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陽市の「二つの顔」:太極団と金井窟をめぐって

かつて一度訪れたことのある高陽市高陽市顕忠公園(太極団合同墓地)と金井窟について、朝鮮日報が2008年6月に記事にしているのを見かけました。両者の由来と今日までに至った歴史的流れとがバランスよく整理されたいい記事です。

blue-black-osaka.hatenablog.com

[6월, 한 도시 두 얼굴] 비밀 학생유격대 '태극단'
서지혜 리포터 입력 : 2008.06.30 04:45

北 탄약 수송열차·포탄 저장고 폭파 등 맹활약
국군 서울수복 이후 지역 치안활동 관련 논란도

고양시에는 6·25 전쟁중 북한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학생들로 구성된 자생유격대 '태극단 합동묘지'가 있는가 하면, '인민군 부역혐의 집단 학살'이라는 멍에 때문에 지난 50여년간 잊혀지고, 숨겨졌던 '금정굴' 또한 공존하고 있다. 호국의 달 6월에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묻어두고 있는 두 곳을 찾아보았다. 편집자

지난 21일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 '태극단 합동묘지'에 태극단동지회 임원 네 명이 모였다. 묘지는 주변에 오밀조밀 들어선 상가와 고층 아파트 사이에 가려져 찾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입구를 들어서면 잘 정리된 잔디공원이 펼쳐지고 그 가장자리에 태극단 묘역과 고양시 현충탑이 위용있게 서 있다.

이곳에서 이순창(76) 회장은 디지털 카메라로 묘역을 찍느라 분주했다. "'태극단' 영화를 DVD로 옮겨 놓으려고 해. 요즘 사람들은 비디오 테이프 안 보잖아." '태극단' 영화는 1984년 국방부 홍보관리소에서 제작된 것으로, 한국전쟁 중 태극단의 유격활동을 담고 있는 30분 분량의 반공영화다.

전쟁 당시 죽음도 두렵지 않던 애국소년들은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그들이 58년간 하루도 잊지 못한 태극단은 어떤 단체였을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중부지역이 북한군 수중에 떨어지자 고양, 파주 지역에서는 자생적으로 유격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태극단은 경의선의 중심인 일산에 본부를 둔 지역 유격대였는데, 수색에서 문산까지 흩어져 있던 조직들이 태극단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큰 조직체가 되었고, 그 인원은 24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 대부분이 경의선으로 통학하던 10~20대 학생들로, 통학 열차 안에서 평소의 행동, 친분 등을 감안하여 조직하게 되었다.

단원들은 비밀리에 한 곳에 모여 태극기의 제작과 배포, 전단살포를 벌이는 한편, 7월 말 수색지역에서 의용군으로 강제 징용당한 30여명의 청년들을 도피시키고, 8월 초에는 용산~평양간 경의선 철로 전화선을 절단해 북한군의 통신을 방해했다. 또, 경의선 화전역 부근의 철로를 이탈시켜 북한군 탄약 수송열차를 폭파하고 문산역 북쪽 북한군의 포탄저장고를 폭파하는 데도 기여했다.

이들 조직이 북한군에 노출되기 시작한 것은 9·28 서울 수복을 앞두고 벌어진 태극단 백마지단의 정발산 전투였다. 이때까지 퇴각하지 않고 있던 북한군들이 태극단 단원을 잡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잇따라 학살당했다. 수복을 열흘 정도 남긴 무렵이었다.


‘반공유적지 1호’로 지정된 태극단 합동묘지. 김건수 객원기자

10월 초 국군이 고양·파주를 수복한 이후, 태극단은 지역 치안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특히 이 기간 중 태극단이 '부역혐의 민간인 학살'에 관련되었다는 논란에 대해서는 지난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문'에서 '태극단이 처형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처형에 이르기까지 연행·감시·호송 등의 여러 방법으로 크게 조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양금정굴사건 진실규명 결정문 335p)고 결론지은 바 있다.

10월 말, 무기를 반납한 후 대원들이 국방부정훈국 별동대 등에 배치되면서 자연스레 해산되었다.

지금의 태극단 묘역은 1957년 9월 파주 지역에 가매장되어 있던 45위의 유해를 현재 위치로 합동 이장한 것으로, 1980년대 이후 다른 곳에 묻혀있던 순국단원 9위도 옮겨와 현재의 54위가 모셔지게 되었다. 한편, 지난 3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개정법'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오는 10월부터 살아남은 태극단원 40명도 국가유공자로 격상되게 되었다.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9/2008062900841.html

[6월, 한 도시 두 얼굴] 양민 집단학살의 현장 '금정굴'
서지혜 리포터 입력 : 2008.06.30 04:45

과거사위 "부역과 무관한 주민이 대부분 피해"
유족들 "평화공원 조성… 인권 교육의 장으로"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에는 주민들이 아침등산으로 즐겨찾는 황룡산이 있다. 이 자그마한 산을 10여분 오르면 푸른 비닐로 덮여 있는 금정굴이 나온다. 원래 금정굴은 일제시대 강제징용을 피하려고 주민들이 금 채굴을 핑계로 팠던 동굴로, 직경 4m, 깊이 17m 가량의 구덩이였다. 그러나 1990년 송포동의 향토조사를 하던 김양원(당시 고양시민회 회장)씨는 지역에서 나도는 소문을 하나 듣게 된다. '금정굴에서 집단 학살이 있었다'는 이야기. 김씨가 소문의 사실여부를 확인해 가던 중, 유족들이 모였고 '금정굴 양민학살 사건 희생자 유족회'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후 유족들과 시민단체들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 발굴작업을 시작했고, 굴 속에서 153구의 유골과 탄피, 도장 등이 나오며 '금정굴 사건'이 실제 있었던 일로 확인되었다.

금정굴 사건의 발단은 1950년 10월 초, 국군의 고양·파주 지역 수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양경찰서 관내 경찰은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한 혐의가 있는 자와 관련 행불자 또는 도피자 가족을 연행해서 구금했다. 조사과정에서 고문이 가해졌고, 이후 10월 9일부터 한번에 20~40명씩 금정굴로 끌고 가서 총살하고 암매장하기 시작했다. 처형이 끝난 것은 같은 해 11월 2일 당시 중앙정부에 설치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소속 경찰관과 치안대원을 체포한 직후였다.

지난해 6월 26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국가기관 자료, 언론 보도, 유족회 녹화 테이프 등 자료를 바탕으로 내린 '진실규명 결정문'에서 '(금정굴)희생자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던 지역주민들로서, 이중에는 북한 점령기 인민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소극적인 부역행위를 했던 사람도 일부 있으나,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혐의자의 가족원 및 이와 무관한 지역주민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적법절차를 준수하지 않고 비무장 민간인을 집단총살한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라며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 임시 보관 중인 유골·유해를 영구 봉안하는 조치, 금정굴 지역에 평화공원을 설립하고 적절한 위령시설을 설치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금정굴은 여전히 파란비닐에 덮인 채 15년전 모습 그대로다.


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금정굴 현장. 김건수 객원기자

금정굴 사건으로 부친과 형 두 분을 잃은 서병규(73) 유족회장은 "진실이 밝혀졌지 않습니까? 경찰서에서 공권력으로 이렇게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데, 사과 한번 없단 말이에요. 58년간.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편하게 모시는 것이 우리 의무인데, 정말 답답합니다"고 말했다.

금정굴 사건을 1990년부터 조사해 온 고양시민회측은 "비닐로 덮여 있는 금정굴의 현장보존 문제와 13년째 서울대병원에 임시보관 중인 유골들을 하루빨리 안치시키는 일이 시급하다"며 "유족들은 위령제에서 경찰서 책임자가 공식사과하고, 금정굴을 평화공원으로 조성해서 인권평화 교육의 장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오는 9월 27일 열리는 제58기 합동위령제에서는 시민들에게 불행한 역사를 알리는 문화·학술·종교 행사들이 처음으로 시청의 보조금을 받아 치러지기로 예정돼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9/2008062900842.html

この「二つの顔」をめぐる当事者・関係者間の雰囲気は、こうした動画や高陽新聞の記事からも垣間見られます。


ともに追慕式・慰霊祭は継続的に行なわれ、高陽市関係者もそこには参加しています。どっちかを取ってどっちかを無視するわけにはいかないのが現状であろうと思われます。太極団戦友会(宣揚会)会長が見せている「苛立ち」は、まさにそのへんから来るものなのでしょう。

62주년 태극단 순국 합동 추모식
[1095호] 2012년 10월 12일 (금) 14:10:26 남동진 기자

“지금도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로운 대한민국의 안위가 위협 받는다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싸움터로 달려가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태극단선양회(회장 이순창)는 28일 오전 일산서구 덕이동 태극단 합동묘지에서 ‘제62주년 태극단 순국단원 합동 추모식’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선양회 회원 및 박윤희 시의회 의장, 단체장, 보훈·안보단체 협의회장 등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사, 추념사, 추모시 낭송, 성명서 발표, 결의문 채택, 구호제창, 분향 순으로 개최됐다.

이순창 태극단선양회 회장은 추모사를 통해 “우리 선배들은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싸웠다”며 순국선열에 대해 위로의 뜻을 전하고 안보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이어 참석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금정굴 평화공원 조성사업에 대한 반대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가며 태극단의 충절을 지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http://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051

태극단 합동묘지에서 열린 6.25기념행사
(고양=뉴스1) 박세연 기자 | 2015.12.13 13:24: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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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태극단 학도병 합동묘지에서 열린 6.25전쟁 기념행사에서 로버트 러니 박사 부부, 네드 포니씨 부부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로버트 러니 박사는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피란민 14,000명을 구출한 화물선 메러리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 네드 포니씨는 흥남철수작전을 지휘한 미 해병대 포니 대령의 손주다. 오른쪽 세번째부터 빅토리호에 탑승했던 김영숙 수녀님, 로버트 러니 박사 부부, 네드 포니씨 부부. 2015.12.13/뉴스1

http://news1.kr/photos/details/?1683605

전쟁의 상처 씻어내고 평화를 노래하다
금정굴 위령제, 풍성한 참여행사로 가족이 즐거운 평화예술제

[1095호] 2012년 10월 10일 (수) 15:56:54 남동진 기자


▲ 위령제를 마치고 일산경찰서로 이동하는 상여행렬.


▲ 예술제 중앙무대에서 진행된 가위바위보 게임에는 어른 아이 모두 손을 내밀며 즐거워했다

“내년에는 반드시 평화공원에 안치시켜 드리겠습니다. 편히 쉬소서.” 한국전쟁 당시 국가로부터 학살당한 지 어언 60년. 아직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이곳저곳에 옮겨가며 떠돌고 있는 금정굴 희생자들의 유골들. 이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한 제 62주기 고양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2일 일산동구청에서 진행됐다. 청아공원으로 유골들을 옮겨온 이후 처음 진행됐던 이날 위령제는 지난 8월 국가를 상대로 낸 배상판결에서 승소한 이후 처음 마련된 행사라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금정굴 유족회 마임순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고양시의 노력으로 유골을 청아공원에 옮겨왔지만 아직까지 시의회에서 조례를 통과시키지 못해 평화공원 조성사업이 요원하기만 하다”며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 위해 평화공원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번 보상판결에서 배상금을 받은 금정굴 유족들은 배상금의 5%를 평화재단(가칭)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혀 참가자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전했다. 이춘열 고양평화예술제 조직위원장은 “유족회 분들의 존재 자체가 평화운동의 상징”이라며 “국가기관이 머뭇거릴 때 지자체가 먼저 나서 평화공원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3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역대 최대규모의 평화예술제와 박람회가 펼쳐져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번 행사는 어린이, 가족들이 참여할 수 있는 비누, 솟대만들기 등 참여행사가 풍성했다. 하루종일 문화공원에는 웃음소리와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양시민사회연대회의를 비롯해 전국 39개 시민사회단체에서 마련한 112개의 부스에서는 평화·인권·통일·생태를 주제로 떡메치기, 기왓장 깨기, 폴라로이드 사진찍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마련돼 참가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오후 5시부터는 전쟁의 아픔을 돌이켜보고 평화와 상생을 기원하는 평화음악회가 펼쳐졌다.

http://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039

で、この「二つの顔」の間を仲裁し、和解に導くためにいかなることを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か。その点について論じた高陽新聞の記事も、併せてクリップしておくとします。

금정굴사건,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김영범/ 대구대 교수·진실화해위원회 비상임위원

[849호] 2007년 10월 14일 (일) 00:00:00 고양신문

화해와 용서 주저 않는 용기 필요
지친 유족들 더 위로하고 격려해야

지난 6월 26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년 여 동안 수행해 온 금정굴사건 조사의 결과를 최종 승인하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인민군 점령기의 부역행위 혐의를 이유로 연소자와 여성 포함 153명 이상의 지역주민을 경찰이 우익단체의 조력 하에 불법으로 집단 총살했다는 것이 조사결과의 핵심이다.

그러나 조사결과 및 그 보고서 내용은 희생자들의 유족과 지역 시민단체가 보기에 여러모로 미흡하고 불만족스러워 곧바로 이의 신청이 제기되었고, 토론회 형식을 빌린 성토까지 있었다. 어쩌면 조사결과는 경기도의회의 진상조사보고서(1999)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의 ‘민간인학살실태보고서’(2004)에 기술된 내용 골자를 크게 넘어서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시한에 쫓기면서도 이런저런 제약이 많은 조사권한과 조사자원만으로 수많은 신청사건들을 감당하게끔 되어 있는 진실위의 현 상황과 구조적 한계를 바로 떠올리게 한다.

그런 까닭에도 이번의 조사결과나 진실규명 결정은 완벽한 것이라고 내세우기 어렵다. 차라리 일정 수준에서 행해진 봉합이라 여기는 것이 합당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니다. 지역사회 및 시민사회 차원에서 제기되어 온 ‘전쟁기 민간인희생사건’의 진상규명 과업을 스스로 부담한 국가가 그 과업수행 결과를 공식 언어로써 제시하고 그에 대한 국민적 ‘승인’을 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승인은 비극적 학살사건의 가해자가 되었던 사람들과 희생자 유족들이 대승적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일차적 조건이기도 하다.

조사보고서에서는 고양경찰서원들, 고양지역 치안대원들, 태극단원들이 직·간접의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가해자를 한 사람 한 사람 다 밝혀내고 책임의 경중을 낱낱이 따져 묻는 것도 요구될 법하다. 그러나 꼭 그래야만 할 것인가? 지금 와서 가능한 일이기나 하겠는가? 끝없는 추궁은 끝없는 변명과 자기방어 및 정당화의 쳇바퀴 놀이를 연출하게 될 것이다.

반세기 전에 광기와 야만의 행동들을 부추기던 이념 싸움과 아집의 굴레를 이제 다시 뒤집어 쓸 이유가 무엇인가? 남과 북이 화해와 평화의 큰길로 접어들고 있는데, 남쪽 땅 안에서 소모적인 이념논쟁과 감정대립을 한없이 이어가야만 하겠는가?

물론, 일방적 요구나 종용에 의한 화해는 거짓 화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상호적 화해라야 진짜 화해가 된다. 비록 부분적이라 할지라도 일단 밝혀진 진실은 겸허하게 받아들여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진정성 어린 사과와 함께 화해의 손길이 내밀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화해는 가해자 쪽에서 먼저 제의되는 것이 맞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전남 영암군 구림마을 얘기이다. 한국전쟁기에 마을 안에서 벌어졌던 상호가해/보복성 학살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이 지난 해 봄부터 마음을 열고 마음을 모아서 열어간 화해의 길과 합동위령사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림마을과 고양시의 역사적 조건이나 현실적 여건이 같지는 않겠기에, 구림마을 사례를 그대로 모방해 좇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은 역사적 화해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누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것인가. 주저하지 말자. 용서도 미루지 말자. 희생자 쪽에서 먼저 용서하는 마음을 내보이는 용기와 도량도 어쩌면 필요하다. 그것이 가능해지고 현실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동안 많이 지치고 외로웠을 유족들을 더 많이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요컨대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은 지역사회 내부에서, 당사자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진실위의 조사결과 보고서나 진실규명 결정은 그 계기를 제공하는 셈인 것이고, 그 후속조치들을 통해 시·도 의회와 지자체 행정관서들이 화해의 중개자 및 지원자 역할을 적극 자임·자담토록 해야 한다. 부디 일들이 그렇게 되어지기를 기대하고 또 촉구한다.

http://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17387

これも少し関連しそうなので、備忘のためにメモ。

CiNii 論文 - 韓国少女漫画『森の名前』(金辰) における人と記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