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がんばれ群山!(힘내라 군산!)」

ああそうか、韓国GMの工場は、群山でしたね。

群山は一度だけ訪れました。その時の印象は、「寂れてはいるけど寂れ切ってはいない地方都市」といった感じです。廃線になった旧群山駅周辺は古びて時間が止まっていましたけど、工場はそれなりに稼働していましたしね。それがごっそりなく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わ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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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でも」と踏みとどまろうとするとき、やはりイメージされるのは、「逆転の名手・群山商高」なんですね。こういうシンボルがあるのは、群山の強みかもしれ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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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事入力 : 2018/06/01 21:01
【萬物相】現代重工業に続き韓国GMも撤退、がんばれ群山!

 幼いころ通った小学校の裏手には、斜面がたくさんあった。丘の上でカニの甲羅のようにつぶれたバラックに、友だちが暮らしていた。便所も数軒の家が一緒に使っている町だった。蔡万植(チェ・マンシク)の小説『濁流』に出てくる朝鮮人集落ドゥンベミ一帯が、その辺りだ。船に乗って出掛けた友人の父親が波止場の居酒屋で一杯引っ掛けて戻ってくる日は、友だちの家に行く日だった。小遣いにしろと、500ウォン(現在のレートで約50円。以下同じ)の硬貨をひょいとくれた。船で干した半乾燥のイカ練炭であぶって食べるのも結構面白かった。

 群山商業高校野球部は、地元の誇りだった。韓国プロ野球を牛耳っていたヘテ・タイガースの主力選手には、同校出身者が多かった。友だちの末の叔父に当たる選手もいた。いつの年だったか、群山商業高校がライバル校と決勝でぶつかった。相手校のバッターは有名メーカーの手袋とヘルメットを使っていたが、群山商業高校のバッターの中には、労働者が使う軍手をはめていた選手も何人かいた。それでも勝った。「逆転の名手」は何もないところから出てきたわけではなかった。

 群山は、植民地時代のコメ収奪の痕跡が色濃く残っている場所だ。肥沃(ひよく)な沃溝の平原、万頃平野のコメを海へ陸へ、年間200万石(1石は約180リットル)も運んでいった。旧韓末(1899年)以降、外国の租界が作られ、干満の差に耐える「浮き桟橋」施設や湖南線から枝分かれした支線(群山線)を残した。そういうわけで、蔵米洞のように米の字が入った地名も多い。米穀倉庫に近い海辺の旧中心街には、日本人が暮らしていた敵産家屋、会社の建物がまだ多く残っている。群山の人口の半分が日本人だった時代もあった。

 ありふれた地方の中小都市のように、群山も1980年代まで、数十年にわたり成長が止まった都市だった。それが西海岸時代だとかセマングム開発だとかいって、再び騒々しくなった。造船所がやって来て、自動車会社もできた。植民地時代の遺産が近代文化の探訪地へと浮上し、古いパン屋では観光客が長蛇の列を作り、旧家の近くのちゃんぽん屋は客が押し寄せて手に負えず、昼食時にだけ商売すると言った。李舜臣(イ・スンシン)将軍が一時駐屯していた古群山の島が連絡橋でつながり、1坪((約3.3平方メートル)当たり数千ウォン(数百円)だった地価が数十万ウォン(数万円)に跳ね上がった。

 その群山で、現代重工業に続き韓国GMの工場までもが廃業した。市経済の4分の1が消えたという。一家の大黒柱たちは仕事を探しに出掛け、団地は空き部屋であふれるようになった。「ゴーストタウン」になっていくという声まで聞かれる。保険の仕事をしている高校の同窓生に「大丈夫か」と尋ねたら「大騒ぎでもないけど、本当に心配」と答えた。故郷を離れて30年。中秋節旧正月に帰省するくらいの故郷だが、心の片隅に穴が一つ、ぽっかり空いたように思える。それでもがんばれ、群山! しんどい時期を耐えてきた「逆転の名手」ではないか。

李明振(イ・ミョンジン)論説委員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8/06/01/2018060101168.html

[萬物相] 아! 군산
이명진 발행일 : 2018.06.01 / 여론/독자 A34 면

f:id:bluetears_osaka:20180606164621j:plain:right어릴 적 다닌 초등학교 뒤편에 비탈이 많았다. 언덕에 게딱지처럼 내려앉은 판잣집에 친구들이 살았다. 뒷간도 여러 집이 함께 쓰는 동네였다. 채만식 소설 '탁류'에 나오는 조선인 마을 둔배미 일대가 그 언저리다. 배 타러 나간 친구 아버지가 선창가 술집에서 한잔 걸치고 돌아오시는 날이 친구 집 가는 날이었다. 용돈 하라며 500원짜리 지폐를 척척 주셨다. 배에서 말려온 반건조 오징어를 연탄불에 구워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군산상고 야구부는 동네 자랑이었다. 프로야구를 주름잡던 해태 타이거즈 주전 중 이곳 출신이 많았다. 친구 막내 삼촌뻘 되는 이들이었다. 어느 해인가 군산상고가 맞수 학교와 결승에서 붙었다. 상대 학교 타자들은 유명 메이커 장갑에 헬멧을 썼는데 몇몇 군산상고 타자는 인부들 쓰는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래도 잘만 이겼다. '역전의 명수'는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군산은 일제(日帝)의 쌀 수탈 흔적이 짙게 드리운 곳이다. 비옥한 벌판 옥구(沃溝), 만경평야 쌀을 바다로 뭍으로 연간 200만석씩 실어갔다. 구한말 개항(1899년) 이후 조계지가 들어섰고, 조석 간만 차이를 버텨낼 '뜬다리 부두' 시설과 호남선서 삐져나온 지선철도(군산선)를 놓았다. 장미동(藏米洞)처럼 쌀 미(米)자 들어간 지명도 그래서 많다. 미곡창 가까운 해안가 원도심에 일본인들 살던 적산(敵産) 가옥, 회사 건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군산 인구 절반이 일본인이던 시절도 있었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군산도 1980년대까지 수십년간 성장이 멈춘 도시였다. 그러다 서해안 시대니, 새만금 개발이니 해서 다시 떠들썩해졌다. 조선소가 들어서고 자동차 회사도 생겼다. 일제 유산들이 근대 문화 탐방지로 뜨면서 오래된 빵집엔 관광객이 장사진을 치고, 옛집 근처 짬뽕집은 밀려드는 손님이 버거워 점심 장사만 한다고 했다. 한때 이순신이 주둔했던 고(古)군산 섬이 연륙교로 이어져 평당 몇 천원 하던 땅값이 몇 십만원으로 치솟았다.

▶그 군산에서 현대중공업에 이어 한국GM 공장까지 폐업했다. 시(市) 경제 4분의 1이 오그라들었다 한다. 가장들은 일자리 찾아 떠나고 아파트 단지엔 빈집이 넘쳐난다. '유령 도시' 돼 간다는 말까지 나왔다. 보험일 하는 고교 동창에게 '괜찮으냐' 물으니 "난리도 아녀. 걱정이여 참말로" 한다. 떠나온 지 30년, 명절에나 갈까 말까 한 고향이지만 마음 한구석 구멍 하나 뻥 뚫린 것 같다. 그래도 힘내라 군산! 힘든 시절 견뎌낸 '역전의 명수' 아니던가.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18&M=06&D=01&ID=2018060100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