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ソウルの風景】中央大学校・任永信銅像(墓所)

前回の続き。ソウル市内を移動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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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イトルに正答を掲げておいてこう尋ねるのも白々しいのですけど、ここはどこ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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バスで裏の高台側からアプローチしたんで、ヒントが少ないんですけど、キャンパス内を下りて行って正面に回ると、こんな感じ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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銅像は、創設者の任永信ですね。李承晩・朴正煕政権期には政治家としても知られた人物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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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ykorea.aks.ac.kr
ko.wikipedia.org
www.cau.ac.kr

で、これを見ているときには知らなかったのですが、1977年に亡くなったこの人物の遺体は当初、大学キャンパス内に葬られていたそうです。ところが、2009年、新校舎建築の必要にともなってその墓は移葬され、遺体は火葬の上、永信館前のこの場所に移されてきた銅像の台座部分に納骨されたというのです。

승당임영신 박사 이장 및 동상이전 제막식
관리자 | 조회 수 1812 | 2009.02.17. 16:33

승당 임영신박사 묘소이장 및 동상이전 제막식이 2월 17일 오전 11시에 영신관앞에서 열렸다. 이날 제막식에는 유용태 승당기념사업회 회장, 박범훈 총장, 이태희 법인상임이사, 문병집 전 총장, 하경근 전 총장, 김민하 전 총장, 이종훈 전 총장과 김순영 전 동창회장, 김명섭 전 동창회장, 서청원 국회의원, 양태성 승당기념사업회 부회장, 임철순 전 이사장과 유가족을 비롯한 150여명의 추모객이 참석했다.

유용태 승당기념사업회 회장은 추모사에서 “승당 임영신 어머님의 ‘의’와 ‘참’의 창학이념은 중앙대학과 우리가슴 속에서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승당 임영신 박사 동상은 조병화 시인의 추모시와 함께 영신관 앞 자리에 모셔졌다.

http://www.caual.com/index.php?mid=cau_news_hide&document_srl=4521

임영신 박사묘 이장의 비극
경인매일 승인 2009.03.03 19:21
수원대 명예교수 ·계명고등학교장 이 달 순

임영신박사는 대한민국 건국과 교육발전의 공로자이다. 그분은 1919년 3.1만세시위때 천안 양대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시장으로 달려가 시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벌였고 전주로 내려가 그의 모교인 전주기전여고 학생들의 선두에서 전주시민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분은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박사를 도우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1932년 귀국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했다. 해방이 되자 이승만박사를 도와 UN으로 가 대한민국정부수립의 승인을 받아냈다. 우리나라 여성으로서 초대 상공부장관 제헌국회의원등 정계에서 활동했다. 한편 중앙여자대학을 1953년에는 남녀공학 종합대학으로 승격 총장으로 취임했으며 1965년에는 대한교육연합회장으로 10,11,12대 당선 우리나라 교육발전에 이바지 했다. 그는 1977년 79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그리고 중앙대학 뒷동산에 안장되었다. 그분의 관 뚜껑과 바깥의 기념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연설문이 새겨져 있다.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했다. 이날 24일에 있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임영신 박사를 극찬했다. 공식연설에서 특히 대통령 취임사에서 대통령이 개인을 들먹이는 연설이란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대표로서 레이크 석세tm에 가서 많은 성적을 내고 나라를 세우는데 많은 일을 한 임영신 여사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이 다같이 모두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재정 후원도 못한 중에 중대한 책임을 그만큼 추진시킨것은 우리 대한민국 수립과 더불어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임영신박사의 건국공로탑에 담겨진 글이다. 임박사 서거후 조카인 임철순총장이 취임했다. 임총장은 중앙대학교를 양적으로 확대하는데 공훈을 세우게 된다. 서라벌예대를 인수 합병했다.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을 설립했다. 안성에 제2캠퍼스를 건립했다. 당시로서는 60만평의 거대한 음악대 예술대등의 첨단적인 경이적 시설로 교육계와 예술계의 찬사를 받았다. 기숙사시설이 놀랍도록 자랑스러웠다. 중앙대학교는 양적으로 한창 눈부시게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임총장은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과욕의 탓이라는 평가다. 아마 재단을 키우겠다는 욕망이 강했다고 본다. 중소기업체를 다섯 개씩이나 인수 설립 했다. 그 기업들의 부채를 껴안은 체 어렵지 않게 인수한 것이다. 인수해 놓고 기업의 부채를 상환하지 않고 은행대출과 개인사채를 끌어들여 임명한 사장들에게 운명을 위임했다. 몇 년동안에 각 기업체의 부채는 늘어만 갔다. 임총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요청으로 민정당 정책의장을 맡아 정계에 투신하게 된다. 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중앙대학교는 제일교포 손으로 넘어갔다. 김희수 이사장은 일본의 부동산붐이 위기에 몰리면서 중앙대를 발전시킬 힘을 잃게 된다. 다시 중앙대는 두산그룹이 떠맡아 주인이 또 바뀌는 형평이 되었다. 임영신박사의 묘지에 학교건물을 건축하여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정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서 있는 임영신박사의 동상도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2월16일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화장하고 영신관으로 옮겨진 임영신박사의 동상 받침대에 납골당을 조성 안치하고 2월17일 임박사의 서거 22주년 기념일 32주기 추도식을 올리면서 “동상 이전 제막식”을 거행했다. 마음 내키지 않는 제막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회 장례문화가 이장에서 수목장등 납골장례로 변화되기에 이해할 수도 있지만 훌륭한 묘를 이장 이전된 동상에 납골하는 비극속에서 그 명칭조차 은폐된 추도식의 비극이 우리를 슬프게만 한다.

http://www.k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36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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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や大学の規模は違いますが、鹿児島・志學館大学の満田ユイに通じるものがありま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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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억은 회색빛이 아닌 총천연색으로 살아있다”
박수정 기자 승인 2018.10.08 03:26

지난 100년의 세월 동안 중앙대의 모습은 크고 작은 변화를 거쳤다. 이번 백과사전에서는 루이스가든, 할매 동산, 205관(학생회관), 206관(학생문화회관) 등 중앙대 캠퍼스 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장소들에 얽힌 학생과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60년대 입학식과 졸업식 때마다 101관(영신관) 앞 ‘루이스 가든’은 수많은 인파로 붐볐다. 현재 영신관 앞 중앙광장부터 102관(약학대학 및 R&D센터)까지의 공간이다. 지금은 사라진 대운동장 건립 이전에는 이곳이 학교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었다.

루이스 가든은 시대별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70년대 루이스 가든에서는 ‘지성’의 축제를 엿볼 수 있다. 축제 기간에 교수와 학생이 참여하는 ‘과거시험’이 전통적 방식으로 열렸다. 시제를 정해 글을 쓰고 장원을 뽑기도 했다. 80년대의 루이스 가든은 민주화를 위한 의혈의 투쟁 장소였고 90년대 학생에게는 낭만의 장소였다. 해가 넘어가면 학생들은 낱개로 양초를 사서 촛불을 켜고 친구들과 밤새 담소를 나눴다.

‘할머니’처럼 인자한 교육자였던 승당 임영신 박사는 학교에서 가장 높고 양지바른 곳에 잠들었다. 현재 309관(제2기숙사)이 위치한 자리다. 학생들은 이 묘역을 ‘할매 동산’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렀다.

날이 좋으면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할매 동산으로 향했다. 서주원 강사(간호학과 02학번)는 “한강에서 불꽃 축제를 하면 할매 동산에 올라가 구경했는데, 동산에 오르는 길목을 어부바 언덕이라고도 불렀다”며 “학교가 북적거려도 할매 동산에 가면 한적하고 탁 트인 느낌이라 공강 시간에 친구들과 자주 산책을 갔다.”고 말했다. 할매 동산 자리에는 제2기숙사가 신축돼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임영신 박사의 유골은 영신관 앞 동상 밑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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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 17일 임영신 박사 서거 9주년을 맞아 임영신 박사 묘에서 추도식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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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철거된 205관, 206관은 항상 학생들로 활기가 넘치는 장소였다.

도서관 옆 주차장에는 학생회관과 학생문화관, 일명 ‘빨간 벽돌’이 있었다. 학생회관과 학생문화관은 310관(100주년기념관 및 경영경제관)이 완공됨에 따라 생태면적 확보를 위해 지난해 철거됐다. 그러나 그 건물들은 여전히 학생들에게 빨간 벽돌로 남아있다. 강성찬 학생(신문방송학부 2)은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다른 건물과 달리 붉은 벽돌로 층층이 쌓인 벽이 그곳의 정체성이었다”고 말했다.

동아리방이 위치한 학생회관은 학생들 간 문화교류의 장이었다. 동아리들은 홍보를 위해 제각기 문을 꾸미기도 했다. 통기타를 통째로 붙인 문, 검도 호구가 있는 문, 시가 쓰인 문 등이 개성을 뽐냈다. 강성찬 학생은 “새내기 시절 연극 동아리 '또아리'에 참여해 1년에 두 번 빨간 벽돌의 무대에서 공연했다”며 “이미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언제나 그 추억은 회색빛이 아닌 총천연색으로 빨갛게 살아있다”고 회상했다.

A학생(경영학부 4)은 “빨간 벽돌 내 동아리 연습실의 퀴퀴한 냄새가 기억난다”며 “로비에 안무를 맞추기 좋은 대형거울이 있어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데도 춤 연습을 했다”고 댄스동아리에서의 추억을 나눴다.

캠퍼스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몇몇 건물이 생기기도,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라진 장소들도 여전히 우리 곁에 추억으로 살아있다.

http://news.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32282

…中央大に来た目的である本題に入れないままですが、そちらは記事を改めるとし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