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陽市・幸州内洞の「メンドルマウル(맨돌마을)」

…という集落の名前を目にしたので、ちょっと調べてみたんですが。

住所としては、京畿道高陽市徳陽区幸州内洞。KTX車両基地があって発着駅にもなっている幸信駅の「幸」の字は、この「幸州」の地名からきているんですね。たぶん。

その中で、メンドルマウルは、「自然部落」「自然村落」と言われているように、古くからある集落のようです。訪れたことはありませんので、現在どうなっているのかはよく知りません。一度訪れて歩いてみたいな、とは思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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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내동 맨돌마을 이야기
행주동주민센터 2014.10.27 09:43

행주동 제15통으로 읍·면시절에는 幸州內 2里이다. 맨돌이라는 지명에는 세가지 유래담이 있다. 첫째는 이곳이 원래 돌이 많은 지역이라서 눈에 띄는 곳마다 온통(매)돌이라 하여 맨돌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행주대첩 싸움에서 이곳의 아녀자들이 행주치마에 돌들을 담아 아군 병사들에게 날라다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하고 한다. 또 하나는 맨돌의 한자명과 연관된 것을 옛날에 한강으로 배가 다니던 시절에는 지금의 기독교 방송국 송신소 뒷편으로도 강물이 흘러 들어서 행주 전체가 하나의 섬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에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난 주막이 있어 배를타고 한양으로 일을 보러가던 황해도, 평안도 사람들이이 곳에 잠시 머물러 목을 축이곤 하였다 하니 그 주막거리가 바로 강매리 강구산(江口山)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곳에 머물기 위하여 배를 댈 때 연안에 있는 크다란 돌에 끈으로 그들의 배를 묶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끈을 매는 돌 즉, 결석(結石)이 있는 곳이라 하여 결석리라 부른다고 한다.

세 번째로는 예전에 지금의 행주내리 입구인 삼거리 근처가 매우 질은 진흙탕이었다고 한다. 이 진흙땅은 인근에서도 유명했는데 마차는 물론 사람들도 왕래하기가 매우 불편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햇빛이 조금만 내리쬐면 금방 질던 길이 마치 돌맹이와 같이 딴딴하게 굳어져 결석이라 했다가 맨돌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현재 이 마을의 인구는 227세대 51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장세이

맨돌마을에서 39번 국도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의 자연촌락 명칭으로 예전 이곳에 장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http://blog.daum.net/haengju-dong/30

幸州 맨돌부락
2000년 03월 15일 00:00 수요일

행주산성의 입구 고양시 지도읍 행주내동에 맨돌부락이 있다. 김포쪽에서 한강을 건너 39번 도로의 오른쪽이요 반대로 원당쪽에서는 산성으로 들어서는 왼편이다. 맨돌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된 세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옛날 한강으로 배가 드나들던 시절 이곳에 이름난 주막이 있었으며 잠시 머물러 배를 대면서 강가의 커다란 돌에 배를 묶느라 끈으로 매는 돌이 있는 곳이라 해서 맨돌이라 했다는 것이다. 한자로는 結石(결석)이다. 그런가 하면 이곳 일대가 진흙탕 길이었는데 해가 쬐면 곧 질던 길이 마치 돌덩이처럼 굳어진다고 해서 맨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행주대첩과 연관한 유래이다. 이곳에는 돌이 많아 맨 돌 천지여서 맨돌마을이었는데 그 돌을 행주산성 싸움에 아녀자들이 치마에 담아 군사들에게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때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은 왜군 침입의 이듬해인 1593년 2월13일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인근 벽제관에서 명군을 대파한 왜군은 의기충천하여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그날 새벽 공격해 왔다. 그러나 군사와 아녀자의 피나는 항전 그리고 권율장군의 독전으로 끝내 성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일격에 성을 점령하리라던 왜군의 판단은 오산이었다. 불과 반나절의 싸움에서 1만여 전사자를 내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행주산성의 승전은 어쩌면 군사들 못지 않게 그곳 아녀자들의 몫이었다. 적이 섶을 묶어 불을 질러 성책을 태우면 급히 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적군이 절벽을 기어오르면 돌을 굴려 쳐부수었다. 돌도 여인들이 앞치마에 담아 날랐다. 그로인해 행주치마의 전설이 낳아졌다. 뒷날 명의 황제는 사신을 보내 권장군을 위로했다고 전한다. 『조선은 본래 강한 나라라고 했는데 권장군이 적을 많이 참획했다니 그나라 백성들이 사기를 떨칠만 했겠다.』

어제 400여년 전 승전의 바로 그 현장에서 행주대첩제가 있었다. 보도로는 부녀회원들의 봉사가 더욱 돋보여 기념행사이면서도 주민들의 축제의 장이 되었다고 한다. 민족혼이 서린 행주치마의 잔치였던 셈이다.

http://www.incheonilbo.com/?mod=news&act=articleView&idxno=39558

上の記事にもありますけど、ここは幸州山城の入り口に位置し、幸州山城と言えば「壬辰倭乱」の「三大捷」の一つである「幸州大捷」を想起するというのが通り相場のようです。

「進撃の高陽市」のこの動画にも、「幸州大捷」は出てきてますね。

www.youtube.com

すんません、歴史には疎いです。

幸州山城の戦い - Wikipedia
www.seoulnavi.com
doramiun.jugem.jp
ameblo.jp

個人的には、朝鮮戦争期にこの地で起きた良民虐殺事件について関心があったのですが、残念ながらネット上にはほとんど情報がありませんね。

3월 25일(화) 행주내리 맨돌마을사건 증언
2014.04.21 15:30 금정굴재단 조회 수:580
3월 25일(화) 행주내리 맨돌마을 희생사건과 관련된 증언이 있었습니다.

당시 희생자는 이기준님.

증언자는 손자 이씨로 인천상륙작전 무렵 마을의 좌익사람들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4명에 의해 강매산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없었으며, 가해 인사들은 수복 후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았다고 합니다.
(증언의 모순 검토 필요)

http://www.gjpeace.or.kr/index.php?document_srl=20678&mid=search

3월 27일(목) 행주내리 맨돌마을사건 증언 보완
2014.04.21 15:46 금정굴재단 조회 수:609

3월 27일(목) 행주내리 맨돌마을 사건에 대한 보완증언이 있었습니다.

유족 최씨는 희생자 이기준님이 좌익세력에게 희생된 것이 아니라 마을 치안대원들에게 당한 것이라는 증언을 해 주었습니다.

덧붙여 희생자는 기존에 알려져 있는 맨돌마을 희생자 63명 중의 한 분이라고 밝혔습니다.

http://www.gjpeace.or.kr/index.php?document_srl=20686&mid=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