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海の風景】二東面・鶯江休憩所の銅像と石碑

昨年に続いて訪れた慶尚南道南海郡。南海大橋からは、いつものように光陽のPOSCO製鉄所がよく見え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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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外バスターミナルに着いた後、すぐさまタクシーに乗って向かったのは、鶯江休憩所。海に挟まれた峠にあ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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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に来たのは2度目。前回は、めったに雪の降らない南海が雪に埋もれた時でした。

目当てにしているものは、その時と同じ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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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珍景(박진경)の銅像です。この人物は南海郡出身で、済州の4.3事件における「暴動」討伐を強硬に主張したことで知られています。

そのへんのことについては、前回の訪問以前にこちらで記事に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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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回も見るには見たのですが、非常に駆け足でしたので、改めて周囲も含めて見てみようと思ったのです。

例えばこんなのとか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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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ここで植樹されてるのって、かのカイヅカイブキですね。1990年代には何の問題もなかった、というわ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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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鶯江休憩所は、駐車場のほかには大した便宜施設はなく、全体的に何段かの広場のようになっています。その中段部分に、この朴珍景像のほか、こうした石碑が建てら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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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期的に見て、まず朴珍景像(1990年代)があり、そのことがこれらの記念碑(2000年代以降)を呼び寄せたということになりそうです。また、政治史的にけっこうな時代の変化が挟まっていますので、銅像と石碑の間にはあまり単純ではない関係が想定できそうな気が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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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せ、朴珍景はこういう人物ですからね。

www.jejusori.net

박진경(朴珍景, 1920~1948)은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에서 태어났다. 오사카(大阪) 외국어학교를 거쳐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하여 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제주도에 주둔한 일본38군단 소속 소위였다. 그의 부친은 친일파 집단인 대정익찬회의 중요간부였다. 대정익찬회(일본어: 大政翼賛会 (たいせいよくさんかい))는 1940년(쇼와 15년) 10월 12일부터 1945년(쇼와 20년) 6월 13일까지 존재하였던 일본 제국의 관제 국민통합 단일기구이다.

박진경이 국방경비대 사령부의 인사부에서 일하다가 9연대장으로 임명된 이유는 일제시대 일본군으로 제주도에 복무한 경험이 있어서 섬의 지형과 산악요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국이 해방되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 국방경비대 인사참모를 역임하였다. 1948년 4월 3일 제주4·3이 발발하였다. 동년 5월 6일 김익렬 중령에 이어 박진경은 제9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미군정이 그를 연대장으로 임명한 이유는 사령관은 전범으로서 처형을 면키 힘든 '초토화 작전'을 충실히 수행할 연대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박진경은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 강력하고 적극적인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를 초토화진압작전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취임 1개월 만에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그는 영어에 능숙하고, 지휘력이 탁월하여 미군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제주4·3 토벌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산화한 '창군 영웅'이라는 시각과 출세를 위해 무차별 토벌을 강행한 ‘민족 반역자’라는 시각이 함께 공존한다.

박진경은 연대장 취임인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천명하였다. 그가 취한 행동은 ‘폭도와 구분이 애매하기 때문에’ 중산간 주민들을 쓸어 담다시피 체포했다. 중산간 마을을 누비고 다니면서 불과 한 달 사이에 수천 명의 ‘포로’를 양산해냈다.

그렇지만 경비대의 강경 방침에 반대하는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1948년 5월 20일 밤, 9연대 병사 41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무기와 장비, 그리고 5,600발의 탄약을 소지하고 모슬포 주둔지를 빠져나가 대정지서를 공격하고 일부는 입산하였다. 10여 명씩, 혹은 몇 명씩 병사들이 부대에서 탈출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박진경이 부임한지 한 달 열흘 만에 10대와 부녀자 그리고 노인들인 '포로'가 무려 6천여 명에 달했다. 제주도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휩쓸어버리는 작전이었다. 이 과감한 행동은 미군정의 격찬을 받았고 박진경은 대령으로 진급한다.

사건의 발단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박진경의 대령 승진 축하연이 1948년 6월 17일 요정 옥성정에서 차려져 미군 장교와 11연대 참모가 동석하였다. 그는 6월 18일 새벽1시 귀가하여 숙소에서 잠이 들었는데, 3시 15분 한방의 총성이 울려 퍼지더니 숨을 거두었다. 손석호 하사가 박진경 연대장 방 안에 숨어들어 M1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스물여덟 살 박진경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그를 죽인 이들은 3대대장 문상길 중위 이하 몇 명의 부하들이었다. 그 후 딘 군정장관은 박진경의 시신을 싣고 상경하였다. 후임 연대장으로 최경록 증령이 임명되었다.

박진경이 사망하자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를 붙잡으면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는 제보가 있었다. 암살주모자가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로 판명되고, 이 밖의 동조자로 양희천 이등상사, 신상우 일등중사, 강자규 중사, 배경용 하상 등이었다.

이들은 사형선고를 받고 1948년 9월 23일 경기도 수색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박진경의 장례식은 육군장 제1호로 기록되었다. 정부에서는 박진경을 준장으로 추서하였다. 1952년 11월 7일 제주도민 및 군경후원회 명의로 박대령순직충혼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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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에 내려온 고문관들 제일 오른쪽이 박진경 11연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