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北大学校にある金鶴応・元忠清北道知事の頌徳碑をめぐって

話題にしてるのは今のところ、オーマイニュースのこの記事だけみたいですね。ネタ的には「ま、せやろな」とも思います。

ここで話題になっている金鶴応・元忠清北道知事は、植民地時代に沃川郡や報恩郡の郡守を務め、解放後は忠清北道と南道の知事を歴任し、李承晩政権下の「3‧15不正選挙」に加担したことで有罪判決を受けたという人物です。

db.history.go.kr
www.chungna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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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jbnews.com

その人物が忠清北道知事時代に道保有の土地を忠北大学校の敷地として提供したことで、その頌徳碑が建てら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でもって、その碑は「4.19革命」後に土中に埋められ、2008年に当時の忠北大総長の指示で掘り起こされており、この記事の筆者はこの人物の「親日派」の経歴を取り上げて問題化を図っている、とまあ、そんな感じの話みたいです。

ko.wikipedia.org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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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학교에 친일인사 업적 기리는 비석 있어
충북대학교 부지 제공한 김학응 전 충북도지사 '송공비', 묻혔다가 다시 설치돼
19.02.01 11:38 l 최종 업데이트 19.02.01 11:38 l 충북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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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설립된 일제강정김 조선총독부 고위관료 김학응의 송덕비. 김 씨는 일제하 옥천군수, 보은군수를 지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있다. ⓒ 충북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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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2월 27일 동아일보 보도지면. 김 씨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돼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캡처 ⓒ 충북인뉴스

"광복된 새나라에 이 대학 만년대계를 위하여... 김(학응) 지사는 조국의 동력이 되는..."(충북대학교 대학이전 김학응(충북도)지사 송공비 中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김학응(金鶴應, 창씨개명 金子薰 / 1989~?) 전 충북도지사.

김씨는 일제강점기 시절 충북도청 내무부 학무과를 시작으로 1940년 보은군수를 지냈고, 이후 옥천군수를 지내는 등 조선총독부 관리로 승승장구했다.

해방이 됐지만 일제에 부역해 성공적인 관료를 지낸 경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도 내무국 지방과장을 지냈고 1955년 9월부터 1958년 7월까지 충북도지사, 1958년 7월 29일부터 1960년 4월 30일까지 충남도지사를 지냈다.

김씨는 충북도지사로 재직할 때인 1953년 충북도가 보유하고 있던 청주시 개신동 토지 23만평을 충북대학교 부지로 제공한다.

이것을 계기로 충북대학교 부지에 김씨에 대한 송공비가 세워졌다. 천년 만년 갈 것 같았던 김 씨의 송공비는 1960년 4‧19혁명과정에서 땅 속에 묻히는 수모를 당하게된다.

1960년 김 씨는 충남도지사로 재직하며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가담한다. 이에 분노한 충남도민들은 김씨의 사퇴를 요구하며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결국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이후 김씨는 부정선거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961년 2월 27일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김 씨등은 업자들로부터 받은 당시 돈 2천5백만환 중 600만환을 자유당 도당 위원장에게 제공한 혐의를 받았다.

이후 1961년 10월 13일 열린 재판에서 김 씨는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 판결을 선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충북대학교가 김씨의 송공비를 땅에 파 묻은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4.19가 혁명이후 김씨가 3.15 대통령 부정선거에 개입한 인사에 포함되면서 민주당 감사가 내려온다는 소문이 전해졌고, 충북대학이 송공비를 땅 속에 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씨의 송공비는 2008년 당시 임동철 충북대학교 총장의 지시로 다시 햇빛을 보게된다.

김씨는 친일경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인해 처벌을 받은 적이 없다. 겨우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을 뿐이다. 이후 민주주의를 훼손한 대표적인 사건인 3‧15부정선거에 가담해 형사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땅속으로 들어갔던 김씨의 송공비는 다시 햇빛을 보며 유유히 충북대학교 교정을 바라보고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08398

個人的には、その人物の評価がどうあれ、この石碑を埋めたり撤去したりして何がどうなるものでもないと思いますし、そういう動きが盛り上がっているようにも全く思えないので、これ自体は別にどうでもいい=何か新しいことをする必要もない、と考えます。今さら彼が提供したキャンパスの土地を忠清北道に返して忠北大を清算するわけにもいかんし、それやったら大学史の一ページとして残しといたらええんやないのん?

せめて少なくとも、私が見に行くまでは残しといてくださいな。次の機会には、久々の清州行きも考えときます。


追記:ちなみに、釜山日報のサイトには、なぜかこんな記事がアップされています。

金鶴應 全璋漢 5년 求刑
충남 원흉 특재
입력 : 1961-05-16 15:00:00수정 : 1961-05-16 15:00:00게재 : 1961-05-16 00:00:00 (3면)

특검 김재주 검찰관은 15일 하오 충남 부정선거 관계자 김학응(64=전 지사) 피고와 전장한(42= 전 경찰국장) 두 피고에게 징역 5년 그리고 윤승구(52= 전 내무국장) 피고에게는 징역 3년을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제4조를 적용하여 각각 구형하였다. 이들은 3·15 선거 당시 영업용 자동차 등록증 40여 매를 발부하여 2천 500만 환을 염출하여 자유당 정치자금으로 사용했으며 3인조, 9인조 공개투표를 강행함으로써 부정선거에 적극 협조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은 변호인 측 신청에 의해 6월 7일 변론 재개공판을 열기로 하였다.【동양】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610516000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