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陸軍特別志願兵・李仁錫上等兵」の話

たまたま気になって調べてみた調べ物の記録として。

目にした順番に並べておきます。

d.hatena.ne.jp

【その時の今日】日本「特別志願兵」を口実に学徒出陣させる
2010年01月20日13時10分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f:id:bluetears_osaka:20100120133819j:plain:left 1941年12月の真珠湾攻撃以降、日本帝国は破竹の勢いで東南アジア全域を手にしたが、半年ぶりの翌年6月、ミッドウェー海戦(日本側作戦名「M作戦」)をターニングポイントに破滅の道を歩みはじめた。

B29爆撃機が帝都・東京の空を襲いはじめ、米軍は日本本土に向かい戦線を狭めてきた。「賢者は宗教的信仰を守るため、神様と教祖に献身するが、我々凡夫が身を捧げるのは国のためである。今日置かれている国家の危急というときは、もはや国と自己は同体だ」。

「大東亜共栄」という名分とは異なり、明白な侵略戦争の「アジア・太平洋戦争(1931~45)」が終末へ向かっていた1943年5月。京都帝国大学の哲学教授、田辺元は「死生」という演説で、生き方ではなく死に方を語ることにより、大学生を死地に追いやった。そのとき、日本の共産主義者すらほぼ全員が転向し、戦争に協力した。

同年10月20日。窮地に追い込まれた日本は「陸軍・特別志願兵の臨時採用規則」を発布し、植民地・朝鮮(チョソン 1392~1910)の専門学校・大学の在学生や卒業者まで戦線に追い出した。各媒体を総動員して学徒兵の志願を宣伝することに必死になった。

「同じ国の同じ国民として、内地人(日本人)だけ第一線で血まみれになって活躍している。、我々半島の人も学窓で勉強ばかりしてはいられない」「李仁錫(イ・インソク)上等兵が私のように死ななかったら、今ごろ無名の農夫にしかなれなかったはずだ。無名の農夫か、勲章をいただくため一躍世の中に名を馳せた護国英霊のうち、どちらがいいだろうか」

1943年11月15日付の総督府の機関紙「毎日新報」に掲載された「学徒出陣激励・母親の座談会」で、日本と朝鮮の母親が交わした座談は、当時の実像を伝えている。

学徒兵は、志願兵という美名とは裏腹に、実像は対象者の100%志願を目ざし、各種の宣伝による懐柔や警察を前面に出した脅威を通じて強制的に動員された。朝鮮の専門大学(短大)の在学生1000人のうち959人、日本と満州の留学生2929人のうち2150人、それぞれ96%と77%に上る志願率がその強制性を雄弁する。

「あなたたちが血を流した後も、日本が韓民族に良いものを与えなくても私が血を流し戦うだろう」(李光洙「私の告白」、1942)。この地の青年に侵略戦争に加わるよう訴えた者はナショナリストだけではなかった。1943年の「京城日報」に「半島の2500万人に上る同胞に訴える」という文を掲載し、学徒兵の参加を勧めた独立運動家・呂運亨(ヨ・ウンヒョン)や小説家・李光洙(イ・グァンス)を攻撃した金明植(キム・ミョンシク)のような社会主義者らもその隊列に入っていた。民族の指導者や民衆、誰も時代の狂気から自由になれなかった時であった。

慶煕(キョンヒ)大学部大学長・許東賢(ホ・ドンヒョン、韓国近現代史

http://japanese.joins.com/article/342/125342.html

[그때 오늘] 일제, ‘특별지원병’ 구실로 대학생들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
[중앙일보] 입력 2010.01.20 02:13 수정 2010.01.20 15:29 | 종합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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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월 20일은 육군성 영(令) 제48호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에 의해 이 땅의 청년학도들이 학병으로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된 날이다. 사진은 학병 출정식 장면을 담고 있다(『한일병합사:사진으로 보는 굴욕과 저항의 근대사』, 눈빛).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제국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 전역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반년 만인 이듬해 6월 미드웨이해전을 전환점으로 파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B-29 폭격기가 제도(帝都) 도쿄의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고, 미군은 일본 본토를 향해 전선을 좁혀 왔다. “현자는 종교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과 교조를 위해 헌신하겠지만, 우리들 범부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한다. 오늘 국가 위급의 시기에 이미 국가와 나 자신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대동아공영’이란 명분과 달리 명백한 침략전쟁인 ‘아시아·태평양전쟁(1931~45)’이 종말을 향해 치닫던 1943년 5월. 교토제국대학 철학교수 다나베 하지메(田邊元)는 ‘사생(死生)’이란 제하의 연설에서 어떻게 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이야기함으로써 교토대학생들을 사지(死地)로 떠밀었다. 그때 일본의 공산주의자들조차 거의 모두 전향해 전쟁에 협력했다.

같은 해 10월 20일. 막바지에 몰린 일제는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발포해 식민지 조선의 전문학교나 대학교 재학생과 졸업자들까지 전선으로 내몰았다. 각종 매체를 총동원해 학병 지원을 선전하는 데 혈안이 됐다. “같은 나라의 같은 국민으로서 내지(일본)인만 제일선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활약하고 있는 것을 돌아볼 때 우리 반도인도 학창에서 공부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인석 상등병이 저처럼 죽지 않았으면 지금쯤이야 이름 없는 농부밖에 더 되었겠습니까? 그래 무명의 농부와 훈장을 받자옵고 일약 세상에 이름을 떨친 호국영령 어느 것이 좋겠습니까?”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 1943년 11월 15일자에 실린 ‘학도출진격려 어머니좌담회’에서 일본과 조선의 어머니가 나눈 좌담은 당시의 실상을 잘 전해 준다.

학병은 ‘지원병’이란 미명과는 달리 실상은 대상자 100% 지원을 목표로 각종 선전을 통한 회유와 경찰을 앞세운 위협을 통해 강제로 동원됐다. 조선 내 전문대학 재학생 1000명 중 959명, 일본과 만주 유학생 2929명 중 2150명, 각각 96%와 77%에 달하는 지원율이 그 강제성을 웅변한다. “그대들이 피를 흘린 뒤에도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것을 아니 주거든, 내가 내 피를 흘려 싸우마(이광수 ‘나의 고백’, 1942).” 이 땅의 청년들에게 침략전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 이는 민족주의자만이 아니었다. 1943년 ‘경성일보’에 ‘반도 2500만 동포에게 호소함’이란 격문을 실어 학병 참여를 권한 여운형이나 이광수를 공격하던 김명식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다. 민족 지도자나 민초 어느 누구도 시대의 광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그때였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http://news.joins.com/article/3975902

이인석 (군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발굴 옥천현대사 - "형님이 이용당한 것...''
일제에 의해 영웅으로 미화된 이인석 상병의 가족이 겪은 아픈 역사
이안재 기자
[691호] 승인 2003.09.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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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석 상병이 군복을 입은 모습. 매일신보 옥천지국이 64년전인 1939년 부인 유서분씨에게 기증한 것이다.

군서면 하동리 새터에서 태어난 이인석 상병은 일제에 의해 영웅으로 떠받들어진 사람이다. 1938년 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이후 중일전쟁에 동원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전사(1939년 6월22일이라고 신문 보도)했다며 일제가 영웅만들기에 나서 당시 사람들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인석 상병은 당시 일제가 준 금치훈장과 공로훈장 등 많은 훈장도 받았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 모든 신문에 큼지막하게 보도됐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는 이인석 상병이 동원되었던 지역이 나오지 않지만 매일신보는 중국 산서전투였다고 구체적인 지명까지 보도했다. 그리고 지원병 군복을 입은 이인석 상병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 한 장 가지고 있지"라며 옥천읍 삼양리에 살고 있는 이인석 상병의 부인 유서분(87)씨는 예의 사진을 내놓았다. 반듯한 얼굴에 잘생긴 외모다. 유씨는 이인석 상병과 18살 때 결혼했다. 이인석 상병은 19살. 남동생 셋, 여동생 넷 등 여덟 명의 자녀 중 맏이였다.

동생들은 공부를 못시켰지만 이인석 상병은 지금은 없어진 옥천농업실습학교(이인석 상병의 동생 이종두씨는 실습학교가 옥천읍 삼청리 지금의 은성산업이 있던 자리에 있었다고 증언한다)에 다녔다. 결혼 후에 다닌 학교였고 졸업 후에는 실습학교에서 강사 자리를 얻었다.

현재 군서면 증산리에 살고 있는 첫 딸을 낳은 후 덜컥 지원병으로 나간다고 했다. "학교 선생(동생 이종두씨는 강사라고 기억했고 부인 유씨는 선생이라고 기억했다)으로 갔는데 교장이 꼬셔서 지원병으로 갔던 거야. 말하자면 전장에 나가자마자 전사한 거지." 아흔에 가까운 나이지만 그때 일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하면서 학교 관사에 나와 있다가 지원병 나가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살았지. 하루는 일하고 고단해서 잠이 들었는데 누가 불러. 시아버님이 나갔는데 군청에서 왔나, 어디에서 사람이 와서 `이인석이 운명했다'라며 울면서 종이조각을 읽고 한참을 강연을 해. 잠자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울어보지도 못했어. 사람이 세상을 그렇게 살다 말고 갔어."

그때부터 3년이 넘게 군서면 하동리 이인석 상병의 집은 옥천 뿐 아니라 전국에서 온 순례객들로 넘쳐났다.

"어디서든 안온 데가 없었어. 선생들이 학생들 데리고 왔고, 그때는 사람은 죽었어도 이름은 안 잊어버리고 찾아온다 싶었어." 부인 유씨는 그래도 시어머니가 천지사방을 다니며 천 사람으로부터 한 뜸씩 뜬 일명 `천인침'을 남편에게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고생해 가면서 전쟁터에서 잘 있게 해달라고 천인침을 완성했는데 끝내 보내지 못한 채 전사통지서를 받았더란다. 남편이 전사함에 따라 둘째 동생의 장남을 양자로 들였다. 유씨가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이가 양자로 들인 아들이다.

동생 이종두(79)씨의 기억은 좀더 구체적이었다. 이씨는 당시 지원병으로 간 사람이 충북에서 7명, 그중 3명이 형을 포함한 옥천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강제로 지원시킨 거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뭘. 해방되고 나서 청주 반민특위(친일행위자나 친일부역자 등을 처벌하기 위해 해방후 구성한 특별기구)에서 우리를 불렀어. 조사관들이 조사해보더니 미안하다고, 옥천갈 차비는 있느냐고 묻데. 우리가 형님 덕분에 큰 부자나 됐고 하면 반민으로 몰렸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잖아."

형님이 전사한 뒤 이들 가족들은 일제 강점기 동안 전국에서 온 부의금 등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만주좁쌀을 팔아 순례한다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점심이라도 줄 수 있었다.

"형님 전사한 뒤 처음에는 월전리에 묘소가 있었어요. 그후에 고향 뒷산을 내가 사서 모시게 된 거지. 일본놈들이 더 열심이었어. 영웅이라 순례해야 한다고. 어머니는 형님 전사하고 6개월을 찬물만 마시고 살았는걸."

이씨는 고향인 하동리 새터와 가까운 이웃 상중리 신대마을에 살고 있지만 옛 집터는 잘 가지 않는다.행랑채는 이미 허물어졌고 페허가 되어 있는 집을 보기에도 그렇거니와 형제들이 오르내리며 감을 따먹던 집 울타리의 감나무 두 그루가 당시의 기억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일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그 자신 기구한 삶을 살아온 이씨는 지금 `혈액순환부전증'이라는 병을 얻어 3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참전자에게 주어지는 6만여원의 연금과 노인연금, 국민기초생활수급자에게 주어지는 10여만원 등 20만원이 채 되지 않는 돈으로 한 달을 살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이인석 상병이 남기고 간 일가족의 상흔을 느낄 수 있다.

이인석 묘, 아직도 일제때 세운 상석이 여전히
일본연호·일제 공훈등급 그대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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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지원병 최초 전사자 이인석 상병의 묘에는 아직 일제때 세운 상석이 그대로 있다. 상석에는 〈훈8등공7급 고 육군상등병 이인석지묘-소화 19년 7월7일(勳八等功七級 故 陸軍上等兵 李仁錫之墓-昭和 十九年 七月七日)〉로 표기되어 있다.

공훈 등급이 8등과 7급이라는 말은 일제의 기준으로 이인석 상병의 공훈을 설정해 부여한 것이다. 일제가 연호로 썼던 소화 19년이면 1944년이다. 이인석 상병이 전사한 뒤 5년이 지난 해이다.

문제는 일제에 의해 수여된 공훈등급이 표기된 상석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상석을 세운 시기를 나타낸 일본 연호 역시 마찬가지로 일제의 잔재이다.

이인석 상병은 일제의 영웅, 또는 친일파가 아닌 최대의 피해자였다. 상석을 없애지는 않더라도 당시 상황을 설명할 비석을 세우거나 하는 방법으로 비록 지하에서나마 한스러웠을 일제 지원병 굴레를 벗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영웅만들기에 골몰했던 군수 등 일제 앞잡이들이 만들어놓은 이인석 상병의 상석에 아직도 드리우고 있는 일제의 망령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인석 전사, 반도인 영예로 미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물론 조선·동아도 `지원병의 꽃'으로 찬양

■ 「지원병 이인석군/ 최초로 영예의 전사/ 적진 중으로 돌입 분투」-조선일보
■ 「지원병 최초의 꽃/ 옥천출신 일등병 이인석군 전사!/ 조선인지원병의 영예」-동아일보
■ 「반도인의 영예/ 지원병 최초의 전사/ 충북 옥천출신의 이인석군」-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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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석 상병의 전사 사실을 미화해 보도했던 동아, 매일신보, 조선일보.(오른쪽부터)

위 기사는 1939년 7월8일 국내에서 발행된 각 신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대륙 침략을 시작한 이후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광분한다.

1930년대 이후 조선을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의 구실을 강제해 인력과 물자를 전쟁터로 내몰았고 `내선일체', `일선융합' 등 조선인과 일본인은 하나라는 구호로 민족말살과 황민화정책을 강행했다.

1937년부터는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강요했고 1938년에는 학교의 조선어과를 폐지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으며 `육군지원병제도'를 실시했다. 1939년에는 창씨개명제도를 실시해 조선인의 성명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 기간, 언론은 물론 문인과 음악가, 미술인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친일 지식인들이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강연을 다녔고 일제는 이를 활용해 `영웅만들기'에 나섰다.

그 하나의 예가 이인석 상병의 사례이다. 이인석 상병이 1939년 중일전쟁 과정에서 조선인 지원병 가운데 첫 전사자라는 점을 일제는 놓치지 않았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물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이르기까지 언론은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이들 세 신문은 모두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을 4단 기사로 처리했다.

조선이나 동아일보의 보도보다는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이 더 구체적이다.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을 미화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쓴 흔적이 바로 신문 기사이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이인석 상병의 죽음은 일제 통치를 합리화하고 전쟁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쓰여진 것이다.

http://www.ok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592

m.blog.daum.net

www.ohmynews.com

http://iss.ndl.go.jp/books/R100000002-I0000006912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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