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の風景】門峴洞・アンドンネ壁画マウルと門峴共同墓地

ハノル高等学校(旧・釜成高等学校)の校門から左手には、壁沿いに細い道が伸びています。

d.hatena.ne.jp

しばらくは何が出てくるのかわからないような山道なのですが、そこを抜けると生活感のある村に出てきます。

しかも壁画村です。




「アンドンネ(안동네)」と呼ばれていますが、丘の上に位置していて、いわゆるタルトンネの一つです。


個人的なことを言えば、壁画マウルの取り組みにはあまり好意的ではないのですが…。



わんこやにゃんこ描けば許されると思うなよ…。

ちなみに、上の3枚目の写真の壁画のところに、地図があります。これらはおおむね、2008年に描かれたものなんですね。

ということなので、こういう落書きも、それ以前のものはありません。たぶん中学生か高校生くらいのカップルなんでしょうけど、今に至るまで続いてるのやら、別れているのやら…。


今回、私は裏口から入った形になりましたが、このアンドンネ壁画マウルの本来の入り口は、こちらの道路側になります。入ってすぐのところで、ホンモノのわんこがお出迎えをしてくれます。



この壁画マウルについては、下記のブログに訪問記事があります。ご参考までに。

blog.goo.ne.jp

yukiful.exblog.jp

また、こちらの韓国語ブログには、この一帯の1952年の写真というのがアップされています。

아래 사진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Kenneth Lehr씨가 찍은 1952년에 찍은 사진으로 (출처: http://blog.joins.com/fabiano 맨날 추억에 사네 ) 귀한 장면이다. 지금의 돌산공원에서 동쪽으로 대연동으로 향하는 문현고개 길이 보이고 남쪽으로 우암동 장고개도 보인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55보급창과 범일교가 보인다. 문현고개는 해발 200m 높이에 달구지가 겨우 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그 길을 한국전쟁시기 미공병대가 7m 폭으로 확장했고 1965년 신부산 개발과 교통완화를위해 25m로 확장하면서 깍아 냈다.

그 앞 양 사면이 절토된 언덕이 지금 문현동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401~427번지 일원과 삼성아파트가 입지한 곳이다. 서쪽 절개지 아래 구릉을 평탄작업으로 정지해 놓은 곳이 옛 문현초등학교 자리인 문현여중와 성동중학교 터다. 절개지의 흙은 일제 강점기 동천호안정비 및 부산진 매축 때 매립토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동안 이곳을 '흙구디(더기)'라 칭했다.

그리고 동쪽 부대터는 지금의 문현3동 이고 맨 오른쪽 길 소나무가 선 자리가 지금의 메가마트 자리로 추정된다. 다시 돌산공원 주변으로 본다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곳이 지금의 부성고 정도될 듯하다. 사진에 보이는 돌무더기는 가매장 무덤이거나 애장터다.

http://blog.daum.net/_blog/ArticleCateList.do?blogid=0gMuf&CATEGORYID=12


で、壁画マウルの入り口に面した道路の反対側を見ると、荒嶺山(황령산)のトレッキングコースへの入り口があります。


釜山鎮区側のこちらの道は、いくつかのルートに分かれているのですが、その最初のルートがぐるっと遠回りするように囲んでいる場所をよく見ると、そちらにも細い道が通じています。

そこがどういう場所なのかは、分け入ってみればすぐにわかります。



ここは、門峴共同墓地と呼ばれています。見たところ、由来としては植民地時代以前に遡るであろうこの墓地、ちゃんと草刈りされているお墓と、草が茂るに任されているお墓とが混在しています。




こんな風に、山の斜面にそこそこの面積をもって広がっているこの門峴共同墓地ですが、元からこの広さだ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

実は、今さっき見てきたアンドンネ、あそこの周辺も元は門峴洞の共同墓地の敷地だったんです。釜山市内の他のタルトンネと同様、朝鮮戦争以降に急増した避難民によってトンネが形成されたようです。

今でも住居地の中には、共同墓地だった時代のお墓が点在して残っているとのことです。壁画に気を取られて気が付きませんでした。

묘지마을

농막이 있었던 마을 뒷산에는 아직까지 공동묘지가 남아 있다. 이 공동묘지가 있는 곳까지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집을 지을 때 어떤 집은 무덤을 절개하여 반을 남겨둔 채 집을 짓기도 하였고, 담 안에 무덤을 남겨둔 채 집을 짓고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 아직도 지켜 주는 이 없는 무덤들이 길이나 담벼락이나 집과 집 사이에 누워서 마치 마을을 지키며 함께 살고 있는 듯 하다.

이곳은 처음에 피난민들이 정착할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묘지마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산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이 왜 무섭겠냐?”며 오히려 죽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말없이 망자의 한을 달래며 누워 있는 무덤과 더불어 또 다른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 마을이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https://bsnamgu.go.kr/story/story.php?Menu_Code=story01_01_06&submenu=03

공동묘지→달동네→벽화+공원 마을 변신
정달식 기자 입력 : 2010-07-22 [10:46:00] | 수정 : 2010-07-22 [14:35:25] | 게재 : 2010-07-22 (5면)


▲ 문현동 벽화마을의 '돌산공원'이 쓰레기 더미에서 깨끗한 쉼터로 탈바꿈 중이다. 사진은 대형 스크린을 갖춘 야외무대. 이재찬 기자

지난 19일 오후 부산 남구 문현동의 '문현 안동네' 돌산공원. 찌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10여 명의 인부들이 잔디심기에 열중이었다. 이 마을 황숙이(51) 통장은 "불법 적치물과 쓰레기 천지였고, 저녁때면 주정꾼들이 진을 쳤는데, 이렇게 밝은 공원으로 변모하게 돼 주민들이 참으로 기뻐한다"고 했다.

원래 이곳은 공동묘지였다. 6·25전쟁 직후 피란민들이 묘지 사이 빈터에 집을 지으면서 마을(현재 260여 채)이 형성됐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80여 기의 무덤이 흩어져 있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면이 묘하다.

문현동 벽화마을 주민들
국토부 예산 4억 받아
돌산공원 가꾸기 성공

한때 철거 대상이었던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이 마을은 2008년 '벽화마을'로 변신한다.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주민들과 학생, 시민 등 자원봉사자 300여 명의 3개월간 담벼락을 화사한 파스텔톤의 그림 48점으로 채웠다.

국토해양부의 '살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범사업에 당선돼 총 4억 원 예산으로 지난해 6월부터 '돌산공원 가꾸기 사업'이 진행됐다.

공원 가꾸기에는 무엇보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큰 힘이 됐다. 공원 내의 쓰레기, 6개소의 무단점유 창고를 주민들이 합심해서 치웠다. 공원에 설치한 가로등, 운동기구들은 주민 의견의 결과물이다. 공원 진입로나 산책로에는 철쭉 민들레 봉숭아 해바라기 국화도 심었다. 족구나 배구를 할 수 있는 간이 운동장과 수세식 화장실도 설치할 예정이다.

돌산공원 한쪽에서는 대형 스크린(6m×3m)과 200석 규모의 객석을 갖춘 야외무대 공사도 한창이었다. 공원 가꾸기 자문을 맡고 있는 이규홍(38·동아대 조경학과 강사) 씨는 "10월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에는 이곳에서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방안도 시네마테크부산과 협의 중"이라고 귀띔했다.

이 마을은 그러니까 '공동묘지-달동네-벽화마을+공원마을'의 변화 궤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일하던 한 주민은 신이 났다. "여수에만 돌산공원이 있나요. 문현동 벽화마을에도 돌산공원이 있어요."

정달식 기자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00722000080

墓地だった土地に住居が形成されるというのは、釜山なら峨眉洞がわりと有名ですが、まとまった土地を占めていたはずの墓地が住居に転用されるケースが他にあっても、不思議ではありませんね。

その点については、釜山日報のこちらの記事が詳しく書いています。ここに書かれているところを、もう少しじっくりと歩いてみたいところです。

まだ訪れたことのないコンマウル(花の村)の周辺にも、地図を見ると共同墓地があるんですよね…。

고향 떠난 200만 명 산비탈·공동묘지에 움막 치고 연명

'피란민촌'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대진 기자 입력 : 2010-09-10 [16:06:00] | 수정 : 2010-09-10 [14:55:57] | 게재 : 2010-09-07 (43면)

·전쟁 속에 피어난 '꽃'

부산 서구 서대신동 '꽃마을'은 60년 전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기구한 애환을 간직한 곳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포화를 피해 전국에서 200만 명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지만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터는 턱 없이 부족했다. 피란민들은 등을 뉠 수 있는 한 뼘의 땅이라도 있다면 도로변과 산비탈, 공동묘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구덕고개 원주민들
쓰던 방 내주며 애틋한 동거
담 안에 무덤 그대로 둔 채
얼기설기 집 지어 목숨 부지

구덕령(九紱嶺) 정상에 위치한 꽃마을까지 피란민 발길이 닿은 것도 이러한 연유였다. 당시 꽃마을에서 부산전차 종점이 있던 구덕운동장까지는 차편이 없어 30분 이상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해방 직후까지 꽃마을은 초가집 60여 채가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0여 세대의 피란민들이 정착해 원주민 수를 넘어섰고, 마을의 규모도 커졌다.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구덕령, 꽃마을 사람들은 피란민들을 따뜻하게 맞아줬다. 방 2칸 중 1칸을, 3칸인 집은 2칸을 내줘가며 이들을 보듬었다. 집집마다 원주민과 피란민의 애틋한 동거생활이 펼쳐졌다.

마을 주민 김성태(78) 씨처럼 방 2칸 전부를 피란민 가족에게 내어준 경우도 있었다. 김 씨의 어머니는 피란길에 남편과 헤어진 새댁과 함께 안방을 썼고, 작은방에는 6명의 피란민 가족을 들였다.

김 씨는 "당시 꽃마을 일대는 국·시유지가 대부분인 데다 감시가 심해 다른 지역처럼 움막을 함부로 지을 수 없었다"면서 "고향을 잃은 피란민들을 내칠 수 없어 주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방을 내줬다"고 회고했다.

고난의 피란생활이었지만 꽃마을 피란민들은 그나마 여유로운(?) 편이었다. 시내 다방과 상가 등지에 꽃을 내다 팔며 밥벌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피란민이 유입돼 부산 인구가 늘어났고, 이는 꽃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다방과 상점 등 꽃을 찾는 가게가 늘어났고, 서울 등지에서 온 부유층도 주요 고객이었다.

당시 부산지역에서 꽃을 내다 파는 사람들은 꽃마을의 젊은 아낙들이 유일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인근 엄광산과 구덕산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를 꺾어다 일본인들에게 판매했던 경험이 밑바탕이었다. 특히 다방, 상점, 가정집 등 꽃을 찾는 '단골' 위주의 방문판매라 큰 품을 안 팔아도 됐다.

이들은 마을에서 꽃을 재배해 팔거나, 판매할 꽃을 김해와 마산 등지에서 대량으로 떼어오기도 했다. 새벽이면 대야 한가득 꽃을 머리에 이고 일렬로 고갯길을 내려가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당시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장관이었다. 비닐하우스가 없던 시절이라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카네이션과 달리아, 가을에는 국화가 인기였다.

꽃마을은 60년대 중반 또 한 번의 전쟁을 겪으며 재차 꽃을 피웠다. 베트남전 때 한국군을 파병하면서 꽃 수요가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베트남으로 떠나거나 돌아오는 국군 장병들 목에는 어김없이 '꽃마을표' 꽃다발이 하나씩 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의 상징인 꽃, 꽃을 상징하는 꽃마을의 번성과 참혹한 전쟁의 역사가 궤를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꽃마을에는 1981년 구청에서 건설한 7천200㎡(약 2천여 평) 규모의 양묘장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꽃들은 지역 내 길거리나 화단 등 조경용으로만 사용된다.

몇몇은 동구 범일동 자유시장과 평화시장에서 꽃 도매상을 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90년대 들어 등산객이 늘면서 꽃마을 아낙네들 중 일부는 음식점을 열어 이들을 맞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

피란민촌 중에서도 소위 공동묘지 마을로 불리는 곳은 피란민들의 애환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역이다. 당시 피란민들은 생존을 위해 죽은 자의 공간까지 비집고 들어가야만 했다.

남구 문현동 '돌산마을'은 농막마을(지금의 문현 안동네) 뒷산 공동묘지에 형성됐다. 문현초등학교 뒤편 골짜기에 있던 농막마을은 옛날 막노동꾼이나 가난한 농부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던 곳. 일제강점기 말기 30채가량의 이 마을은 한국전쟁 직후 피란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공동묘지 주변으로도 판잣집이 들어섰다.

처음엔 무덤 옆 공터에 조심스럽게 집을 지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무덤을 절개하여 반만 남겨둔 채 집을 짓는가 하면, 담 안에 무덤을 그대로 두고 집을 지어 살기도 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80여 기의 무덤이 흩어져 있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서구 아미동 묘지마을의 사연은 더 기구하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다. 뒤늦게 부산으로 피란을 와 미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이곳 공동묘지로 흘러들었다.

다른 피란민 정착지역과 달리 아미동 무덤 일대는 땅이 평평해 외려 집을 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일본인 가족묘 주위를 직사각형으로 두른 경계석과 외곽벽은 그대로 집벽으로 활용했다. 집을 지을 마땅한 재료가 없던 시절, 비석과 상석은 축대를 쌓고 계단을 만드는 데 유용한 건축자재였다.

마을주민 이상묵(75) 씨는 "당시에는 눈앞의 생존을 위해선 무덤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면서 "대부분의 피란민들이 납골함 위에 놓여 있던 비석과 상석, 받침돌 등 커다란 돌덩이들을 옮길 수 없어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산 자는 물론, 죽은 자에게도 상흔을 남긴 한국전쟁이었다.

이대진 기자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0090700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