済州4.3事件の終わらない真相究明

もちろん、2000年以来、調査はされ、報告書も出され、慰霊もされてはいますが、遺体もなく、死に場所もわからない、5000人にも上る行方不明者にとっては、真相が明らかにされたとはとても言えないはずです。

この中で、特に大きな割合を占めているのは、4.3事件に関連して各地の刑務所に収監され、朝鮮戦争のどさくさに紛れて殺された〈受刑者〉たち、あるいは戦時下の予備検束で拘束されてそのまま殺された人たちで、こうした人たちの遺体はしばしば人知れず「処分」されて行方が分からなくなっています。

시신 없는 행불자 5천명 추산
[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32> 행불인 유족회 발족
등록 : 2012년 05월 07일 (월) 19:39:20
최종수정 : 2012년 05월 07일 (월) 19:43:05
양조훈


2000년 3월13일 제주관광민속관에서 열린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창립대회. 행불유족회는 4·3 진상규명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대부분 육지형무소 수감 중 6·25 때 학살
유족들 '남다른 한' 딛고 진상규명에 동참

행불인 유족회 발족

"50여년전 이 땅에서 사라진 사람들/피붙이 갓난애와 젊은 아내, 거동도 어려운 늙은 부모를 뒤로하고/산으로, 지서로, 군부대로/쫓겨가고, 끌려가고/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사라져야 했던 삶들/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을 몰라 제사 한번 올리지 못한 불효의 세월/목포로 대구로 대전에서 서대문으로 형무소마다 행방을 찾았으나/끝내 생사조차 확인 못한 기다림의 세월/사회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도/지역사회의 주역으로 삶을 개척해온 기막힌 인생들이 이제 당당히 나섰습니다"

2000년 3월13일 발족한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가 창립 준비를 하면서 제주도민들에게 밝힌 내용이다. 그날 제주시 신산공원 옆 제주관광민속관(현 제주영상센터) 공연장에 모인 행방불명인 유족 400여명은 행불유족회 창립대회를 갖고 "4·3 당시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생명을 빼앗긴 이들에 대한 법적 명예회복과 4·3 진상규명을 위해 치열한 활동을 할 것"을 선언했다.

이날 창립대회에서 임원진으로 공동대표 김문일·박영수·송승문·이중흥·한대범과 감사 강성열·김영훈이 선임됐다. 행불유족회는 4·3 당시 집단학살 암매장지로 예상되는 제주비행장(정뜨르)을 비롯한 학살터에 대한 자료조사와 시신 발굴 작업을 벌이겠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4·3 당시 희생자 중에는 '시신 없는 희생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군법회의 등을 거쳐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다가 6·25가 터지면서 대부분 집단처형됐다. 군 당국의 선무공작에 따라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하산했다가 목숨을 잃은 청년들도 많았다. 또한 제주도내에서 예비검속이란 미명 아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 행불 희생자 수가 5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그런 희생자들의 죽음도 억울한 일이지만, 그 가족들의 고초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좌제란 올가미에 걸려 제대로 취업도 할 수 없었다. 극심한 피해의식 때문에 한때는 유족 스스로가 아버지, 형 등 행방불명된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려왔다. 아니, 그 어머니가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이야기를 못하도록 막기까지 했다.

부모형제의 사망일조차 몰라서 생일날에 제사를 치르고 숨죽이며 보내온 회한의 세월들, 벌초 때가 되면 가족의 무덤이 없음을 한탄하며 가슴앓이해온 유족들, 그 유족들 중에는 시신은 없지만 고인의 옷가지 등을 묻은 '헛묘'를 만들어 고인을 기리는 사람도 있었다. 4·3유족이라 할지라도 가족의 시신을 찾아 매장한 유족과 그렇지 못한 유족의 한은 달랐다. 스스로가 '기막힌 인생들'이라고 밝힌 그들이 행불유족회 결성을 계기로 당당히 나선 것이다.

이렇게 행불유족회가 발족하기까지는 '수형인 명부' 발굴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9년 9월 추미애 국회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로부터 입수하여 공개한 4·3 당시 수형인 명부는 군법회의 1650명, 일반재판 1321명 등 2971명에 이르렀다. 그 수형인 명부를 통해 가족의 이름을 확인한 행불인 유족들이 알음알음 모이기 시작했다. 4·3 군법회의 등이 판결문도 없는 '탁상 재판'이란 사실 등이 알려지면서 그들은 더욱 힘을 냈다.

행불유족회 결성 과정에서 4·3관련단체의 도움도 컸다. 4·3도민연대는 여러 형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4·3연구소는 수형인 명부 등을 통해 행불 유족들을 찾는데 일조했다.

행불유족회가 결성 후 처음 거행한 행사는 '행방불명인 진혼제'였다. 2000년 4월5일 제1회 행방불명인 진혼제는 유족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시 동부두 주정공장 옛터에서 봉행됐다. 주정공장 창고는 4·3 당시 하산했던 사람들이 심문받기 위해 감금되기도 했고, 육지부 형무소로 이송되기 앞서 수감됐던 유서 깊은 곳이다. 행불유족회 송승문 공동대표가 유복자란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난 곳도 바로 이 주장공장 창고(현재의 현대아파트 자리)이었다.

행불 유족들은 그해 5월15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진행된 '4·3유적지 전국 순례'에도 참여했다. 제주4·3도민연대가 처음 주최한 이 행사는 4·3 행불 희생자들이 머물렀던 육지 형무소와 학살터를 돌아보고 5·18기념공원 등 민주 성지를 참배하는 순례였다. 특히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이 희생된 곳으로 추정되는 경북 경산시 코발트 광산터와 달성군 가창면 가창댐,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의 학살터인 대전시 동구 낭월동 속칭 '골령골'에서는 50여년 만에 처음 치러지는 '눈물의 위령제'도 있었다.

행불유족회는 그해 7월8일에 골령골을 다시 찾아 '대전형무소 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를 개최했다. 이 위령제에는 대전 출신 김원웅 국회의원과 대전시민단체 대표들도 참석해 학살 진상규명의 연대 가능성을 높였다. 이런 행사 등을 통해 전의를 다진 행불유족회는 보수진영의 4·3 폄훼시도에 맞서 맨 앞에 나서서 온몸으로 대응하게 된다.

☞다음회는 '4·3 폄훼에 대한 대응'

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86092

つまり、済州4.3の話は、下記のような朝鮮戦争の話とも密接に絡んでくることになるわけです。

18세에 전쟁 뛰어든 형…62년만에 조국품으로
기사입력 2012-05-25 06:09:00 기사수정 2012-05-25 16:51:11

故 김용수ㆍ이갑수 일병 등 12구 미측 발굴
이명박 대통령 참석..국가차원 유해봉환식


北에 묻혔던 국군전사자 유해 첫 귀환 북한지역에서 발굴된 국군 전사자 유해 12구가 가 6.25전쟁 발발 62년만에 25일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 이명박 대통령과 군 관계자,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헌봉송단에 의해 운구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지역에서 발굴된 국군 전사자 유해가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조국의 품에 안겼다.

국방부는 25일 "1950년 12월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 등에서 전사한 국군 유해 12구가 전날 공군 C-130 수송기 편으로 하와이를 출발해 이날 오전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했다"면서 "북한지역 국군전사자 유해를 국내로 봉환한 것은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날 서울공항에서 김관진 국방장관과 김상기 육군참모총장, 제임스 서먼 한미연합사령관은 태극기와 국방부기, 육군기, 유엔기, 성조기 등으로 구성된 기수단이 늘어선 가운데 최고의 예우를 갖춰 전사자들을 맞이했다.

이들 전사자 유해는 6.25전쟁 당시 국군으로 입대해 미군에 배속됐던 카투사로, 미국이 북한과 합동으로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찾아냈다.

유해 12구 가운데 고 김용수 일병과 이갑수 일병은 신원이 확인되어 유가족과 협의를 거쳐 6월 중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나머지 10구에 대해서도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미국은 장진호전투 지역에서 발굴한 유해를 하와이의 미 합동전쟁포로실종자사령부(JPAC)로 옮겨 신원확인 작업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12구가 아시아 인종으로 분류되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합동으로 감식한 결과 국군 전사자로 확인됐다.

김용수, 이갑수 일병은 미 7사단 15전차대대 소속이었다.

1933년 부산에서 출생한 김 일병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해 7사단에 배속되어 북진하다가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작년에 숨진 형이 생전에 동생의 유해를 찾겠다며 유전자(DNA)감식용 혈액을 채취한 것이 신원 확인의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그의 아버지 고 김인주 선생도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투신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부산에 거주하는 큰 조카 김해승(55) 씨가 유해를 맞이했다.

191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이 일병은 34세의 늦은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4살, 7살이던 어린 두 남매를 뒤로하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 하갈우리지역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들 이영찬(66), 딸 이숙자(69) 씨가 그리던 아버지와 헤어진 지 62년 만에 유해를 맞이했다.

이 일병은 발굴 당시 인식표가 발굴되어 유가족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인 박신한 대령은 "비록 우방인 미국에 의해 발굴되었지만 미완의 과제인 북한지역에 남아 있는 나머지 국군 전사자 유해 봉환의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박 대령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국가가 책임진다는 국가 의지를 실현한 뜻깊은 일"이라며 "대한민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함께 싸운 한국군 전사자 유해를 발굴해 신원까지 확인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미측에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북한지역과 비무장지대(DMZ)에는 3~4만여구의 국군 전사자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남북관계 경색으로 북측과 발굴협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뉴스팀

http://news.donga.com/Politics/3/00/20120525/46508490/1

記事入力 : 2012/05/26 10:45
朝鮮戦争DMZなどに韓国軍戦死者の遺体3万−4万体
2007年に南北共同発掘で合意
北朝鮮は現在まで約束を守らず

 1953年に締結された停戦協定は、南北がそれぞれ相手方の戦死者の遺体を発見した場合、互いに引き渡し・引き受けるよう規定している。しかし韓国は、6・25戦争(朝鮮戦争)から62年が過ぎた25日、北朝鮮側に埋まっていた韓国軍戦死者の遺体を初めて米軍から引き渡された。

 韓国政府の関係者は25日「北朝鮮は、休戦直後には停戦協定に従い国連軍戦死者の遺体を一部送還したが、54年8月から遺体の送還をしていない」と語った。その後北朝鮮は、韓国政府が繰り返し遺体送還会談を提案しても、これを受け入れなかった。

 盧武鉉ノ・ムヒョン)政権末期の2007年11月、平壌で行われた第2次国防長官会談で、南北は6・25戦死者の遺体を共同発掘することで合意した。

 しかしこの合意は、5年が過ぎた現在まで守られていない。国防部(省に相当)は現在、北朝鮮地域や非武装地帯(DMZ)などに、韓国軍戦死者の遺体約3万−4万体が埋まっていると推定している。

 これに対し米国は、米軍戦死者の遺体発掘・送還のため88年12月から北朝鮮と接触を始め、93年8月まで約30回もの会談を北朝鮮側と行った末「米軍の遺体に関する合意書」を導き出した。また米国は、会談を進めながら、90年から94年までの間に、北朝鮮から計211体の米軍戦死者の遺体引き渡しを受けている。

チョ・ベッコン記者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2/05/26/20120526005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