと、当時の側近たちは言う。当時、車室長は、教授や世論指導層と食事の席を持ち、そこに朴元大統領を同席させ、影響力を広げ始めた。警護室長の任務を忘れ、外部行事の時に銃を着用しなかったという。

車室長は毎週金曜日、ソウル景福宮(キョンボククン)の練兵場で戦闘装甲車や大砲まで動員して華やかな国旗降納式を行った。降納式には、政治家、高級公職者や財閥総師まで呼び、30警備団軍人の敬礼を受け、威勢を誇示したという。パク・スンギュ民情首席秘書官が朴元大統領に「数ヵ月間、車室長がこんなことをしている。世間で話題になっている」と報告した。これに対して朴元大統領が、「直ちに止めさせろ」と言ったという。

しかし、この時すでに朴元大統領の心理は不安定な状態だった。車室長の問題を指摘しても、癇癪を起こす回数が増えたという。自ずと朴元大統領に進言をする人も減った。

特に、選挙を行うほど支持率が下がり、1977年の付加価値税導入で国民の強い抵抗にあうと、朴元大統領は、「生活を豊かにしたのに、こんなことも理解できないのか」と国民のせいにして耳を塞いだ。

http://japan.donga.com/srv/service.php3?biid=2013020282558

유신말 ‘차지철 장막’에 갇혀 국민 탓하며 직언에 귀 막아
기사입력 2013-02-02 03:00:00 기사수정 2013-02-02 03:31:51

아버지의 실패는 타산지석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집권 초반부엔 외부와의 소통을 중시하고 참모들의 직언도 적극 수용했다. 그러나 10월 유신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차지철 경호실장의 전횡이 심해지면서 박 전 대통령도 주변의 직언에 귀를 닫았다.

○ 특별보좌관들을 외부 소통 창구로

1969년 박 전 대통령은 당시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에게 특별보좌관 구성을 지시했다. “가급적 대가(大家)보다는 연구 성과를 올리고 있는 젊은 교수 중에서 병역을 마친 사람, 대학, 출신 안배도 고려해 인선을 해보라”고 했다는 것. 김 실장은 두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외교 국방 경제 사회 교육 등 각 분야 최고 인재를 뽑았다.

박 전 대통령은 대신 대통령 직속으로 별도의 위원회는 두지 않았다. 그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특보에게 사실상 ‘1인 위원회’ 역할을 맡겼다. 비서실장이 행정적 지원은 했지만 비서실과 독립적으로 운영됐다.

특보들은 해당 분야의 학계, 언론계 등의 여론을 박 전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박 전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박 전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방향을 시중에 전파하는 역할도 했다. 특보들은 신청만 하면 언제든지 박 전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특보로 젊은 교수 아니면 내각 수장을 이미 지낸 이들을 주로 임명했다고 한다. 자리에 욕심을 내지 않을 만한 인물들을 일부러 고른 것이다. 특보가 장관직을 노리고 현 장관에 대한 약점을 찾아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이번 대선 때 이주영 특보단장 밑에 국방안보, 통일외교, 여성, 일자리, 벤처 등 각 분야 전문가들로 특보 10여 명을 임명했다. 이들은 공약에 대한 의견을 당선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박 당선인은 취임 이후 소수의 특보를 임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 박정희, 임기 막판 직언에 귀 닫아

박 전 대통령은 1969년 10월 비서실장에 취임한 김정렴 실장에게서 청와대 비서실 축소 건의를 받고 “실장 소신대로 해”라며 흔쾌히 힘을 실어줬다. 1970년대 초 유혁인 정무수석비서관이 “각하, 학생을 더 잡아넣으면 계속 악순환이 될 것 같은데 좀 풀어주시죠”라고 말하자, 박 전 대통령이 “그래, 아직도 많이들 잡고 있나. 그거 풀어줘”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의 장막에 둘러싸여 제대로 민심과 소통하지 못했고 측근들의 직언에 귀를 닫았다는 게 당시 측근들의 공통된 얘기다. 당시 차 실장은 교수나 주요 여론 지도층과의 식사 자리를 주선해 거기에 박 전 대통령을 합석시키면서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차 실장은 매주 금요일 서울 경복궁 연병장에서 전투 장갑차, 대포까지 동원해 화려한 국기하강식을 열었다. 이 행사에는 정치인, 고위 공직자들과 재벌 총수까지 불러 배석시키고 30경비단 군인들로부터 경례를 받으며 위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박승규 민정수석이 박 전 대통령을 찾아가 “수개월째 차 실장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세간에 말들이 많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이 “당장 집어치우고 못하게 하라”고 해 중단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박 전 대통령도 심리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차 실장의 문제를 지적해도 짜증을 내는 횟수가 늘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박 전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차 실장은 경호를 이유로 직언할 만한 인물이 박 전 대통령의 곁에 가는 것을 차단했다.

특히 선거를 치를수록 지지율이 떨어지고, 1977년 부가가치세 도입 이후 국민들의 큰 저항에 부딪히자 박 전 대통령은 “국민들 밥 좀 먹고 살게 해 놓았더니 이것도 이해 못하나”라고 국민을 탓하며 귀를 닫았다.

동정민 기자

http://news.donga.com/Politics/3/00/20130202/527622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