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安所管理人の日記

朝鮮日報の記事ですが、内容からして、いずれ日本語翻訳記事も出るものと思われます。

'日本軍이 위안부 조직적 동원' 日記 나왔다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 2013.08.07 03:01

[버마·싱가포르의 日本軍 위안소 관리인이 쓴 日記]

"1942년 7월10일 조선인 처녀 수백명 '4차 위안단'
日군용선 타고 부산항 출발, 8월20일 버마에 도착
20명 안팎씩 나뉘어 일본군 주둔지에 배치됐다"


일본군 위안소의 관리인이었던 조선인이 남긴 일기. /도서출판 이숲 제공

일본군위안부가 전시(戰時) 동원 체제의 일환으로 일본군 주도 하에 여러 차례 조직적으로 동원됐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새로 발견됐다. 또 전선의 일본군 부대가 하부 조직으로 편성된 위안소와 위안부들을 끌고 다녔던 사실도 이 자료로 드러났다. 이는 일본군위안부 동원에 일본 정부나 군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일부 일본 인사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한국 경제사)는 1942년 7월 일본군위안부들을 따라 버마(현 미얀마)로 가서 1944년 12월 귀국할 때까지 버마와 싱가포르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관리인으로 일했던 조선인이 남긴 일기를 6일 공개했다.

안 교수의 번역과 해제로 곧 간행되는 이 일기에 따르면 1942년 7월 10일 조선인 처녀 수백 명으로 구성된 '제4차 위안단'이 부산항을 출발했다.

일본군의 대리인이 선정한 민간 업자들이 모집한 이들은 군속(軍屬)에 준하는 신분이었으며 일본군이 발행하는 여행 증명서를 갖고 군용선 등 군용(軍用)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8월 20일 버마에 도착한 위안부들은 20명 안팎씩 나뉘어 일본군 주둔지와 주요 도시 지역에 배치됐다. 일본군 위안소는 형식적으로는 민간 업자가 경영했지만 일본군이 직접 관리·통제했다. 위안소는 일본군 부대에 전속(專屬)돼서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제출했으며 군의 명령에 따라 수시로 이동했다.

버마 지역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존재는 이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출신인 고(故)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 등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문 할머니가 '제4차 위안단'의 일원이었으며, 이들이 시종일관 일본군의 명령을 따랐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안병직 교수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본군이 몇 번에 걸쳐 위안부를 끌고 간다는 풍문이 돌았는데 이번에 공개된 일기로 그 실체가 드러났다"며 "일본군 위안소의 운영 실태를 보여주는 이 일기에 의해 위안소가 일본군 조직 편제의 말단에 편입됐고 일본군위안부들이 '성적 노예' 상태에 있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07/2013080700210.html

日本軍 위안소 버마 27곳·싱가포르 10곳… 軍 명령따라 이동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 2013.08.07 03:01

[안병직 교수,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위안부 동원 증명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공개]

-日本軍의 완전 통제하에 운영
특정 부대에 위안소 배속시켜 수입보고서·영업일보 내게 해
-"1942년 7월 '4차 위안단' 출발"
일제 치하 한반도에서 이미 몇차례 조직했단 명확한 증거
-위안부 그만둔 사람도 재차 끌려와
"위안부로 있다 나간 히로코, 병참 명령으로 다시 왔다더라"

안병직〈사진〉 서울대 명예교수(한국경제사)가 6일 공개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인의 일기는 그동안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일본군위안부 동원과 위안소 운영 실태의 상당 부분을 보여준다.

일기의 필자(1905~1979)는 1940년대 들어 통제경제가 강화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1942년 7월 일본군위안부를 모집해서 버마로 떠나는 처남에게 합류했다. 그가 버마와 싱가포르에서 남긴 일기에는 일본군위안소의 경영 실태와 일본군위안부의 생활상이 담겨 있다. 다만 1942년도 일기가 분실돼 일본군위안부 모집 과정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는 점은 아쉽다.

일기는 한글과 한문을 주로 썼고 일본어도 섞여 있다. 문장은 한국어체(體)이지만 한문체로 읽어야 뜻이 통하는 곳도 많아 현대어 역(譯)이 필요하다.

일기를 통해 드러난 중요한 사실은 일본군이 일본군위안부를 여러 차례 조직적으로 동원했다는 점이다. 1942년 5월 일본군 남방파견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에 위안부 모집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조선군사령부가 선정한 위안소 업자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과 목돈을 미리 주는 전차금(前借金·임금을 담보로 해 빌리는 돈)을 미끼로 위안부를 모집했다.

이들이 모집한 위안부들은 7월 10일 업자·관리인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했다. "재작년 위안대가 부산에서 출발할 때 제4차 위안단 단장으로 온 쓰무라(津村)씨"(1944년 4월 6일)라는 일기 내용을 통해 일본군이 조선에서 이 외에도 위안단을 몇 번 조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중 일부는 전차금 수백엔을 받았다. 그 돈은 군(軍)에서 나왔다는 게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일기에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군위안소 업자들은 위안소를 쉽게 양도하고 새 업자는 별 부담 없이 이를 인수했다. 일기의 필자 역시 처남이 사고로 죽은 뒤 그가 운영하던 일본군위안소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군위안소가 사실상 군 소유이고, 업자는 경영만 담당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버마와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발견돼 연합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조선인 일본군위안부들. 1942년 7월 부산에서 출발한‘제4차 위안단’은 버마의 일본군 주둔지와 주요 도시 지역에 배치됐다. /조선일보 DB

일기는 또 일본군위안소가 일본군의 완전 통제 아래 운영됐다는 점도 알려준다. 일기에 등장하는 일본군위안소는 버마에 27개소, 싱가포르에 10개소이다. 일본군위안소들은 '항공대위안소' '병참관리위안소'처럼 특정 부대에 소속돼 있었고, 수입보고서·영업일보 등의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소속 부대에 냈다. "(랑군의) 인센에 있는 다카(高)부대, 즉 항공대 소속의 위안소 2개소가 병참 관리로 이양됐다더라"(1943년 7월 19일) "무라야마씨가 경영하는 위안소 이치후지루가 병참 관리로 되어"(7월 20일)라는 일기 내용처럼 소속 부대가 변경되기도 했다.

또 일본군위안소는 군의 명령에 따라 이동했다. "위안소를 55사단에서 만달레 근처의 이에우라는 곳으로 이전하라는 명령이 있어"(1943년 3월 10일) "페구의 위안소 오토메테이(乙女亭), 분라쿠관, 장교 클럽 등 서너 위안소는 이번에 아카브 지방으로 이동되었는데"(4월 15일) "가나가와씨는 위안소 이동설이 있다고 군사령부에서 알아보겠다더라"(8월 6일)는 일기 내용이 이를 입증한다.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접었던 사람이 다시 끌려오기도 했다. "이전에 무라야마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 생활하러 나간 하루요(春代)와 히로코(弘子)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김천관에 있게 되었다더라"(1943년 7월 29일)는 일기 내용이 이를 말해준다.

일기를 통해 드러난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군위안부를 민간업자가 모집했고, 위안소 업자가 영업을 위해 일본군 부대를 따라다녔다는 일부 일본 인사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준다.

안병직 교수는 "일본군위안부는 징용, 징병, 근로정신대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전쟁이 본격화되자 전시(戰時) 동원 체제의 하나로 국가적 차원에서 강행한 것"이라며 "더구나 위안부들은 모집 때 그들이 할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인신매매에 가까운 수법이 이용됐다는 점에서 '광의의 강제 동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07/2013080700246.html


追記:図表も含めた翻訳記事も日本語版サイトに出ました。

ちなみに、毎日新聞と同様、1面に掲載されているようです。


記事入力 : 2013/08/07 09:40
慰安婦慰安所管理人の日記発見、性的奴隷の実態明らかに

ビルマシンガポールにあった日本軍慰安所の管理人、日記に書き記す
「1942年7月10日、朝鮮人女性数百人の『第4次慰安団』、軍用船に乗って釜山出港、8月20日ビルマ着、20人前後に分かれて日本軍駐屯地に配置」


▲日本軍慰安所の管理人だった朝鮮人が残した日記。/写真提供=図書出版イスプ社▲日本軍慰安所の管理人だった朝鮮人が残した日記。/写真提供=図書出版イスプ社

 旧日本軍の従軍慰安婦が、戦時動員体制の一環として、日本軍の主導の下に数度にわたって組織的に動員されていたことを示す資料が新たに発見された。また前線の日本軍部隊が、下部組織として編成された慰安所慰安婦らを率いて移動していた事実も同資料で明らかになった。これは「従軍慰安婦の動員に日本政府や日本軍が関与しなかった」という一部の主張を全面的に否定する資料だ。安秉直(アン・ビョンジク)ソウル大学名誉教授(韓国経済史)は、1942年7月に従軍慰安婦を連れて旧ビルマ(現在のミャンマー)に向かい、44年12月に帰国するまでビルマシンガポールの日本軍慰安所で管理人として働いていた朝鮮人が残した日記を6日に公開した。

 安名誉教授が翻訳および解題を担当して間もなく刊行されるこの日記によると、42年7月10日、朝鮮人女性数百人からなる「第4次慰安団」が釜山を出発した。

 女性を募集したのは、日本軍の代理人が選んだ民間業者。募集された女性は軍属に準ずる身分で、日本軍が発行する旅行証明書を持ち、軍用船など軍用の交通手段を利用した。

 8月20日にビルマに到着した慰安婦らは、約20人ずつに分けられ、日本軍の駐屯地や主要都市に配置された。日本軍の慰安所は、形式的には民間業者が経営していたが、日本軍が直接管理・統制していた。慰安所は日本軍の部隊の専属として報告書を定期的に提出し、また軍の命令によって随時移動した。

 ビルマ朝鮮人慰安婦の存在は、この地域の慰安婦だった故ムン・オクチュさんの証言などによって知られていた。しかしムンさんが「第4次慰安団」の一員で、女性たちが終始一貫して日本軍の命令に従っていたという事実が明らかになったのは、今回が初めて。

 安名誉教授は「41年12月に太平洋戦争が始まった後、日本軍が数度にわたって慰安婦を連れていったといううわさが出回ったが、今回公開された日記でその実態が判明した。日本軍慰安所の運営実態を示すこの日記によって、慰安所が軍の組織編制の末端部に編入されており、従軍慰安婦が『性的奴隷』状態にあったことを再確認できる」と語った。

李先敏(イ・ソンミン)先任記者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3/08/07/2013080700770.html

記事入力 : 2013/08/07 09:36
慰安婦:安秉直名誉教授、日本軍による組織的動員を立証

安秉直名誉教授、「慰安所管理人の日記」を公開
日本軍の完全統制下で運営
特定の部隊に慰安所を配属させ、収入報告書・営業日報を出させる
「1942年7月に『第4次慰安団』出発」
植民地下の朝鮮で既に数回組織したという明確な証拠
慰安婦をやめた人を再度連れてくることも
慰安婦をしていて出て行った弘子、兵站の命令でまた来た」

 安秉直(アン・ビョンジク)ソウル大学名誉教授(韓国経済史)=写真=は6日、旧日本軍の慰安所で管理人をしていた朝鮮人が書いた日記を公開した。この日記は、これまで詳細が明らかになっていなかった従軍慰安婦の動員や慰安所の運営の実態を、かなり明らかにしてくれる資料だ。

 日記の筆者(1905−79)は、1940年代になって統制経済が強化され経済的に困窮したため、42年7月、従軍慰安婦を募集してビルマ(当時)に向かう義理のきょうだいと合流した。この筆者がビルマシンガポールで書き残した日記には、日本軍慰安所の経営実態や従軍慰安婦の生活の様子が描かれている。ただし、42年の分の日記が紛失しているため、慰安婦の募集過程に関する内容が抜け落ちているところが惜しい。

 日記はハングル文字と漢字を主に用い、日本語も混じっている。文章は韓国語体だが漢文として読まなければ意味が通じない部分も多く、現代語訳が必要だ。

 日記を通して明らかになった主な事実は、日本軍が従軍慰安婦複数回にわたって組織的に動員していたということ。42年5月、日本軍の南方派遣軍司令部は、朝鮮軍司令部に対し慰安婦募集に関する協力を要請した。朝鮮軍司令部が選定した慰安所業者らは「多額の金を稼げる」という甘い言葉や、まとまった額の金をあらかじめ前借金として渡すなどして、慰安婦を募集した。

 募集された慰安婦は、7月10日に業者・管理人と共に釜山港を出発した。「一昨年慰安隊が釜山を出発したとき、第4次慰安団の団長として来た津村氏」(44年4月6日)という日記の記述から、このほかにも日本軍が朝鮮で数度にわたり慰安団を組織したことが分かる。

 従軍慰安婦の一部は、数百円の前借金を受け取った。その金は軍から出たというのが、研究者らの分析だ。日記には、これを裏付ける記述も見られる。慰安所業者らは、慰安所を簡単に譲渡し、新たな業者は特に負担もなくこれを引き継いだ。日記の筆者もまた、義理のきょうだいが事故で死亡した後、このきょうだいが運営していた慰安所への縁故権を主張しなかった。これは、事実上軍が慰安所を所有しており、業者は経営のみを担当していたからだ。

 また日記は、慰安所が日本軍の完全統制下で運営されていたことも示している。日記に登場する慰安所は、ビルマに27カ所、シンガポールに10カ所。各慰安所は「航空隊慰安所」「兵站(へいたん=戦闘地帯から後方の、軍の諸活動・機関・諸施設を総称したもの)管理慰安所」のように特定の部隊に所属しており、収入報告書・営業日報などの報告書を定期的に所属部隊へ提出した。「(ラングーン〈現在のヤンゴン〉の)インセンにいる高部隊、すなわち航空隊所属の慰安所2カ所が兵站管理に移譲された」(43年7月19日)「村山氏が経営する慰安所『いちふじ楼』が兵站管理になり」(7月20日)と日記に記述されているように、所属部隊が変更されるケースもあった。

 さらに、慰安所は軍の命令によって移動した。「55師団から、慰安所マンダレー近辺のイエウという場所に移転せよという命令があり」(43年3月10日)、「ペグーの慰安所『乙女亭』、『文楽館』、将校クラブなど3、4の慰安所は、今回アキャブ地方に移動した」(4月15日)、「『カナガワ』氏は、慰安所移動説があると言って軍司令部で調べてみた」(8月6日)という日記の記述が、これを証明している。

 慰安婦暮らしをやめた人が、再度連れてこられることもあった。「以前村山氏の慰安所慰安婦をしていて、夫婦生活を送るために出ていった春代と弘子は、今回兵站の命令で再び慰安婦として『きんせん館』に来ることになった」(43年7月29日)という日記の記述が、このことを物語っている。

 日記で明らかになったこうした事実は「民間業者が従軍慰安婦を募集し、慰安所業者が営業のために軍部隊についていった」という一部の主張が事実ではないことを示している。

 安秉直名誉教授は「従軍慰安婦は、徴用・徴兵・勤労挺身(ていしん)隊と同じく、戦争の本格化により日本が戦時動員体制の一つとして国家的レベルで強行したこと。しかも慰安婦は、募集時に自分たちがやることをきちんと説明されず、人身売買に近い手法が利用されたという点で『広義の強制動員』と見ても差し支えない」と語った。

李先敏(イ・ソンミン)先任記者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3/08/07//2013080700749.html

「この日記を出版」というニュースも出ていますね。韓国でという話ですけど。

안병직 교수 '일본군이 위안부 강제 동원' 일기 발굴 책으로 낸다
기사등록 일시 [2013-08-07 12:19:16]

【서울=뉴시스】김지은 기자 = 일본군위안부가 전시(戰時) 동원 체제의 하나로 일본군 주도 하에 강제 동원됐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새로 발견됐다.

1942년 7월 일본군위안부들을 따라 버마(현 미얀마)로 가서 1944년 12월까지 버마와 싱가포르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관리인으로 일했던 조선인이 남긴 일기를 통해서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한국 경제사)의 번역과 해제로 곧 간행되는 이 일기에 따르면 1942년 7월10일 조선인 여성 150~200명으로 구성된 '제4차 위안단'이 부산항을 출발했다.

일본군 남방파견군사령부는 같은 해 5월 조선군사령부에 위안부 모집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조선군사령부가 선정한 위안소 업자들은 모집 때 위안부들이 할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과 전차금 등으로 여성들을 현혹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고 문옥주 할머니도 '제4차 위안단'의 일원이었다.

문 할머니는 "'일본군 식당에 가서 일하자. 거기 가면 돈을 벌 수 있어요'라며 나에게 권유한 사람은 히토미와 기화 자매였다"고 증언했다. 그는 만주 동안성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군위안부로 같이 종사한 일이 있고 서로 가까이에 살고 있던 히토미와 기화 자매와 더불어 남방의 일본군 식당에서 돈을 벌기 위해 모집에 응했다는 것이다.

일본군이 일본군 위안소를 직접 관리·통제했다는 점도 실려 있다. 8월20일 버마에 도착한 위안부들은 15~20명으로 나뉘어 일본군 주둔지와 주요 도시에 배치됐다. 또 일본군 위안소는 형식적으로는 민간 업자가 경영했지만 일본군 조직 편제의 말단에 편입됐고 군의 명령에 따라 이동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안 교수는 "제4차위원단의 경우 보다 주요한 문제는 그것이 징용, 징병 및 정신대와 같은 전시동원이라는 점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며 "더구나 위안부들은 그들이 할 일을 제대로 설명받지 못하고 감언이설과 인신매매에 가까운 수법으로 동원됐다는 점에서 '광의의 강제 동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결론내렸다.

이어 "위안소가 일본군 조직 편제의 말단에 편입됐고 폐업이 어려웠다는 점으로 미뤄 일본군위안부들이 '성적 노예' 상태에 있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30807_0012274345&cID=10201&pID=1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