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年前、寒い冬のこの日に起きた拷問致死事件が、半年後の6月抗争に向けての大きなきっかけとなったわけです。
このニュースについては、両極の「朝鮮日報」と「ハンギョレ」、そして「ソウル新聞」の記事をクリップしておくとしましょうか。
記事入力 : 2012/01/16 11:21
朴鍾哲さん拷問致死から25年、追悼式しめやかに1987年1月に警察による水拷問で死亡し、同年に「6月民主抗争」が起こるきっかけとなった朴鍾哲(パク・ジョンチョル)さんの25周忌追悼式が14日、朴さんが死亡したかつての警察庁南営洞対共分室(現・警察庁人権保護センター)で行われた。
民主烈士・朴鍾哲記念事業会(アン・スンギル会長)らが主催したこの日の追悼式には、遺族をはじめ故人の友人、先輩・後輩など150人余りが出席。当時、拷問致死の隠蔽(いんぺい)を暴露するという決定的な役割を果たしたイ・ブヨン元議員、アン・ユ元・永登浦刑務所保安係長、ハン・ジェドン刑務官も出席した。
アン・スンギル会長は「警察の無慈悲な拷問と戦った烈士の痛ましい死は、国民の怒りを呼び覚まし、6月民主抗争の導火線の役割を果たした」と当時を振り返った。
出席者たちは『あの日が来たら』を合唱して追悼式を終えると、故人が死亡した509号調査室で献花・焼香した後、朴鍾哲記念館を見学した。
朴鍾哲さんはソウル大言語学科に在学していた1987年1月13日「ソウル大民主化推進委員会事件」に関わったとして、南営洞にあった対共分室に強制連行され、拷問を受けて翌日に死亡した。検察は当時「『トン』とたたいたら『うっ』と言って死んでしまった」と発表したが、拷問による死だったことが明らかになり、これを機に民主抗争への動きが本格化した。
アン・ジュンホ記者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2/01/16/2012011601278.html
25년의 침묵, 또 한번의 용기
[한겨레] 이경미 기자
등록 : 20120115 20:34 | 수정 : 20120115 22:52
박종철 사망 조작 알린 안유·한재동 전 교도관 25년만에 추도식 참석
“어쨌든 가해집단 일원 모습 드러낼 수 없었다”
» 서울 용산구 갈월동의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지난 14일 열린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가운데)이 안유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왼쪽)과 한재동 전 교도관을 소개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 교도관 2명이 25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14일 서울 용산구 갈월동의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 이 자리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 사실을 처음 제보한 안유(68)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과 이를 바깥에 알린 한재동(65) 전 교도관이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함께 참석했다.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씨가 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박씨를 고문한 경찰관 조아무개씨와 강아무개씨는 사흘 뒤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다. 당시 안 계장은 대공분실 간부들이 구속된 두 경찰관을 수차례 면회하는 자리에 참관했다. 간부들은 사건을 은폐·축소하려고 이들을 회유·협박했다. 그 과정에서 고문 가담 경찰관이 더 있다는 사실 등 고문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안 계장은 당시 같은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사무처장은 이 내용을 편지로 적어 수감생활 도중 가깝게 지내게 된 한재동 교도관에게 전달했고, 이 편지는 여러 사람을 거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됐다. 사제단이 그해 5월18일 명동성당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한달 뒤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2010년 8월 안 전 계장의 후배인 황용희 교도관의 수기 <가시울타리의 증언>이 발간되면서 이런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지만,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길 꺼렸다. 진실을 알린 용기있는 일을 했지만, 박종철의 죽음 앞에서는 내내 겸손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결국 25년 만에 사람들 앞에 선 안 전 계장은 “저 역시 군사독재정권의 주구·하수인·사냥개 소리를 듣던 가해 집단의 일원이어서 가슴 아팠다”며 “그동안 저 자신을 드러낼 수 없던 점을 깊이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엉뚱한 학생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고 사건을 은폐·조작하려는 데 분통이 터졌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담은 편지를 목숨 걸고 바깥으로 전달한 한 전 교도관도 “30년 이상 교도관으로 살면서 그때가 가장 뜻깊었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1970년대부터 이른바 ‘민주 교도관’으로 불리며 민주화운동가들과 잘 알고 지낸 한 전 교도관은 “25년이 지났지만 군사독재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다”며 “우리가 세상에 알린 진실이 의미있게 되도록 올해는 군사독재의 잔재가 완전히 극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832.html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 옛 남영동 대공분실서 150명 참석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한 박종철씨의 25주기 추도식이 14일 박씨가 고문으로 숨진 옛 경찰청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인권보호센터)에서 열렸다.
▲ 지난 14일 오후 서울 갈월동 경찰청인권보호센터(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씨 25주기 추도식에서 안유 사건 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추도식에는 민주열사 박종철기념사업회장인 안승길 신부, 박씨의 아버지 박정기씨,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박씨의 동료와 선후배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안 신부는 추도사에서 “박 열사는 신의와 약속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 의로운 투사였다.”면서 “각박한 세상에 철저하게 이웃을 사랑했던 열사의 정신이 올해 크게 일어나 우리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백 소장은 자신이 지은 ‘그게 바로 너였구나’라는 제목의 추모시를 낭독했다. 참석자들은 인권센터 앞에 마련된 야외 행사장에서 묵념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했다. 추도식 사회는 박씨의 고교와 대학 선배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맡았다. 행사에는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사건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안유 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한재동 교도관과 자리를 함께해 눈길을 끌었다. 참석자들은 2시간 남짓 진행된 행사를 마친 뒤 박씨가 고문을 받았던 509호 조사실로 올라가 헌화하고 인권보호센터 4층에 있는 박종철기념관을 찾았다.
기념사업회는 박종철 인권장학금과 모교인 부산 혜광고교생들에게 지급하던 장학금을 통합, 올해부터 민주화운동 유자녀들과 형편이 어려운 학생 운동가를 지원하는 ‘박종철 장학사업’으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박씨는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 13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주요 수배자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받다 다음 날 사망했다.
백민경기자
2012-01-16 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