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寿城池と水崎林太郎

朝鮮半島の近代史には疎いもので、この人物と貯水池のことは、朝日新聞の記事を読んで初めて知りました。

貯水池つくった日本人しのぶ 韓国・大邱で追悼式
大邱=貝瀬秋彦 2015年4月11日12時46分


10日、韓国・大邱にある水崎林太郎氏の墓に献花する日韓の関係者ら=貝瀬秋彦撮影


韓国・大邱にある水崎林太郎さんの墓には桜が舞い散っていた=10日、貝瀬秋彦撮影

 日本が朝鮮半島を植民地支配していた時代に、干ばつや洪水に悩む農民たちのために奔走し、貯水池をつくり上げた岐阜県出身の水崎林太郎さんをしのぶ追悼式が10日、韓国南東部の大邱(テグ)で開かれた。地元の人が守ってきた水崎さんの墓の前で、参加者らは日韓の絆の大切さをかみしめた。

 1915年に開拓農民として大邱に入植した水崎さんは、当時の朝鮮総督府などに掛け合い、巨額の支出を引き出して27年に貯水池を完成させた。寿城(スソン)池と呼ばれ、今は大邱市民の憩いの場にもなっている。

 水崎さんは39年に生涯を閉じるが、「寿城池の見えるところで」との遺言に基づき、池を見下ろす丘に埋葬された。その墓を地元の徐彰教(ソチャンギョ)さん一家らが守ってきた。徐さんの父親が水崎さんを一時、居候させていた縁からだ。徐さんは昨年亡くなったが、遺骨の一部は遺志に従って水崎さんの墓のそばに埋められた。

 墓を守る活動は息子や知人らが受け継ぎ、今年の追悼式には日韓から多くのゆかりの人が参加。別所浩郎・駐韓日本大使も駆けつけた。韓日親善交流協会の会長職を徐さんから引き継いだ李東根(イドングン)さん(49)は、最近の日韓関係の悪化に触れたうえで、「反目と葛藤はだれにも幸福をもたらさない。親善交流をしながら希望を抱いていきたい」などと話した。

 水崎さんのひ孫の小野裕美さん(41)=岐阜市=も参加。「こういう場で日韓が交流し合い、心を通わせていけたらいいなと思っています」と語った。(大邱=貝瀬秋彦)

http://digital.asahi.com/articles/ASH4B42CVH4BUHBI00J.html

このエピソードがこの時期に取り上げられたのには、当地での世界水フォーラム開催という事情もあるようです。

大邱・寿城池の築造に尽力 水崎林太郎を追悼
2015/04/10 18:01

大邱聯合ニュース】韓国・大邱市で10日、寿城池の築造に尽力した日本人、水崎林太郎(1868〜1939年)の追悼式が営まれた。

 民間団体の韓日親善交流会が主管した追悼式には別所浩郎駐韓日本大使、細江茂光岐阜市長、同交流会の李東根(イ・ドングン)会長らが出席した。

 岐阜県出身の水崎林太郎は、韓国が日本の統治下にあった1915年、開拓農民として大邱市に渡った。農業用水の枯渇を解決しようと水利組合を設立し、朝鮮総督府から支援を受け1927年4月、寿城池を完工した。池の築造には10年の歳月がかかった。

 1939年に亡くなるまで寿城池の管理人を務めた。遺言により寿城池が見渡せる山に埋葬された。


追悼式の様子=10日、大邱聯合ニュース)追悼式の様子=10日、大邱聯合ニュース

http://japanese.yonhapnews.co.kr/Locality/2015/04/10/3000000000AJP20150410002800882.HTML

こちらのブログには、周辺も含めて墓域が写真付きで紹介されています。

2014.06.13. 수성못을 축조한 "미즈사키린타로"를 만나다. - 호박이야기

ともあれ、こうした過去の事績についてああだこうだと意義付けたり持ち上げたりといった振る舞いは、当人の思いとは無関係に、後世の暇な人間がすることです。ただ、その後世の暇人の一人としてせめて、その行いがあったことそれ自体を記憶にとどめ、尊重したいと思います。

[자유성]수성못을 만든 일본인
2015-03-23

대구 수성못은 일제강점기때 처음 조성됐다. 일본인 미즈사키 린타로가 주도적으로 나서 만든 저수지다.

수성못이 조성되기 전, 수성들 일대 농민들은 신천의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 대구부청(大邱府廳)에서 신천의 물을 끌어다 상수도로 이용하면서 수성들 일대는 농업용수가 부족해졌고, 이 때문에 큰 어려움에 처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이가 바로 미즈사키 린타로였다. 개척농민으로 대구에 정착한 그는 곧바로 수성못 축조를 위해 수리조합(水利組合) 설립에 나선다. 완강하게 반대하는 총독부를 설득해 사업비를 지원받고, 1924년 5월26일 수성수리조합 설립 인가서를 받아낸다. 수성못은 그해 9월27일 착공에 들어가, 1927년 4월24일 마침내 완공한다.

미즈사키 린타로는 임종 직전까지 수성못에 특별한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생전에는 늘 “내가 죽으면 장례는 전통조선식으로 하고, 수성못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1939년 12월 세상을 뜨자 그의 유언대로 수성못이 바라보이는 곳에 묻혔다. 광복 이후 “일본인 무덤을 왜 이렇게 잘 돌보느냐”고 의아해 할 때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우리에게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즈사키 린타로에 대해 배타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과거사와 그가 일본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는 유연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대구에서의 그의 이력은 식민 지배국과 피지배국의 경계를 넘어선 행보였다. 맹목적인 반일정서는 오히려 깊은 늪에 빠지는 악재가 될 수 있다. 올바른 역사인식이라는 대의를 놓쳐서도 안되지만, 일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배척하는 시각도 이제는 거둘 때다. 그것이 어쩌면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 우리가 풀어야할 과제인지도 모른다.

백승운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팀장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50323.010310844320001

ちなみに、近々開通するという大邱の地下鉄3号線が、この辺りを通るみたいです。「수성못(TBC)」という駅名が見えます。

대구 도시철도 3호선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