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郷新聞特集「消える現場、忘れられる記憶」(2):「4.19」とその「地方支店」

京郷新聞の特集「消える現場、忘れられる記憶」の連載2回目のテーマは「4.19」革命のよう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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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だ、ここに出てくるのは「4.19」ではなく、「2.28」「3.8」「3.15」です。それぞれ、2.28は大邱、3.8は大田、3.15は馬山で、1960年当時の李承晩政権打倒の運動が次々と発生した日付であり、それらの連続発生が4月の李承晩退陣につながったわけです。

そうした歴史は、知られていないわけではないものの、それらの運動にゆかりのある場所の保存や記念施設の整備状況はまちまちであり、その主体もバラバラで、公的な関与が不足している。この記事の指摘はまあ、だいたいそんなところです。

大邱や大田や昌原の市民はそれらの運動を記念するために生きてきたわけでもないので、そのこと自体に是非はないわけですけど、今後どうするか、というのは確かにいま議論すべき問題です。70周年を機会に、記念事業主体を統一したり、地方自治体・政府の関与を増やしたりしていくというのも、一つの方向性ではあります。

過去の参照例となるのは、例えば国立民主墓地でしょうね。いずれも非政府的な主体が築いた墓地を母体として、民主化後に形成されたものです。

[사라진 현장, 잊혀진 기억](2)혁명 발원지엔 노래방이…빈약한 기념시설, 관리마저 제각각
김정훈·박태우·이종섭·권기정 기자
입력 : 2020.04.24 06:00 수정 : 2020.04.24 09:57

민주화 성지, 초라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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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15일 밤 마산시민들이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무학초등학교 앞에 집결했다. 이들은 시청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마산 3·15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3·15의거기념사업회가 2014년 10월 총격 현장을 복원해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김정훈 기자

“3·15 선거 무효” 처음 외쳤던 옛 민주당 마산시 당사엔 동판 표지판만
창원시, 60년이 흐른 올해 45억 들여 ‘의거 상징공간’으로 조성
유일하게 지방문화재 지정된 중앙동 부두도 추모의벽·벽화가 전부

대구 2·28민주운동 기념시설 여기저기 분산…시 청사에 이전 검토
잊혀졌던 대전 3·8민주의거는 기념탑 장소도 상징성 없는 곳에
2023년 개관 목표 기념관 건립 추진…“정부 예산 지원·관리 필요”

“4·19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혁명이 아니다. 1960년 2월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먼저 독재타도를 외치며 정의의 횃불을 들었다. 3월8일 대전의 학생들이 민주와 자유의 깃발로 호응했고, 기어코 3·15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마산의 고등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의거를 일으켰다.” 지난 19일 문재인 대통령의 제60주년 4·19혁명 기념사 중 일부이다. 취임 후 처음으로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4·19혁명의 정신을 인류에게 남기기 위해 4·19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대구 2·28민주운동과 대전 3·8민주의거, 마산 3·15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두 세대도 지나지 않았지만, 저항정신과 이를 기억하는 역사현장은 잊혀가고 있다. 이들 지역에는 당시 상황을 알리는 표지판이나 조형물 등만 남아 있어 전문가들은 정부 차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 상징공간 빈약한 3·15의거 민주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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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시 마산 3·15의거 등 마산 민주운동 유적지 중 유일하게 국가보훈처가 관리하고 있는 국립 3·15민주묘역. 김정훈 기자

지난 21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의거리.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3·15의거 발원지인 옛 민주당 마산시 당사 건물(당시 2층 목조)을 탐방하러 이곳저곳 둘러봤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인근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한 주민은 “노래방과 식당이라고 적혀 있는 저기 있는 건물”이라며 “역사적인 건물이라는 의미를 담은 조형물은 없다”고 했다. 지하 1층, 지상 5층짜리로 바뀐 현 건물 바닥에는 2005년 3월 설치된 지름 1m가량의 ‘3·15의거 발원지’라는 동판 표지만이 역사적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당시 민주당원들이 ‘선거 부인’ 공고문을 게재하고 선거무효를 외치며 당사 밖으로 나와 시민들과 시위를 시작한 곳이다. 창원시는 60년이 흐른 시점인 올해 45억원을 들여 옛 민주당 당사를 3·15의거 발원지와 관련한 상징공간으로 조성하고 있다.

인근 마산합포구 무학초등학교에 있는 담장. 3월15일 밤 시내 곳곳에서 시위대들이 무학초교 앞 도로에 집결해 목표인 시청으로 가려 하자 경찰이 시위 군중을 향해 무차별 실탄 사격을 가한 곳이다. 2014년 10월 (사)3·15의거기념사업회가 총격현장을 복원해 놓았다. 마산합포구 마산의료원 입구에도 2011년 설치한 4·19혁명 진원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하나 있다. 인근 주차장을 운영하는 김모씨(52)는 “국립3·15민주묘지는 알아도 4·19혁명 진원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마산의료원은 4·19혁명 진원지이다. 마산의료원은 3·15의거에 이어 그해 4월11일 제2차 마산의거가 시작된 곳이다. 당시 4월11일 오전 11시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합포구 중앙부두 앞에 떠올랐고, 시신은 마산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으로 옮겨졌다. 김주열의 죽음과 시신을 확인하려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그의 죽음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중앙동 부두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에서도 민주성지에 걸맞은 시설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경남도는 2011년 9월 이곳 부두 2003㎡를 ‘경남도 기념물 제277호’로 지정했다. 한국 민주화운동 관련 장소 중 유일하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에 있는 것은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 지점, 4월 혁명이 시작된 곳’이라고 알리는 동판과 표지판, ‘추모의 벽’, 벽화 등이 전부다.

마산 지역의 민주운동 관련 주요 유적지는 14곳이다. 유적지 중 1968년 조성돼 2002년 국립시설로 승격된 국립3·15민주묘역은 국가보훈처가 관리한다. 나머지는 (사)3·15의거기념사업회, (사)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4·19민주혁명회 경남지부 등 8개 민주화단체와 창원시가 관리하고 있다. 민주화단체와 창원시는 2017년부터 민주화 유적지들을 찾아가는 ‘민주성지 탐방로’ 2개 코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교육·탐방 콘텐츠와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 2·28민주운동 기념시설 관리 제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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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공평동에 들어선 2·28기념중앙공원.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대구 지역에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구 2·28민주운동을 기리는 기념시설이 곳곳에 조성돼 있다. 하지만 기념회관과 기념탑, 도서관 등이 흩어져 있는 데다 관리 주체도 제각각이다. 대구에서는 1960년 2월28일 고등학생들이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맞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당시 경북고·대구고 등 대구 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 2200여명이 중앙로와 반월당 등지에서 시위를 벌이다 2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대구에서는 당시 학생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28 명칭을 붙인 기념탑, 기념회관, 공원, 도서관 등을 잇따라 조성했다. 일부 시설은 규모가 협소하고 접근성이 떨어져 대구 시민들조차 이용을 꺼리는 실정이다. 대구 중구의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2·28민주운동기념회관은 강의실이 부족하고 대강당이 없어 수년 전부터 리모델링과 신축 이전 등이 제기되고 있다. 또 기념회관이 주택가에 들어서 주차난 등으로 시민들이 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념시설물 관리도 제각각이다. 중구 남산동의 기념회관은 (사)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가, 달서구 두류동의 2·28민주운동기념탑은 대구시가 각각 관리하고 있다. 또 중구 공평동 2·28민주운동기념중앙공원은 대구시설공단이, 동구 신암동의 2·28기념학생도서관은 대구시교육청이 맡고 있다.

2·28기념사업회 측은 유기적인 업무추진과 효율적인 운영 등을 위해서는 관련 시설물을 한곳에 모아 관리해야 한다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백재호 2·28기념사업회 기획홍보국장은 “2025년 대구시 신청사 건립에 맞춰 대구정신을 상징하는 2·28민주운동과 국채보상운동 기념시설물 등을 청사 내 별도 공간에 이전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면서 “시청을 드나드는 시민들이 그곳에서 자연스레 대구정신을 익히는 산교육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 오래동안 잊혀졌던 대전 3·8민주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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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둔지미공원 내 3·8민주의거기념탑.

대전 3·8민주의거도 4·19혁명의 기폭제로 평가되는 사건이다. 앞서 대구 2·28민주운동이 일어난 이후 대전 지역 고교생들이 자유당 독재를 규탄하는 연합시위를 계획하다 3월8일 대전고 학생 1000여명이 먼저 ‘학원 자유 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자 지역 민주화운동의 효시로도 평가되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오랫동안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3·8민주의거의 역사적 의미가 재조명된 건 최근의 일이다. 4·19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으로 평가돼온 3·15의거와 달리 3·8민주의거는 지역에서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기록되지 못한 역사로 남아 있었다. 50년 세월을 훌쩍 넘겨서야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국가기념일 지정 운동이 추진됐고, 2018년 11월 관련 사건 가운데 가장 늦게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를 만들었다.

대전 3·8민주의거는 오랜 시간 뚜렷한 조명을 받지 못하면서 제대로 기억하고 기념할 공간도 남기지 못했다. 올해 60주년을 맞아 3·8민주의거 시발점이었던 대전고에서 원동네거리까지 1.15㎞ 구간이 ‘3·8민주로’로 명명되고 명판과 안내판이 설치되기 전까지 3·8을 기념하는 시설은 2006년 서구 둔지미공원에 건립된 기념탑과 2013년 대전고 교정에 세워진 기념비 정도였다.

유일한 기념시설이었던 3·8민주의거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곳은 역사적으로 3·8민주의거와 관련성이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25m 높이의 이 기념탑은 건립 당시 3·8민주의거 발원지인 중구 일대에 마땅한 장소가 없어 지금의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 인해 3·8민주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이후에는 역사적 상징성 등을 고려해 기념탑을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역사적 관련성이나 상징성이 떨어지는 장소에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보니 이에 대한 시민 인식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기념탑이 있는 둔지미공원은 평소 산책을 하는 시민들이 자주 찾는 장소지만 기념탑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시민은 많지 않다. 지난해에는 공원 이름도 ‘3·8의거둔지미공원’으로 변경됐지만 이 역시 시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나마 올해는 60주년을 맞아 대전시와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에서 다양한 기념사업과 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하고 있다. 2023년 개관을 목표로 3·8민주의거기념관 건립이 추진 중이다. 창원시 등 지방자치단체와 민주화단체 관계자들은 “민주운동 관련 콘텐츠 개발 및 유지, 관리·보수를 지자체나 단체가 주도하기에는 예산 확보 등 물리적 한계가 있다”며 “정부 차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생들 모금으로 세운 부산대 교정의 ‘부마민중항쟁탑’…시민들은 존재 자체도 잘 몰라

6월항쟁은 기억현장 사실상 전무

독재에 저항한 1979년 10월 부마항쟁과 1987년 6월항쟁 현장도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부마항쟁의 경우 발원지인 부산대·경남대와 창원시가 관련 조형물과 상징 건물을 단순 관리하는 수준이다. 부마항쟁기념사업회 등에서 매년 기념행사와 학술회의를 개최하면서 방문하고 있다. 대학생이 아닌 일반 시민들은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부산대 교정에는 새벽벌도서관(옛 제2도서관) 앞에 10·16부마민중항쟁탑이 있다. 1988년 총학생회가 모금운동을 펼쳐 건립했다. 건설관(옛 도서관)에는 부마민주항쟁 발원지 표지석이 있다. 1979년 10월16일 오전 첫 집회가 열린 곳이다. 1999년 고 신영복 선생이 ‘민주주의 신새벽 여기서 시작하다’라고 쓴 표지석이 세워졌다. 기념관도 있다. 부산대는 2005년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옛 효원회관을 새 단장하고 ‘10·16기념관’으로 명명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은 2019년 항쟁 40주년을 맞아 자연과학관(옛 상과대) 옆에 기념 표석을 세웠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대 상과대 학생들이 유인물을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창원 마산합포구 해운동 서항공원에는 부마민주항쟁 상징조형물이 있다. 부마항쟁정신계승위원회가 20주년을 기념해 1999년에 세웠다. 경남대 교정에는 부마민주항쟁 시원석이 세워져 있다. 경남대생은 1979년 10월18일 당시 도서관 건물 앞에서 반유신독재 시위를 시작했다. 2009년 경남대 동문공동체에서 교정 내 월영지(연못) 부근에 시원석을 세웠다.

6월항쟁은 기억현장이 없다시피 하다. 국가폭력의 현장이었던 옛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정도다. 1976년 지어진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일반인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위장 간판을 내걸었다. 1980년 기자협회 집단구속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삼척·김제 고정간첩단사건, 1985년 민청련·민추위사건, 1986년 보도지침사건 등에서 민주화 인사와 일반 시민에게 고문과 가혹 행위를 저질렀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그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6월10일 6월항쟁 기념사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국민과 나누기 위해 이곳에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대공분실은 그 해 경찰청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운영·관리주체가 바뀌었고 2022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정식 개관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4240600015&code=620116

ちなみに、記事の後半には、1979年の「釜馬民主抗争」と1987年の「6月民主抗争」の話が挿入されています。これはこれで単独で取り上げる価値のある題材ですけど、この特集自体が「4.19」と「5.18」をテーマに設定してるために、ここにねじ込んだんですかね…。どっちもいずれは同じように保存と記念の念の問題が改めて提起されるだろうと予想してい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