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安所管理人の日記:なんでまた高麗大が?

ふむ。これ、どう見ても、安秉直・ソウル大名誉教授が発掘した資料と同一のものですね。

それをどうして、高麗大でわざわざ「新資料公開」と称して記者会見しているのか、よくわかりません。これだけ見ていると、昨日の朝鮮日報毎日新聞のスクープ報道がまるでなかったかのようです。

旧日本軍が組織的に慰安所を管理 韓国で新資料公開
2013/08/08 16:23

【ソウル聯合ニュース】戦時中に日本軍が占領地で慰安所を直接管理していたことを示す資料が新たに公開された。

 高麗大学の韓国史研究所は8日、1940年代にビルマ(現在のミャンマー)とシンガポールに滞在し、日本人が運営する慰安所で従業員として働いていた朝鮮人が残した日記の原本を公開した。

 同研究所によると、日記の作成者(1905〜79年)は経済的理由から42年に朝鮮を離れて東南アジアに向かい、同年8月20日から44年末まで2年余り現地に滞在した。43年から翌年にかけ、日記で慰安所慰安婦についてつづっている。

 日記によると、作成者は毎日午前、日本軍の兵站(へいたん)司令部に慰安婦に関する営業報告を提出していた。43年1月12日の日記には「航空隊所属慰安所の収入報告書を連隊本部に提出した」と書き残している。当時の日本軍が慰安所を直接管理していたことが分かる。

 また、日記には結婚後に慰安婦をやめた女性らが日本軍の復帰命令を受け、再び慰安婦に戻ったとの記録もある。43年7月29日の日記には「以前に村山さんの慰安所慰安婦をしていて、夫婦生活を送るため出ていった春代と弘子は、今回兵站の命令で再び慰安婦として『きんせん館』に来ることになった」とある。

 韓国史研究所の朴漢竜(パク・ハンヨン)研究教授はこれについて「軍が絶対的な人事・命令権を持ち慰安婦に直接命令を下し、管理していたことを示すものだ」と指摘した。

 日記には、日本の軍医が慰安婦の診察を行っていたことや、慰安所の移動を日本軍が管理していたことも記録されている。「第55師団から(慰安所を)マンダレーに近いイエウに移転せよという命令が…に下った。慰安婦一同は絶対に反対するという」(43年3月10日)、「…は司令部の命令に耐え切れず、慰安所をイエウに移すことになった」(43年3月14日)などと記されている。

 さらに、44年4月6日の日記には「第4次慰安団」という言葉が登場し、日本軍が少なくとも4回にわたり組織的に慰安婦を募集していたと推測できる。

 「第4次慰安団」の存在は、米軍が45年11月に作成した調査報告書にある「42年7月10日に慰安婦703人と業者約90人が釜山港を出港した」という記録とも一致する。

 朴研究教授は「この日記は現地の日本軍と朝鮮総督府、朝鮮司令部が組織的に慰安婦の強制動員に介入したことを示すもの。元慰安婦に関する真実究明などに有用に活用されるだろう」と話した。

http://japanese.yonhapnews.co.kr/headline/2013/08/08/0200000000AJP20130808002400882.HTML

"일본군 조직적으로 위안부 동원·관리"…자료 공개


공개된 일본군위안소 관리인의 일기공개된 일본군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이 8일 오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에서 공개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의 일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 일기는 지난 1942년부터 1944년 말까지 버마(현 미얀마)와 싱가포르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일하던 한 조선인이 작성한 것으로, 일본군위안소의 경영 실태와 일본군위안부의 생활상 등이 담겨 있다. 또 일본군이 일본군위안부를 여러 차례 조직적으로 동원한 사실 등도 남겨져 있다. 2013.8.8

일본군,위안소 영업현황 보고받고 결혼한 여성에게 위안부 복귀 명령도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일본군위안소 관리자 일기 원본 공개

(서울=연합뉴스) 김동규 기자 =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점령지에서 위안소를 직접 관리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자료가 공개됐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는 8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942년 8월부터 1944년 말까지 미얀마와 싱가포르에 체류하면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위안소에서 종업원으로 일한 조선인이 남긴 일기 원본을 공개했다.

한국사연구소에 따르면 일기 작성자(1905∼1979)는 조선에서 대서업 등을 하다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1942년 처남과 함께 동남아로 떠나 1942년 8월20일부터 1944년 말까지 2년 5개월간 체류했다. 1922∼1957년 35년간 적은 그의 일기 가운데 위안소 관련 내용은 1943∼1944년 2년치에 담겨 있다.

작성자는 일기에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과 위안소 운영 실태에 관한 기록을 여러차례 남겼다.

일기를 보면 작성자는 매일 오전 일본군 병참사령부에 위안부 관련 영업 일보를 제출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43년 1월 12일자 일기는 "항공대 소속 위안소의 수입보고서를 연대본부에 제출했다"고 기록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직접 관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혼한 뒤 위안부를 그만둔 여성에게 일본군이 복귀 명령을 내려 다시 위안부로 복귀한 기록도 담겨 있다.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인의 일기 공개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인의 일기 공개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이 8일 오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에서 공개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의 일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 일기는 지난 1942년부터 1944년 말까지 버마(현 미얀마)와 싱가포르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일하던 한 조선인이 작성한 것으로, 일본군위안소의 경영 실태와 일본군위안부의 생활상 등이 담겨 있다. 또 일본군이 일본군위안부를 여러 차례 조직적으로 동원한 사실 등도 남겨져 있다. 2013.8.8

"이전에 무라야마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생활하러 나간 하루요(春代)와 히로코(弘子)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킨센관에 있게 되었다더라."(1943년 7월29일자)

박한용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이에 대해 "군이 절대적인 인사·명령권을 갖고 위안부에 대한 직접적인 명령과 통제를 한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일기에는 일본 군의관이 직접 위안부를 검사했다는 기록, 위안소의 이동을 일본군이 통제한 기록 등도 적혀 있다.

"55사단으로부터 만다레이와 가까운 이에우로 이전하라는 명령이…에 떨어졌다. 위안부 일동은 절대 반대한다고 한다."(1943년 3월10일), "…는 사령부 명령에 견디지 못하고 위안소를 이에우로 옮기게 되었다"(1943년 3월14일)

또 1944년 4월6일자 일기에서 보이는 '4차 위안단'이라는 표현에서는 일본군이 적어도 4차례에 걸쳐 조직적으로 위안부를 모집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4차 위안단'의 존재는 미군이 1945년 11월 작성한 조사보고서에서 '1942년 7월10일에 위안부 703명과 업자 약 90명이 부산항을 출항했다'고 기록한 것과도 일치한다.

박한용 연구교수는 "이 일기는 현지 일본군과 조선총독부, 조선사령부가 조직적으로 위안부 강제동원에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라면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는 등 연구에 유용하게 사용될 자료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일기의 소장자인 오채현 타임캡슐박물관 관장은 "10여 년 전 지방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한 일기에 군부대·구락부·보건소 등의 단어가 많이 나와 직관적으로 위안부와 관련 있는 자료라 보고 입수해 연구기관에 이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2013/08/08 13:27 송고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8/08/0200000000AKR20130808109500004.HTML


追記:この聯合電、よりによって朝鮮日報の日本語サイトが転載してますね。自分ところのスクープをまるっきり無視するような記事をそのまま載せて、中の人はいったい何を考えているんでしょうか?

旧日本軍が組織的に慰安所を管理 韓国で新資料公開 - Chosun Online 朝鮮日報

またこちらは、同じサイトに載っているNEWSISのフォトニュースです。この写っている人物が、「民族問題研究所のパク・ハンヨン教育広報室長」というわけですか*1。現物を持ち出してきて「見せびらかす」ところを写真に撮らせている、という図のようにも見えます。

記事入力 : 2013/08/08 15:05
慰安所管理人の日記公開

 民族問題研究所のパク・ハンヨン教育広報室長が8日午前、ソウル市城北区の高麗大学で記者会見に臨み、日本軍の慰安所で管理人として働いていた朝鮮人が残した日記を取材陣に公開した。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3/08/08/2013080802313.html

こちらは日記原本を現在所蔵している博物館の館長さんのようですね。

일본군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입력 : 2013.08.08 13:58

▲ 오채현 타임캡슐박물관 관장이 8일 오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버마 일본군 위안소 관리자 일기 공개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인이 쓴 일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뉴시스

http://photo.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08/2013080801927.html

後追い記事もいくつか出ていますが、その中で目を引いたのが「オーマイニュース」。高麗大の記者会見を伝える記事の末尾に、「10年以上前に地方の古書店でこの日記を発掘したオチェヒョン・タイムカプセル博物館長は、研究のために落星垈経済研究所と高麗大韓国史研究所に日記を貸した。オ館長は『慰安婦の実体を正しく突き止めることができればという心に、何の条件もなく、ソースを提供することになった』と明らかにした」という記述が見えます。その場に同席していた館長さんご本人が話したということのようですね。

ニューライトの総本山である落星垈経済研究所と、バリバリ左派の民族問題研究所系と思しき高麗大韓国史研究所とが、共同研究的なものをできるはずもありません。一つの資料をめぐる両者の動きはどうやら、「バラバラ」と言う以上に、対立的・対抗的なものであるようです。

"일본군이 콘돔 배급"... '위안소 카운터의 일기' 공개

곳곳에 일본군 관리 정황 기록... 고노담화 부정 움직임에 제동
13.08.08 17:13 l 최종 업데이트 13.08.08 21:24 l
안홍기


▲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가 8일 공개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 일기자료' 원본. ⓒ 안홍기

태평양전쟁 당시 미얀마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위안소에서 카운터로 일한 조선인의 일기가 전면 공개됐다. 최근 일본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을 인정하고 사죄한 1993년 '고노 담화'를 부인하는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이를 정면 반박하는 사료가 공개된 것.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소장 정태헌)가 8일 고려대 문과대 B110호에서 공개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 일기자료'는 1942년 여름부터 1944년 말까지 미얀마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위안소의 '쵸우바'(카운터)로 일한 '조선인'의 일기장이다.

한국사연구소에 따르면 이 일기를 쓴 사람은 1905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대서업 등을 하다가 빚을 많이 지게 돼 1942년 처남과 함께 조선을 떠나 1944년 말까지 미얀마와 싱가포르에서 위안소 종업원 등으로 일했다. 일기의 주인공은 1979년 사망했지만, 연구소는 개인 신상을 밝히진 않았다.

병참 명령, 폐업 위안부도 위안소 복귀시켜

한글과 한자, 일본글을 섞어 쓴 일기에선 일본군이 위안부에 대해 직접 명령하고 통제한 상황이 드러난다.

1943년 7월 29일자 일기
"아라이씨와 병참에 가서 사쿠(콘돔)의 배급을 받았다. 위안부 진료소에 가서 번외(番外) 2, 3인 위안부 진찰을 시켰다. 이전에 무라야마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생활 하러 나간 하루요(春代)와 히로코(弘子)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킨센관에 있게 되었다더라."

이 일기에는 후방지역인 싱가포르에선 한 위안소의 위안부들이 절반 가까이가 계약기간이 만료돼 각 출신국으로 귀환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전방지역인 미얀마에서 작성된 1943년 7월 29일자 일기에는 결혼을 해서 위안소를 떠난 위안부 출신 여성들에게 일본군이 명령을 내려 다시 위안부 생활을 하게 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박한용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이 대목은 위안소에 대해 일본군이 절대적인 명령권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또한 위안소에서 쓰이는 콘돔을 정기적으로 배급하는 곳도 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7월 26일자 일기에 위안부 신체검사도 군의관이 맡게 됐다는 내용을 고려하면 전방지역 위안소는 일본군의 직접적인 관리 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안소가 매일 군에 영업내용을 보고한 정황도 나타나 있다. 이 일기 1943년 1월 12일자에는 항공대 소속 위안소의 수입보고서를 연대본부에 제출했고, 같은 해 8월 12일자에는 병참사령부에 영업일보를 제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위안소가 사실상 군의 관리 하에 있었고 민간인들은 단지 운영만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 8일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의 박한용 연구교수가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 일기자료' 원본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 안홍기

'대규모 위안단' 동원 입증... "피해자 증언에 힘 실어"

1944년 4월 6일자 일기에는 "재작년(1942년) 위안대가 부산에서 출발할 때 제 4차 위안단의 단장으로 온 츠무라"라는 대목이 있다. 이전에도 1·2·3차의 위안부 동원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며, 조직적이고 대규모 동원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내용은 1945년 11월 미군이 미얀마에서 일본인 위안소 경영자를 붙잡아 심문한 내용을 담은 조사보고서와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 보고서엔 '1942년 7월 10일 위안부 703명과 업자 약 90명이 부산항을 출발했다'는 내용이 있다.

박 교수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쪽에서는 살아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해 '믿을 수 없는 내용'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러나 이번 일기 내용이 문옥주 할머니와 같이 실제 버마(미얀마)에 끌려간 분들이 증언한 내용과도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어, 피해 당사자들이 얘기하는 진실에 대한 방증으로 힘을 싣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이 일기 중에선 1942년 분이 빠져 있어 위안부 동원과정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아쉬움도 있다. 10여 년 전 지방의 한 고서점에서 이 일기를 발굴한 오채현 타임캡슐박물관장은 연구를 위해 낙성대경제연구소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에 이 일기를 빌려줬다. 오 관장은 "위안부의 실체를 제대로 밝혀냈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무 조건 없이 원본을 제공하게 됐다"고 밝혔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94217

*1:この人物が、高麗大学校の韓国史研究所の研究教授を兼ねていて、そのコネで高麗大で会見を開いたと。「本職」があっての「研究教授」なら、日本で言うところの「客員教授」もしくは「客員研究員」といった感じのポジションでしょう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