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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学兵」世代の再評価、という話

なるほど。そのような動きが始まっているんですね。

この世代のこの手の話題については、こちらの記事で書かれていたことがすぐに思い出されます。

www.huffingtonpost.jp

記事入力 : 2017/05/07 06:08
【コラム】韓国で復権する対日協力「学兵世代」

 「なぜ日本の走狗のようなことをする学兵を拒否せず、戦場に行ったのか」「カイロ宣言が出たのは1943年末ごろだった。いかに強い圧力を受けたからといって、日本軍への参加を志願できるのか」

 「学兵」出身の作家・李炳注(イ・ビョンジュ)=1920-92=は、こういう追及を受けて実に無念だったらしい。学兵に行かなければ徴用されかねず、カイロ宣言は知らなかったと答えても、受け入れられなかった。「あなたがたの世代が社会で主導権を握っているかぎり、日帝隷属は終わらない」と言い切る者までいた。李炳注は「われわれの世代は、後進に最も信用されない世代だということを知るべきだ」と残念がった。

 「学兵世代」とは、植民地時代末期に大学や専門学校へ通い、学兵として日本軍に「志願」入隊した世代のことを指す。年齢層でいえば、1917年から23年までの間に生まれた世代で、生きていれば既に90歳を超えている。43年10月、「半島人学徒特別志願兵制」が公布され、翌年1月から合計4385人が入隊した。当時入隊した張俊河(チャン・ジュンハ)や金俊燁(キム・ジュンヨプ)は、日本の敗戦前後に脱走し、光復軍に合流した。しかし大多数の学兵出身者は、最近まで「日本に協力した反逆加担者」として追われ、非難されてきた。特に60年代後半以降、4・19革命(1960年4月19日。不正選挙に端を発したデモにより、当時の李承晩〈イ・スンマン〉大統領が下野した事件)を起こした世代が知識社会で台頭し、文化面で権力を握るようになると、日本のエリート教育を受けた「学兵世代」を残酷に追い立てた。解放後に正規教育を受けた4・19世代は、自らを日本軍国主義に汚染されなかった最初の世代と自負し、先輩に当たる「学兵世代」を打倒の対象にした。

 そんな「学兵世代」の復権が静かに進んでいる。国文学者の金允植(キム・ユンシク)ソウル大学名誉教授は、割と早くから学兵世代の文に注目して研究書を出し、安京煥(アン・ギョンファン)ソウル大学名誉教授は、数年前に学兵出身の黄竜珠(ファン・ヨンジュ)元MBC社長の評伝を書いた。最近ではキム・ゴンウ大田大学教授が、こんにちの韓国を設計して作り上げた主役として「学兵世代」を取り上げた著書『大韓民国の設計者たち』を出版した。政治やメディア、教育、宗教、学術など韓国の枠組みを磨き上げたのが「学兵世代」だというのだ。学兵出身の金寿煥(キム・スファン)枢機卿や張俊河・金俊燁、作家の金声翰(キム・ソンハン)・韓雲史(ハン・ウンサ)、そして彼らと同年代で体験を共有した歴史学者の李基白(イ・キベク)、詩人の趙芝薫(チョ・ジフン)・金洙暎(キム・スヨン)、ジャーナリストの鮮于輝(ソンウ・ヒ)などの汎学兵世代にも併せて注目した。「現代史の孤児」(安京煥)から「親日の反逆加担者」に至るまで、追い立てられてきた「学兵世代」の劇的な逆転だ。

 1950年代半ば以降、知識人のアジトと呼ばれてきた雑誌『思想界』は、張俊河・金俊燁をはじめ学兵世代が主導してきた雑誌だ。キム・ゴンウ教授は、李承晩(イ・スンマン)・朴正煕(パク・チョンヒ)元大統領の独裁を批判した『思想界』グループの共通基盤は「国家と民族の近代化」だったと分析した。『思想界』の全盛期だった4・19前後に主幹を務めた金俊燁は、『思想界』運動について「雑誌のためではなく、近代化運動をやったと考えている」と語った。民主化も、政治的な近代化として理解したという。韓国現代史の主役を産業化勢力民主化勢力に分けて考える慣行から抜け出し、近代化を共に夢見て実践した、イデオロギー的な同志関係としてとらえているわけだ。

 学兵世代の復権は、紆余曲折の多かった現代史を理解しようとする努力が一歩進んだことを示している。そして、夢を実現するため共に努力した記憶の資産を、どのように培っていくべきか-ということを宿題として投げかけた。

文化部=金基哲(キム・ギチョル)部長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7/05/05/2017050500688.html

[태평로] 學兵 세대의 復權
김기철 문화부장 입력 : 2017.04.14 03:15 | 수정 : 2017.04.1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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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문화부장

"왜 일제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는 학병을 거부하지 않고 전쟁터에 나갔나." "카이로 선언이 나온 게 1943년 말경이었는데 아무리 강압 당했다고 하지만 일본군이 되기를 지원할 수 있는가."

학병(學兵) 출신 작가 이병주(1921~ 1992)는 이런 추궁을 받고 무척 억울했던 모양이다. 학병에 가지 않으면 징용당할 수밖에 없고, 카이로 선언은 몰랐다고 답해도 소용없었다. '당신들의 세대가 사회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 일제 예속은 끝나지 않았다'고 막말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이병주는 "우리 세대가 후진으로부터 가장 불신받는 세대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학병 세대'는 일제 말기 대학과 전문학교에 다니다 학병으로 일본군에 '지원' 입대한 세대를 말한다. 연령층으론 대략 1917년부터 1923년생까지로 생존자는 구순(九旬)을 넘긴 지 오래다. 1943년 10월 '반도인 학도특별지원병제'가 공포되고 이듬해 1월부터 모두 4385명이 입대했다. 당시 입대한 장준하와 김준엽은 일본 패전을 앞두고 탈출, 광복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학병 출신은 최근까지 일제 부역자로 몰려 비난을 받았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4·19 세대가 지식 사회의 문화 권력으로 떠오르면서 일본 엘리트 교육을 받은 '학병 세대'를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해방 이후 정규 교육을 받은 4·19 세대는 스스로 일본 군국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첫 세대로 자부하면서 선배 격인 '학병 세대'를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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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었던 작가 이병주. /조선일보 DB

그랬던 '학병 세대'의 복권이 조용히 진행 중이다. 국문학자인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비교적 일찍 학병 세대의 글쓰기를 주목해 연구서를 내놓았고,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가 몇 년 전 학병 출신인 황용주 전 MBC 사장 평전을 냈다. 최근 김건우 대전대 교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설계하고 만든 주역으로 '학병 세대'를 꼽는 책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을 냈다. 정치와 언론·교육·종교·학술 등 대한민국의 기틀을 닦은 게 '학병 세대'라는 것이다. 학병 출신인 김수환 추기경이나 장준하·김준엽, 작가 김성한·한운사 등과 이들과 비슷한 연배로 체험을 공유한 역사학자 이기백, 시인 조지훈·김수영, 언론인 선우휘 등 범(汎)학병 세대까지 아울러 지목했다. '현대사의 고아(孤兒)'(안경환)부터 친일(親日) 부역자로까지 몰렸던 '학병 세대'의 극적 반전이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지식인의 아지트로 불린 잡지 '사상계'는 장준하·김준엽을 비롯한 학병 세대가 주도했다. 김건우 교수는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비판한 '사상계' 그룹의 공통 기반이 '국가와 민족의 근대화'였다고 분석한다. '사상계' 전성기였던 4·19 전후 주간을 맡았던 김준엽은 사상계 운동을 "잡지를 위한 게 아니라 근대화 운동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민주화도 정치적 근대화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사 주역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나눠 보는 관행에서 벗어나 근대화의 꿈을 함께 꾸고 실천한 이념적 동지 관계로 보는 셈이다.

학병 세대의 복권은 곡절 많은 현대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일보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꿈을 성취하기 위해 함께 노력했던 기억의 자산(資産)을 어떻게 가꿔나가야 할지를 숙제로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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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대 김건우 교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에서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13/2017041303512.html

この記事の背景には、同じ朝鮮日報の以下の記事の存在が挙げられます。こちらはたぶん翻訳されていないと思います。

www.kyobobook.co.kr

西北 출신 '학병 세대'가 대한민국의 知的 설계자였다
어수웅 기자 입력 : 2017.04.05 03:03

[대전대 김건우 교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펴내]

장준하·김준엽·선우휘·김수환 등 '친일하지 않은 우익' 재발견
조국 근대화 밑그림 그리며 정치·언론·종교·교육 기초 놓아

대전대 국문과 김건우(49) 교수가 대한민국 우익의 뿌리를 찾는 지적 탐험을 책으로 펴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학병 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느티나무책방 刊)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의 키워드가 '친일(親日)하지 않은 우익'이라는 것. 일부 예외도 있지만, '학병 세대'와 '서북 지식인'을 시간적·공간적 축으로 한 '친일하지 않은 우익'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짜고 밑그림을 그렸다는 보고서다.

구체적으로는 누구일까. 김 교수는 학자·언론인 계열의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또 종교인 김수환 지학순, 문인 조지훈 김수영 등을 호명한다.

김 교수가 '학병 세대'를 주목한 이유가 있다. 친일에서 자유로운, 일제 말 조선 최고 인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학생들을 전선(戰線)으로 내몰았던 학병제(반도인 학도 특별 지원병제) 공포는 1943년 10월. 만 20세 이상이 징병 조건이었기 때문에, 학병은 대략 1917~1923년생으로 본다. 1944년 당시 고등교육을 받는 조선인 학생이 약 7200명에 불과했으니, '학병'은 당대 최고 인재들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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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축은 '서북 지식인'이었다. 분단과 함께 남으로 내려온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들의 의식 밑바닥에는 태생적으로 '반공'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 북한에서 기독교에 대한 공산주의의 탄압을 직접 겪으며 6·25 이전에 '전쟁'을 겪은 탓이다.

장준하(1918~1975)를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다 의문사한 민주 투사로 먼저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럽겠지만, 그는 원래 평북 의주 출신의 기독교도 반공 투사였다. '사상계'의 전신인 '사상(思想)'을 장준하와 함께 창간했던 같은 이북 출신 후배 서영훈(1923~2017) 전 적십자사 총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민족청년단 시절, 장준하는 훈련생들의 논문 필적을 조사해 누구누구가 공산당 같다고 할 정도로 기독교 신앙과 극우익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부름받아 걸어온 길, 뜻을 따라 가야 할 길'·백산서당·2005)

'학병'과 '이북 출신'들을 함께 묶은 중심이 바로 월간 '사상계'였다. 마침 김 교수의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사상계'였다. 1953년 창간한 이 잡지는 단순히 지식인들의 잡지였을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대한민국의 싱크탱크였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의 논문 '1960년대 지성계의 동향'등을 인용, 5·16 쿠데타 직후에는 박정희 의장 등 군정 세력이 '사상계'를 펴놓고 국정 자문 회의와 기획 회의에 필요한 위원들을 충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단순히 전문가 지식인에 그치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밑그림을 함께 그렸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사상계'의 5대 편집 원칙은 '민족의 통일, 민주 사상, 경제 발전, 새로운 문화 창조, 민족적 자존심'. 분단 극복과 식민 잔재 청산을 의미하는 '민족의 통일'과 '민족적 자존심'을 제외하면, 나머지 셋이 각각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조국 근대화를 추구하는 셈이다.

김 교수는 동시에 이들의 온정주의·지역주의도 비판하고 있다. '사상계'의 초대 주간 김성한을 비롯, 2대 안병욱, 3대 주간 김준엽, 4대 주간 양호민, 5대 주간 지명관 등 다섯 명이 모두 이북 출신이었고, 초대 김성한을 제외하면 모두 평안도 출신이었다는 것. 조선일보 선우휘 전 주필 역시 평북 정주 출신이었다.

"1965년 한·일 협정에 반대하다 '정치 교수'로 낙인찍혀 양호민이 서울대 교수직에서 해직되었을 때, '조선일보'에 데려오도록 애쓴 것도 선우휘였다. 또한 그는 민주화 운동 진영의 함석헌·지명관 등을 끝까지 보호하려고 했다. 일본 '세카이'에 글을 싣던 'TK생'을 중앙정보부가 추적할 때, 이를 따돌린 인물도 선우휘였다."(103쪽)

이 책은 '민주화'와 '산업화'에 대한 새로운 시선도 제기하고 있다. 지금 보면 마치 대립된 개념처럼 보이지만, 이 인물들의 궤적을 좇다 보면 두 세력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가지라는 주장이다. 동시에 해방 후 정부 수립 과정에서 '우익'이라는 개념을 독점하려 했던 친일 세력도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우익 개념'을 독점하려 하면서 우익 민족주의의 폭을 너무 좁혔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학병 세대'는 정치 언론 교육 종교 학술 사상 등 각계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05/2017040500074.html

[태평로] "춘원,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
김기철 문화부장 입력 : 2016.09.23 06:12 | 수정 : 2016.09.23 13:27

1970년대는 집집이 돌아다니며 전집(全集)을 파는 월부 책장수 전성기였다. 여유가 생긴 중산층이 자식들을 위해 아동용 문학전집이나 위인전기를 호기롭게 사들였다. 진홍색 표지의 50권짜리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이나 15권짜리 한국전기전집, 세계위인전집은 아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집이 배달되면 도서관이라도 집에 들인 듯 잔뜩 들떠 책을 펼쳤다. 동화책을 어느 정도 읽어치우자 책 읽기가 시들해졌다.

춘원 이광수를 만난 건 그때였다. 월부 책장수가 성인용 책으로 추천한 첫 책이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10권짜리 삼중당 이광수 전집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이광수 전집'은 버거웠다. 세로쓰기로 빡빡하게 들어찬 활자에 질렸다. 그래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무정' '유정' '흙' '사랑' '마의태자'…. 제대로 된 배경지식 없이 만난 이광수 소설은 초등학생이 소화하기엔 무리였다. 이광수는 그렇게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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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당시 37세의 춘원 이광수(사진 왼쪽). 이광수가 유학한 메이지가쿠인 대학(사진 오른쪽). /조선일보 DB

한국문인협회가 얼마전 춘원과 육당 최남선을 기념하는 문학상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가 계획을 접었다. 일부 단체에서 "친일파를 기리는 문학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며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춘원과 육당은 각각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과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해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히지만, '친일(親日)'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이광수는 일찍이 문학평론가 김현이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로 꼽을 만큼 한국 문학의 아킬레스건이다.

춘원이 일제 말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운 총독부 시책 홍보에 앞장서고, 일본 유학생을 대상으로 학병(學兵)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에 나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도 있다. 1943년 11월 교토에서 이광수의 학병 권유 연설을 직접 들은 김우전 전(前) 광복회장은 2014년 본지 인터뷰에서 "'당신들이 희생해야 우리 민족이 차별을 안 받고 편하게 살 수 있다. 조선 민족을 위해 전쟁에 나가라'고 했다"며 이광수의 '친일'에서 민족을 위한 '고민'을 봤다고 했다. 이 연설을 듣고 지원 입대했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독립운동가의 말이니 무게가 가볍지 않다. 원로학자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도 "춘원 소설을 읽으면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서 "춘원을 친일 문인으로 매도하는 기사를 대할 때마다 나는 그를 나무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한 적 있다. 부분만 보고 전체를 놓치는 편협한 역사 인식을 우려한 것이다.

'춘원 이광수' 하면 '친일파'를 떠올리는 요즘 세대에게 이광수는 잊힌 작가다. 문학도 말고는 '무정' 같은 그의 소설을 찾는 사람도 없다. 이 땅에는 그의 문학과 삶을 온전하게 들여다볼 문학관 하나 제대로 없다. 춘원이 어쩌다 친일의 길에 들어서게 됐는지, 그 과정에 대한 고민과 성찰 없이 욕만 한다고 극일(克日)이 되는 걸까.

최근 개봉한 영화 '밀정'은 친일과 독립운동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제 고위 경찰을 주인공(송강호)으로 내세웠다. 총독부 경무부장이 의열단에 협조한 혐의를 받던 주인공을 다시 회유하는 막바지 장면, 송강호의 흔들리던 눈빛은 압권이었다. 우리 지식사회의 수준은 영화관을 찾은 600만 관객 눈높이보다 빈약한 걸까.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9/23/2016092300456.html

個人的にここに付け加えるとしたら、この学兵世代、わずかな年月をもって地続きで、解放後の戦争の時代と接しているという点です。彼らの世代の生き残りには、日本軍の軍人として戦った経験と、韓国軍として戦った経験とを併せ持っている者が少なくありません。

朝鮮人日本兵 - Wikipedia

極端なことを言えば、「どの時点で戦死したか」によって靖国神社と顕忠院とに切り分けられた世代、それが彼らなわけ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