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阪と九州を結ぶ九州新幹線10年

九州、特に熊本・鹿児島方面に行くときに九州新幹線はしばしば乗ってきました。いやそれはもう、前線開通前と後では、大阪からの距離感が全く違いますよ。時短効果もさることながら、新大阪駅から熊本駅鹿児島中央駅に直行できる「みずほ」「さくら」の存在、その直通効果はものすごく大きいと思います。

いっぽう、飛行機も使いますけど、これは空港へのアプローチの時間を込みにしての所要時間や乗り換えの手間を考えると、新幹線といい勝負なんですね。飛行機の優位性が高まる新大阪以遠の地域を切り離し、新幹線でも乗り換えを必要とすることに割り切った「新大阪発着」という九州新幹線の設定が絶妙なんだと思います。

九州新幹線10年、航空機と二分 熊本ー大阪、時短効果で利用伸ばす
熊本日日新聞 | 03月01日 07:50

f:id:bluetears_osaka:20210302100009j:plain
多くの鉄道ファンに見送られて出発する新大阪行きの一番列車「さくら」(手前)=2011年3月12日、熊本市西区のJR熊本駅

 九州新幹線鹿児島ルート(博多-鹿児島中央)が全線開業して12日で10年を迎える。同時に新大阪までの山陽新幹線との相互乗り入れもスタート。それによる時間短縮効果もあって、熊本と大阪の間を移動する際の新幹線利用者が増え、航空機の利用割合とほぼきっ抗する状況になっていることが熊本日日新聞の分析で分かった。

 国土交通省の旅客地域流動調査や九州運輸局の統計データを基に、熊本と大阪をそれぞれ発着地として移動した人の数などを分析した。

 それによると、JR(新幹線と在来線の合算)と航空機を合わせた2010年度の輸送人員は72万人だったのが、データが最も新しい18年度には99万2千人と37・7%増加。移動時間の短縮効果や移動手段の多様化で往来する人の“パイ”が拡大した格好だ。

 移動手段の比率をみると、10年度は航空機が73・3%を占めていたのに対し、18年度は50・9%に低下。その分、新幹線利用の割合が増え、両地域の移動において航空機と二分する状態になっている。ただ“パイ”の拡大で、航空機の輸送人員の落ち込みは10年度に比べて2万3千人程度にとどまっている。

 また大阪以外の主要都市間のJRの輸送人員(18年度)は、熊本-広島が10年度比2・1倍の21万6千人、熊本-岡山が同2・2倍の9万7千人と、いずれも大きく伸びた。

 熊本-福岡も584万人と1・4倍に拡大した。一方、熊本-福岡の高速バスの輸送人員をみると、18年度は149万人で10年度比18・4%増。全線開業以降もおおむね年間140万~150万人を維持しており、すみ分けが図られている印象だ。(中原功一朗)

f:id:bluetears_osaka:20210302100104j:plain

◆直通運転 効果大きく

 この10年間で県内から大阪以西の都市間移動の際に存在感を増した新幹線。県内の関係者は九州新幹線が九州域内だけを行き来する“ローカル新幹線”ではなく、新大阪まで直通運転をするようになった効果が大きかったと指摘する。

 「熊本から乗り換えなしに関西や中国地方に新幹線で行ける。県民に心理的な近さを感じさせる効果があった」。交通政策に詳しい坂本正・熊本学園大シニア客員教授(73)は分析する。

 JR西日本大阪市)によると、熊本-大阪のJR利用のほぼ100%が新幹線。熊本-新大阪の所要時間は最速2時間57分と全線開業前に比べて1時間短縮しており、同区間について「全線開業直後、乗客数は開業前の3割増になり、その後も堅調に推移している」と話す。

 新大阪への直通運転は県内経済界有志の呼び掛けがきっかけだった。当初は博多での全面乗り換えが計画されていたが、利便性の向上を目指して誘致運動を展開。国会議員らを巻き込んでJR側に東京や大阪への乗り入れを働き掛けた。

 当時、発起人の一人として奔走した熊本第一信用金庫の森本孝会長(86)は「直通運転の実現で福岡はもちろん、大阪が近くなり、観光客が増加。新幹線が日本の地図を小さくした」。前熊本商工会議所会頭の田川憲生さん(73)=ホテル日航熊本最高顧問=も「九州新幹線が博多止まりだったら、従来の特急とあまり変わらなかった」と指摘。新大阪までの直通運転で「西日本と九州を結ぶ大動脈が出来上がった」と強調する。(中原功一朗)

https://kumanichi.com/news/id129199

高陽・金井窟の慰霊事業をめぐるフォローアップ・2:取り組む人々

金井窟の慰霊事業をめぐって、今なお事態の解決を阻む「葛藤」について、簡単に振り返りました。

blue-black-osaka.hatenablog.com

私としては、そうであったとしても、最終的には慰霊施設は建設されねばならないし、されることになるだろう、と考えています。この虐殺事件が過去から掘り起こされ、周知のものとなった以上、これを隠蔽・抑圧して済ませることは難しいと考えるからです。

もちろん、「何をどこまで」という問題は政治的なものとしてあります。なので、政治の場では今後も議論になるでしょう。ただ、無視できるわけではない。

www.nocutnews.co.kr

とりわけ、金井窟をはじめとする朝鮮戦争時の民間人虐殺事件については、多くの事例の実態が既に明らかにされています。政府委員会でその真相究明に尽力し、その後も多くの著書を刊行しているシンギチョル・金井窟人権平和財団研究所長の存在も、無視はできないでしょう。

gjpeace.or.kr

blue-black-osaka.hatenablog.com
blue-black-osaka.hatenablog.com
blue-black-osaka.hatenablog.com

www.kyobobook.co.kr

문화
[인터뷰] ‘전쟁의 그늘’ 펴낸 신기철 소장··· 민간인 학살을 승전으로 왜곡한 역사
권종술 기자
발행 2020-12-15 10:18:18
수정 2020-12-15 10:18:18

f:id:bluetears_osaka:20170831153738j:plain
고양 일산서구 금정굴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권종술 기자

“지금 전국의 한국전쟁 기념시설을 찾아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범죄의 현장에 승전비를 세웠다. 이곳 아산의 민간인 학살도 가해자들에겐 여전히 공적으로 되어 있다.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민간 차원에서도 역사를 다시 재구성해 평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시기다.”

지난 2019년 5월, 충남 아산서 열린 민간인 학살 유골 발굴 개토제 현장에서 만난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은 전쟁 승리로 기록된 역사의 뒷면을 파헤치고 있었다. 신 소장은 경찰과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와 전국 각지에 세워진 승전비와 기념관엔 승리한 전투로 왜곡된 채 기록돼 있다면서 이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성과를 ‘전쟁의 그늘’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f:id:bluetears_osaka:20201118110939j:plain
책 ‘전쟁의 그늘’ⓒ인권평화연구소

신 소장은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 온,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고양에서 벌어진 금정굴 사건을 접한 이후 사건 진상규명과 함께 전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해 왔다. 그는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일했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마친 지금도 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는 그동안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멈춘 시간 1950’, ‘전쟁범죄’, 국민은 적이 아니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한다’,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 등 10권 넘는 책을 출간하며 한국전쟁 과정에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진실을 다뤄왔다. 이 중 한국전쟁 전후로 학살당한 민간인 1만4천343명의 명단을 수록한 책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시상하는 제12회 임종국상 학술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10권 넘는 책을 쓰며 추적해 온
민간인 학살의 진실

그가 이렇게 10권이 넘는 책을 쓰면서까지 한국전쟁, 그 가운데서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파헤치게 계기는 무엇일까?

“진실화해위원회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의 활동 기록은 그 기관의 활동이 멈추면 모두 국가기록원으로 사라지게 된다. 일제 하 강제동원 조사나 친일파 조사, 의문사 조사, 친일재산 환수 조사 등의 기록은 그때뿐이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그동안 무엇을 했길래 다시 원점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일까? 지금 가동되고 있는 사회적참사조사위원회나 5.18진상조사위원회에서도 여전히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제가 몸 담았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조사부터 평가와 반성, 성과의 확대 작업이 필요함을 느낀다. 저는 개별 피해를 넘어 지역과 더 나아가 전국적 사건의 해석, 세계적 공통점 비교 분석까지 계속해 나갈 생각이었고, 역사적 진실에 대한 평가도 중대한 목표였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오랜 기간 민간인 학살을 추적해온 그였지만 ‘전쟁의 그늘’을 출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려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밝혀내기도 어렵지만, 승전으로 기록된 역사를 뒤집어 그것이 학살이었음을 밝혀내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국가보안법과 분단체제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에선 ‘이적(利敵)’이란 공격이 언제 날아들지 모를 위태로운 연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이 될까봐…….
청년은 물론 어린이, 여성, 노인까지 학살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신 소장이 연구를 진행하고, 책으로 출간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가해자인 경찰과 국군이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연구를 하며 당시 학살이 적을 제거하는 전투행위처럼 벌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고양 금정굴 사건의 경우도 전쟁 시기 발생한 전투의 하나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저는 ‘1950년 10월이면 전선이 북쪽으로 훨씬 넘어가는데 뭔 헛소리야’라고 주장했고, 민간인 학살을 부수적 피해의 하나로 돌리려는 책임 회피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역을 확대하면서 보니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0년 7월 집중되었던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남은 청년들이 적이 될까봐 우려해서 저지른 대량 학살이었고, 1.4후퇴 시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어린이, 여성, 노인들을 집중적으로 학살한 사건들이 발견되었다. 가해자들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미래의 적을 제거하는 행위로 인식했던 것이다.”

f:id:bluetears_osaka:20210302103222j:plain
2018년 8월 진행된 충남 아산시 배방면 설화산 민간인 학살 피해자 발굴 현장 모습. 흙더미속에서 세상밖으로 나오는 민간인피학살자.ⓒ구자환 기자

또, 정확한 학살자 규모를 파악하고자 하는 차원의 연구이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자는 100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이 많았지만, 실제 확인되는 기록은 이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국방부가 쓴 ‘한국전쟁사 4권’ 760쪽에는 이승만 정부 당시 비상경비사령부가 1950년 6월부터 10월 사이 106만 명의 민간인이 피살되었다고 발표한 내용이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기에, 100만 명 넘게 학살됐다는 주장이 거짓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왜 확인이 되지는 않는 것일까?

“‘한국전쟁사’가 말하는 ‘적’, ‘인민군’은
민간인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사’와 각종 기록, 현장 증언 등을 종합한 신 소장의 결론은 학살이 전투로 뒤바뀌어 기록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먼저 토벌 작전(1950년 9월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남한에 고립된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의 피해에 대한 기록을 봤다. 예상했던 것에 대부분 일치했다. 비무장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인데 노획물은 소총 몇 자루에 기관총까지 등장했다. 전투로 위장했던 것이다. 제가 최근 직접 조사한 사례는 곡성이었다. 화려한 전쟁 공원으로 보아 대단한 전투가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주민들의 증언은 달랐다. 과장되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f:id:bluetears_osaka:20190515141529j:plain
상주 화령장 전투를 기념하는 화령전승기념관. 상주 화령장 전투는 남하하는 인민군에 큰 타격을 입힌 중대한 전투였다고 한국전쟁사 등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철 소장은 이런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신기철

심지어 인민군 주력 부대와의 전투로 기록된 것 중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전투로 둔갑시킨 사례가 많았다고 신 소장은 말했다. 그 대표적 사례로 그는 가장 유명한 전투로 손꼽히는 화령장 전투, 낙동강 전선의 전투, 인천상륙작전 등을 꼽았다.

“화령장 전투에는 패잔 인민군을 소탕한다면서 사살한 마을 주민들이 확인되었다. 전투 역시 일방적으로 우마차를 공격한 것이어서, 이를 전투라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낙동강 전선의 전투는 실제 피란민의 죽음이 더 많았다. 너비 7~8 키로미터의 주민 거주지를 소개했으니 해당 지역 주민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것이라며 영흥도와 덕적군도에서 벌어진 섬 주민 학살 사건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인민군도 없었고 인민위원회라 해봤자 한 달이나 있었는지 의문스러운 지역이었다. 그리고 수시로 해군 첩보부대들이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사는 총살당한 섬 주민들을 ‘적’으로 만들어놨다. ‘한국전쟁사’가 말하는 ‘적’, ‘인민군’은 민간인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피란민과 민간인이 인민군으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인민군 범죄로 둔갑···….
“전쟁이라기보다 학살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 책에서 신 소장은 여러 사례와 각 지역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다. 앞서 소개했듯이 피난민, 주민 등이 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충북 영동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처럼 미군이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잠입했다며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살해한 것을 ‘한국전쟁사’는 인민군이 지뢰지대를 통과하면서 피란민을 앞세워 지뢰를 제거하려 했던 행위로 왜곡했다. 하지만, 1999년 AP통신의 보도로 인해 학살의 진실이 세계에 알려졌고, 인민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임이 밝혀졌다.

아울러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도 다뤘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의 북진 이후 후퇴하던 12월 초까지 이북 지역에선 민간인 학살, 폭격 등에 의한 인명 피해(부상자 포함) 등으로 268만 명이 고통을 겪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건은 신천 학살 사건이다. 미 1군단 24사단 19연대가 진입하면서 벌어진 이 사건의 피해자는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3만 5천 명이 넘는다. 당시 신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피해였다.

f:id:bluetears_osaka:20200814223849j:plain
신천 학살과 관련한 유물들ⓒ기타

이런 사건들은 한국전쟁의 성격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은 민간인 피해가 군인들의 사상과 비교해 훨씬 많았던 전쟁이었다.

“전체 한국전쟁 피해자 600만 명 가운데 민간인은 350만 명에 이른다. 부상자까지 포함한 통계지만 사망자과 실종자만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여기에 전쟁 초기 8개월만 비교하면 더욱 큰 차이를 보인다. 남한 지역의 경우 국군 피해 8~9만 명에 민간인 피해가 100만 명을 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민간인 학살 사례는 국민보도연맹 사건, 형무소 재소자 사건, 후퇴하는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 수복 후 부역 혐의 사건, 미군 폭격 사건, 1.4후퇴 시기 예비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다. 이는 전쟁이라기보다 학살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승만 정부의 태도만 본다면 친위 쿠데타라고 봐도 될 것이다.”

학살이 전공으로 뒤바뀌면서 학살 가해자에게 훈장이 내려지기도 했고, 국립묘지에도 안장됐다. 이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아직 갈 길이 멀다.

“학살이 전투로 둔갑되었다는 주장은 아직까지 저만 하는 것 같다. 국방부가 스스로 알아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지만 거짓 기록 위에서 70년 동안 특권을 누려왔던 고급 장교들이 사과하지 않을 것 같다. 이제라도 한국전쟁사를 역사의 영역에 포함시켜 일반 연구자들의 연구와 논문 발표를 유도해야 할 것 같다. 전쟁사의 진실에 대해 대중적으로 알리는 작업도 필요하다. 한국전쟁사와 전투사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불경으로 여기는 풍토가 빨리 사라져야겠다.”

인민군, 좌익세력 등이
자행한 ‘적대세력 사건’도 조사 필요···….
하지만, 우익이 저지른 사건을
인민군이 저지른 사건으로
조작하는 등 왜곡 심각

이런 풍토와 국가보안법이라는 실체 때문인지 민간인 학살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일각에선 좌익이나 인민군도 학살을 저질렀다면서 국군과 경찰의 민간인 학살을 희석하려 시도하곤 한다. 상대편 역시 학살을 저질렀다고 해서, 우리 국가가 저지른 학살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 소장은 인민군과 좌익세력 등이 자행한 이른바 ‘적대세력 사건’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게 남한 군경이 저지른 사건에 대한 왜곡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올해 초 조사한 화순 지역 사례를 들며 민간인 학살이 우익과 좌익 모두에 의해 벌어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 전 국군의 토벌 작전 학살이 있었지만, 이는 인민군의 점령기 동안 큰 보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본격적인 피해는 수복하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발생했고 이를 피하려고 입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총살당하든가 소개지역으로 이동했고 토벌 국군은 마을에서 빠져나갔다. 마을은 소수지만 다시 입산했던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 청년들은 가족들을 학살당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리고는 공격이 쉬운 마을 내부 배신자를 상대로 보복을 한다. 얼마 뒤 다시 토벌 국군이 마을에 진입했다.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악에 바친 빨치산으로 살아남았다. 이들은 체포되거나 죽을 때까지 투쟁한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악순환이 벌어졌다. 모두 죽을 때까지 말이다. 그래서 이 유형의 사건들은 수복 후에 발생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이라고 기록됐지만, 실제론 경찰 측 치안대가 주민을 학살한 사건을 조작한 사례도 발견된다. “대표적인 사건이 고양 지역의 타공결사대 사건이다. 1950년 9월부터 11월까지 고양경찰서 신도지서의 치안대 활동을 보조해온 조직이 이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김창용 본부장에게 연행된 뒤 좌익조직으로 조작된다. 결국 이들 타공결사대에게 학살당했다는 100여 명의 주민들은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f:id:bluetears_osaka:20190522132306j:plain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가족들이 2019년 5월 22일 국회 앞에서 희생자들의 유골을 놓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법 또는 진화위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05.22ⓒ정의철 기자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비롯해 과거사와 관련해 풀어야 할 과제가 아직 많지만, 10년 만에 다시 가동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아직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출범을 선언하긴 했지만, 국민의힘이 야당 몫인 위원 4명의 추천을 아무런 이유없이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이 추천을 해도 갈 길은 멀기만 하다.

신 소장은 “과거청산을 반대하는 분들이 9명의 위원 가운데 4명이나 차지할 예정이다. 그 중 한 분은 상임위원으로 민간인 학살 사건 조사를 총괄할 것으로 예상된다. 진실규명 결정을 받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분들까지 설득할 수 있는 정밀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피해가
분단 상황에서 내전 또는 국제전 중
독재 권력에 의해 벌어진
전쟁범죄, 반인륜범죄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독재를 극복하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여
민주주의와 통일,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여긴다”

신 소장은 2기 진실화해위에 대해 이런 바람을 전했다. “민주적이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 신청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설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2기 위원회는 처리하지 못했던 사건이나 새로 나타난 사건들을 조사하는 것에 그치는 위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1기 위원회의 연장으로 과거 청산 작업 완성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한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를 덮는 곳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 살려내는 것이 임무다. 전쟁 시기는 물론 이후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열사, 희생자들을 역사 속에서 되살려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3년 뒤에는 조사기간을 연장해야 한다거나 권한이 없어서 못했다는 말보다는 과거 청산의 다음 단계로 가자는 말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일은 2기 위원회의 출발과 함께 진행되어야 할 일일 것이다.”

f:id:bluetears_osaka:20210302103701j:plain
2016년 3월 충남 홍성군 민간인 유해발굴이 종료되면서 66년 전의 민간인학살 유골들이 드러났다.ⓒ공동조사단

지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활동한 이후 10년 간의 작업을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의 시기별, 유형별, 지역별 분석을 해온 신 소장은 이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역사적 의미와 가해자, 가해 행위 분석을 통한 재발 방지 연구에 도전하고 있다. 제 인생에 이 과제를 마칠만한 시간이 얼마 없을 것 같습니다만, 여기에 더해 이후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의 연속성을 규명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저와 제 주변 인사들의 인생도 이 과정에서 만나 어우러져 왔다. 당시 희생당한 친구들도 있고 여전히 실종 상태에 있는 친구도 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했지만 결국 여전히 실종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저는 조사관이기도 했지만, 신청인의 입장에서 가진 분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제가 겪었던 시대 역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70년 전에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이 이후 현대사의 열쇠라고 믿고 있는 저로서는 이후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전쟁의 연장선 상에서 재해석에 도전해 보고 싶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과거를 이야기하냐고 말한다. 하지만, 신 소장은 진정 미래로 나가기 위해 넘어야 산은 민간인 학살 등 과거사라고 강조한다.

“저는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피해가 분단 상황에서 내전 또는 국제전 중 독재 권력에 의해 벌어진 전쟁범죄, 반인륜범죄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독재를 극복하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여 민주주의와 통일,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저는 이 운동이 광범위한 관심과 지지 속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민주화운동하는 분들이나 통일운동가, 평화운동가, 심지어는 인권운동가들조차 주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역사 영역에서는 거의 소외되어 있고, 과거사라며 특별한 분야로 제한하는 경향이 큰 것도 주요 원인 중 하나 아닐까 싶다. 하지만, 과거사 영역을 더 확장시키지 못하는 저를 더 반성하게 된다. 곧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https://www.vop.co.kr/A00001534243.html

高陽・金井窟の慰霊事業をめぐるフォローアップ・1:なお終わらない「綱引き」

1年ほど触れてこなかったのですが、この間の動向を簡単にフォローすべく、備忘録的に記事をピックアップ。

blue-black-osaka.hatenablog.com

まずはソウル新聞。昨年の6.25の紙面で一面を飾った金井窟事件犠牲者遺族のインタビュー。この30年ほどの間に語り続けられてきた内容ですが、最後のほう、国家賠償訴訟で勝利し、慰霊事業を支援する条例案が可決されたにもかかわらず、「それでも戦いは終わらなかっ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 두려워…금정굴 쪽은 쳐다도 안 봤어요”
입력 :2020-06-24 22:00ㅣ 수정 : 2020-06-25 09:32

6·25전쟁 금정굴 민간인 희생자 유족 인터뷰

f:id:bluetears_osaka:20210301160957j:plain
▲ 24일 경기 고양시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사무실에서 이병순(왼쪽) 금정굴유족회 고문과 채봉화 유족회장이 서울신문과 만나 고통의 세월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장환 기자

“어려서는 내가 금정굴을 하루이틀 걸러 다니면서 무섭지도 않은지 거길(굴 위를) 건너뛰고 그랬지요. 그런데 아버지 죽고 나서 한 20여년 동안 한 번도 가지를 않았어요. 그쪽은 쳐다도 안 보고 얼씬도 안 하고 싶더라고요.”(이병순 금정굴유족회 고문)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 황룡산 자락에 있는 18m 깊이의 수직 폐광 ‘금정굴’. 한때 ‘금구뎅이’라고 불렸던 영광의 기억도, 동네 꼬마들이 폴짝폴짝 뛰놀던 추억도 온데간데없다. 금정굴은 이제 ‘무덤’이다. 1950년 10월 9일부터 25일까지 고양·파주 지역의 민간인 160여명이 ‘빨갱이’로 낙인찍혀 재판 한 번 받지 못하고 학살당한 채 금정굴에 버려졌다.

70년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은 한 몸 온전히 누일 곳 없이 떠돌이 신세다. 1995년 유족들이 발굴 작업을 벌여 153구 이상의 유해가 세상에 나왔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만 76명이다. 유해를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아 지금까지 납골당만 세 차례 옮겼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을 “경찰에 의한 불법적인 집단학살”로 결론 내렸지만, 희생자들의 넋은 위로받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했던 평화공원 설립도, 영구적인 유해 안치소 설치도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유족들은 애가 끓는다. 부역 혐의자 가족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금정굴 쪽은 애써 외면했다. 억울한 죽음을 애도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다. 서울신문은 24일 채봉화(74) 금정굴유족회장과 이병순(87) 고문을 만났다.

1950년 10월 9일. 당시 열일곱 소년이었던 이 고문의 뇌리에는 70년 전 모습이 스틸사진처럼 남아 있다. 집 앞에서 두 사람씩 삐삐선(군용통신선)에 묶인 채 이동하는 행렬을 목격했다. 맨 뒤에 아버지 이봉린이 있었다.

f:id:bluetears_osaka:20210301161105j:plain
▲ 사진은 1995년 10월 경기 고양시 금정굴 현장에서 발굴된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 시작 4일째인 1995년 9월 29일 첫 유골이 나온 이후 같은 해 10월 6일 15m 깊이에서 굴의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돼 발굴이 중단됐다. 이 무렵 온 산이 유해로 뒤덮였고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번갈아 비닐 천막에서 밤을 지새우며 현장을 지켰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제공

보리밭 갈다 끌려간 아버지… 유해안치소도 없이 ‘떠돌이 신세’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 만에 수도를 빼앗긴 국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무렵 이봉린은 능곡국민학교에서 열린 유엔군 환영대회에 나갔다가 치안대에 끌려갔다.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한 시기 ‘농촌위원장’을 맡아 공출량을 계산하는 부역을 했다는 이유였다. “우리 아버지가 일산리 구장(區長)을 했었거든. 동네에서 추켜세우는 사람이잖아. 주변에서 ‘형님이 일 봐야지’ 하니까 맡게 된 건데….”

어머니와 7남매는 잡혀간 아비의 끼니 걱정에 매일 번갈아 수십 킬로 걸어 밥을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경찰서에서 “(부역 혐의자들이) 문산으로 좌익 심사를 받으러 가서 오늘은 밥을 안 받는다”고 했다. 이 고문은 “문산을 가는 줄 알았지 금정굴로 가는 줄 누가 알았겠느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행렬을 몰래 뒤따랐던 다른 희생자 유족을 통해 이 고문 가족은 진실을 알게 됐다. “아이고, 심사가 뭡니까. 그 구뎅이로 가서 다 쏴죽였어요!”

장남이었던 이 고문은 그 길로 작은아버지, 마을 어른들과 함께 사다리와 밧줄을 챙겨 금정굴로 향했다. 시신이라도 수습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신은 찾지 못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금정굴에 떨어져 “살려 달라”고 외치는 한 사람을 구했다. 총알을 빗맞은 덕에 목숨을 건진 동네 주민 이경선이었다. 금정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씨는 이후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않았다. 금정굴에서 학살이 처음 벌어진 이날 이봉린을 포함해 46명이 희생됐다.

f:id:bluetears_osaka:20210301161244j:plain
▲ 1993년 첫 위령제를 지낼 때 금정굴 현장의 모습. 부역혐의자 가족에 대한 낙인 때문에 오랜 시간 숨죽여 살아온 희생자 유족들은 1993년 문민 정부가 출범하면서 세상 앞에 나섰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제공

희생자 가족은 공포에 사로잡혀 침묵해야 했다. 그날 밤 이 고문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시체 가져왔느냐”, “빨갱이 찾으려고 금정굴에 갔다 왔느냐”고 화를 내며 장작 더미며 아궁이 구멍이며 죄다 창으로 쑤셔 댔다.

“그날 금정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누가 고발을 했는지 자전거를 탄 태극단 놈들이 서넛 올라오고 있더라고. 길이 엇갈려서 망정이지 거기서 마주쳤다면 우리도 다 죽는 거야. 일곱 사람이 갔었는데…. 그래서 잠자코 살았던 거지.”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 말이라도 하지, 예전에는 아버지가 ‘빨갱이’로 돌아가셨다고 어디 가서 말도 못해….”

채 회장은 45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아버지 채기동은 보리밭을 갈다가 총을 멘 치안대 3명에게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그때 고작 네 살이었던 채 회장은 아버지와의 기억이 없다. 그는 졸지에 과부가 된 어머니와 금쪽같은 외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넋두리로 부친을 기억한다.

“우리 엄마가 맨날 그러셨지. 봉화야, 네 아버지 금정구뎅이 가서 죽었다. 남들이 그런다.”

f:id:bluetears_osaka:20210301161354j:plain
▲ 1995년 10월 금정굴 현장에서 발굴된 희생자 유해. 발굴을 시작한지 4일째인 9월 29일 첫 유골이 나온 이후 10월 6일 15m 깊이에서 굴의 안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발굴을 중단했다. 이 무렵 온 산이 유해로 뒤덮였고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번갈아 비닐 천막에서 밤을 지새며 현장을 지켰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제공

채 회장은 금정굴과 가까운 파주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45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처음으로 금정굴을 찾았다. 뉴스로 유해 발굴 소식을 전해 듣고 동생과 함께 갔다.

채기동은 6년 동안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해방 이후 돌아왔다. 채 회장은 “9척 장신에 원체 기운이 장사라 인근에서 아버지를 당해 낼 사람이 없었다더라”고 했다. “총을 멘 치안대가 당신을 찾으니 도망가라”는 말에도 채기동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당당했다.

‘부역자 가족’의 삶은 매 순간 고통으로 점철돼 있었다. 채 회장은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봇짐 장사를 하려면 도민증이 필요했는데 우리한테는 도민증 허가를 안 내줘서 어머니가 ‘꼼짝없이 죽겠다’며 우셨다”며 “핍박받으면서 세 딸을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고 했다.

채 회장이 끝까지 파주를 떠나지 않은 건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채 회장 가족은 시간이 흘러 아버지에게 부역 혐의자라는 누명을 씌운 마을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됐다. 어머니는 “내가 죽어도 넌 반드시 이 동네에 살면서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두고 보라”는 말을 남겼다.

f:id:bluetears_osaka:20210301161446j:plain
▲ 금정굴 유족 김기성씨
덕이리 한산마을에 살던 아버지(김형렬)는 10여명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수복하던 경찰과 치안대를 환영하러 나갔다가 고양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아들 김기성은 아버지가 경찰서에서 풀려나지 않자 도시락을 날랐다. 10월 6일 희생자가 금정굴로 끌려가는 모습이 처가 식구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김은주 사진작가 제공

“신도시 주민들은/발 밑이 저승인 사실은 모른 채/오래전 이 마을을 휩쓸고 간/역병보다도 더 고약한 숙청은 모른 채/두개골 정강뼈 쇄골 잘근잘근 밟으며/황솥밭 샛길을 오갈 뿐이다”(손세실리아, ‘뼈무덤’)

용기를 내 세상에 나온 유족들은 긴 싸움을 했다. 승리도 수차례 맛봤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 규명을 결정하면서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고 희생자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 혐의자 가족이거나 이와 무관한 지역 주민이었다”고 했다. 2012년에는 국가 배상 소송에서 승소해 “희생자 2억원, 배우자 1억원, 부모·자식 각 5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확정됐다. 수차례 무산됐던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조례안’도 2018년 고양시의회에서 통과됐다.

f:id:bluetears_osaka:20210301161532j:plain
▲ 금정굴 유족 서영자씨
사리현리 새터말에 살던 아버지(서정희)는 제일금융에서 일했고, 전쟁 전에 야학을 열고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수복 후 벽제면 읍내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간 후 치안대 사무실 창고에 감금되었다. 어머니가 엿새 동안 밥을 해서 날랐으나 일주일째 되던 날 창고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은주 사진작가 제공

그럼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가 제대로 된 위령시설 없이 떠돌고 있고 유족이 겪는 고통도 여전하다. 일부 보훈단체 회원들은 아직도 희생자를 ‘토착 빨갱이’라고 부른다. 보수 정당 시의원은 조례 제정을 반대하며 “(희생자들은) 김일성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금정굴 현장에 조성될 계획인 평화공원은 “납골시설이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는 일부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채 회장은 “지금 희생자들을 임시 안치한 세종추모공원은 너무 멀다. 가까운 곳에 희생자들을 모시고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게 유족들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어 “죄도 없이 잡혀가 죽고, 설령 죄가 있다고 해도 재판 한 번 열지 않고 죽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고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한 전쟁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선민 기자
2020-06-25 1면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625001012

遺族が望む慰霊事業に反対するのは、虐殺事件に関係した太極団に連なる報勲団体はまあそれとして、金井窟の位置する地域の住民団体も含まれます。両者の遺族との利害対立の構図は異なっていて、後者については、住民が望む開発計画と遺族が望む慰霊施設とのバッティングによるものです。

고양 탄현 등 주민들, LH 찾아 공공지구 재고 의견 전달
고중오 기자 등록 2020.07.14 14:58:13 8면

f:id:bluetears_osaka:20210301162238j:plain
▲ 고양 탄현, 중산, 일산 주민대책위 , LH고양지역사업본부에 주민서명부 전달(사진=탄중일 주민대책위 제공).

고양시 주민들이 LH가 탄현동 일대에서 추진중인 공공지구 건립과 관련해 반발하고 나섰다.

고양시 탄중일(탄현·중산·일산)주민 대책위원회 이정환 위원장과 일산연합회 이현영 대표, 김완규 시의원은 14일 LH고양지역사업본부를 방문해 ‘LH공공지구 반대 및 주민요구사항’ 등을 전달했다.

탄중일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지난해 12월 탄현지구 건립 계획과 관련한 공청회가 열린 이후 결성된 단체로, 그동안 황룡산 고봉산 보존 문제를 제기하며 공공지구 지정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또 금정굴 유해 안치와 관련한 반대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다.

LH공사는 탄현지구에 20~30층 고층 아파트를 건설하는 내용을 주로 한 지구사업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대책위는 탄현동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7천여명의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관계기관에 주민 의견을 전달한데 이어 이날 LH 공사 측에도 반대 서명 등을 전달했다.

이정환 위원장은 “LH공사에 전달한 주민 반대 서명부 요구사항은 황룡산을 지키기 위해 아파트 높이를 15층 이하로 해 줄 것과 공원 주변 도로 주차장화를 맏기 위하여 1세당 1주차 면적 확보 등이 담겨있다”고 밝혔다.

또 이 위원장은 “이미 과밀 학급 지역인 탄현, 중산, 일산 교육환경 계선을 위한 초·중 교육시설 확보와 3천300세대에 달하는 인구 증가에 따른 주변 교통환경 개선 방안을 먼저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며 “대단지 아파트 공사로 인해 기존 주민들의 생활여건이 급격히 나빠질 우려가 크다. 관련한 계획을 우선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단체는 또 이재준 고양시장의 공약사업인 평화공원조성과 관련해 LH공사와 시를 상대로 금정굴 관련 봉안시설 등 각종 개발 계획에 대한 공개를 요구했다.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에 위치한 금정굴은 한국전쟁 때 민간인을 집단학살한 현장으로, LH공사가 추진하는 공공주택지구 내 탄현근린공원 황룡산 줄기에 자리해 있다.

반면 일부 시민들이 납골시설이라고 반발하고 있는 반면 금정굴 유족회는 평화시설이라고 주장하면 논란이 이어지는 곳이다. 지난 총선에서는 이를 둘러싸고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 후보간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서 주민간 갈등도 높은 상황이다.

대책위는 “금정굴 관련 봉안시설 등 또는 이 지역 각종 개발 계획 등에 대해 주민들과 최대한 소통을 위해 앞으로 구체적인 내용 등이 나올 경우 다양한 방법으로 주민과 소통해 줄 것”을 이날 LH측에 요구했다.

[ 경기신문/고양 = 고중오 기자 ]

https://www.kgnews.co.kr/news/article.html?no=592575

遺族にしてみれば、この場所は父祖が命を奪われたまさに現場であり、歴史の記憶と教訓を後世に伝える平和公園たる慰霊施設は、「墓地として、その地に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なのです。他方で、かつて農村地帯だった炭峴洞はすでに住宅開発が進んで多くの新住民が暮らしており、その意向も無視できない、ということで現在、高陽市LH韓国土地住宅公社)を間に挟んだ綱引きがなお終わっていない状況です。

“금정굴 평화공원, 조속히 추진돼야”
기자명 방재현 기자 입력 2020.10.27 11:59 수정 2020.10.27 14:57 댓글 15

제70주기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전

f:id:bluetears_osaka:20201015112602j:plain
금정굴유족회에서 민간인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사진제공 =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고양신문] 70년 전 금정굴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골이 현재까지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 이들의 희생을 위로하고 인권ㆍ평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6ㆍ25전쟁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전이 16일 금정굴 현장에서 진행됐다.

이번 제70주기 위령제전에는 금정굴유족회,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시 관계자 등 총 30여 명이 참석해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코로나19와 유족회원 대부분이 고령임을 감안해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인원과 식순을 최소화해 진행했다.

채봉화 유족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코로나19로 인해 제70주기 위령제전이 축소 진행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평화공원과 위령탑 조성사업이 속히 진행돼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골이 어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채 유족회장은 “우리 유족의 대부분이 고령자인 관계로 더 이상 조성사업을 늦춰선 안 된다. 이재준 시장께서도 관련 사항을 조속히 진행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빠르게 추진해 금정굴이 인권ㆍ평화의 터전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의견을 전했다.

위령제전에 참여한 김옥님 고양시 인권팀장은 “6ㆍ25전쟁 중 금정굴에서 무고한 희생을 당한 민간인 분들의 명복을 빈다”며 “고양시는 평화ㆍ인권회복을 위한 평화공원 설립과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한 역사복원 사업 등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2007년 당시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위원회는 고양 금정굴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이 아무런 적법절차 없이 국가권력에 의해 집단희생 됐음을 인정했다. 또한, 유족들이 오랜 세월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온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권고해 정부차원에서 공식 사과까지 했다. 아울러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보고서를 통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지역주민과 국민들에게는 역사적 교훈을 남기기 위해 금정굴 지역에 평화공원과 역사관을 설립하고, 적절한 위령시설을 설치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이에 이재준 시장 또한 시의회 제236회 제2차 본회의 시정질의(2019.11.26)에서 “(금정굴에서) 6ㆍ25전쟁 당시에 무고한 시민들이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우리 갈등과 아픔이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며 “정부 권고대로 하는 데 있어서 어떤 지자체장도 거부할 수 없다. 그것은 역사가 우리한테 명령한 것”이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https://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61385

さいとうちょろ『今日からHなマンガを作ることになりました』を読む。

たまたま見つけて読んでいた作品。単行本版で全4巻完結です。

簡単にまとめれば、少女漫画編集志望の若林ちゃんが成人マンガの編集部に配属されて何だかんだと頑張るお話です。

で、これがなかなかいい作品なんですよ。新人でいきなりエロマンガの製作現場に放り込まれて、あれやこれやにショックを受けながらも一つ一つの経験を積んでいく中で、仕事の何たるかを身につけていく。言うなれば王道の成長物語なんですけど、プロの漫画家さんが編集者さんに取材しながら作っているだけあって、フィクションの中にさりげないリアリティを混ぜ込んであります。

いや、マンガの製作や編集の現場を私が知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んですけど、漫画家が煮詰まったり潰れたりする時のありさまとか、仕事で激しくやらかした時のカバーリングの様子とか、想像を超えるプロフェッショナルの仕事ぶりとか、何かを教わるときに越えないといけない無茶ぶりの壁や、普段は忘れていても時おり思い起こすことのある憤りや、人が見かけによらないこともあるところや、いろんなところで自分の経験に照らしてリアルさを感じることができました。

何より、エロマンガに仕事のやり甲斐を感じるに至るまでの描写が上手いんですよね…。


f:id:bluetears_osaka:20210225153742j:plain

エロマンガに題材を採っているので、薦めるのに若干気後れするところもないではないですが、これから就職活動する大学生あたりに読んでもらいたい作品です。

郊外線がまさかの運行再開?

え?マジですか?ソウル市立昇華院に出入りしていたついでに、碧蹄あたりで路線を見たことありますけど、ほぼ廃線のような雰囲気でしたよ…。やればできるんすねえ。

ja.wikipedia.org

まあ、駅配置はかつてと異なり、非電化の気動車で1時間に1本程度の運行を予定しているみたいですね。それでも、ソウルをバイパスして高陽市と議政府市とを結ぶ鉄道路線。運行再開が実現した暁には、ぜひ乗ってみたいところです。

교외선 운행 재개하나…경기도, 교외선 운행재개 추진
국비 497억 원 편성…경기도, 2021년 국비 40억 원 확보
박재민 기자 | 기사입력 2021/02/23 [10:11]

f:id:bluetears_osaka:20210302165357j:plain
▲ 교외선 노선도. (사진에 명시된 역은 기사내용과 무관함=경기도 제공) © 철도경제

[철도경제=박재민 기자] 그 동안 운행이 중단됐던 교외선이 다시 운행을 재개할 전망이다.

지난 18일 경기도의회 제350회 임시회를 통해 열린 철도항만물류국 업무보고에 따르면 올해부터 2023년까지 교외선 운행재개 사업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세부적인 사업계획에 따르면 6개역(▲대곡 ▲원릉 ▲일영 ▲장흥 ▲송추 ▲의정부)을 운행역사로 선정하며 1년 간 설계 후, 공사기간 2년 후 운행 재개할 예정이다.

또 계획에 따르면 운행 재개 시 차량은 디젤동차가 투입되며 운행횟수 34회, 1시간에 1회 운행예정이다.

도는 이를 위해 교외선 시설 개량비로 국비 497억 원으로 편성하며, 이 중 올해 국비 40억 원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앞으로 도는 국토교통부, 국가철도공단, 한국철도공사 그리고 관련 지자체와의 운행협약을 체결하며 관련 TF팀을 구성한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12월 29일 경기도는 이재준 고양시장, 안병용 의정부시장, 조학수 양주부시장이 한 자리에 모여 ‘교외선 운행재개 적기개통 및 효율적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바가 있다.

협약에 따라 경기도와 3개 시는 교외선 운행재개가 조속히 추진 되도록 국토교통부와 긴밀히 협조해 나가기로 했다.

아울러 도는 중장기적으로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교외선 전절화가 반영 되도록 행정지원 등 제반사항에 적극 협력해 나갈 계획이다.

http://www.redaily.co.kr/1304

長い年月を経て、南海ホークスの歴史の中に野村克也が帰還

わりと早い段階で、なんばパークス南海ホークスメモリアルギャラリーには行っていました。その展示の中に野村克也の影一つなかったことに、言いようのない違和感を覚えました。わざわざあの施設に足を運ぶ人なら、十人が十人とも感じたことだと思います。

それからでもすでに十年以上、愛憎入り混じる因縁が生まれてからだとすでに44年。ようやく落ち着くところに落ち着いた感があります。江本さんや南海電鉄をはじめとする各方面の尽力があって実現したことですが、ご本人の半生に及ぶ年月を経て、亡くなった後にようやく実現したという事実の重みについて、思わずにはいられません。

リニューアル後の展示を観に、また近々行ってこようと思います。

ノムさん大阪球場に帰還 44年前の愛憎超えた南海の弟子の尽力
毎日新聞 2021/2/17 12:00 (最終更新 2/17 12:00) 2303文字

f:id:bluetears_osaka:20210217155214j:plain
戦後初の3冠王を決め、ファンの声援に応える野村克也さん=大阪・藤井寺球場で1965年10月21日

 「ノムさん」が古巣に帰って来た。1959年のプロ野球日本シリーズを4連勝で制するなど、一時代を築いた南海(現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の「4番・捕手 背番号19」は、2020年2月に84歳で亡くなった野村克也さんだ。その遺品などが14日から、本拠地だった大阪球場跡地のなんばパークス内「南海ホークスメモリアルギャラリー」(大阪市浪速区)で展示された。65年に戦後初の3冠王、監督兼任で73年リーグ優勝と誰もが認める「ミスター南海」だが、07年のギャラリー常設以来、野村さん関連の展示は初めて。なぜ長年にわたり、最大の功労者を欠く事態が続いたのか。【大東祐紀】

 発端は77年にさかのぼる。野村さんはシーズン終了間際、南海の兼任監督を電撃解任された。この年の最終成績は2位。要因は当時交際中で後に妻となる沙知代さん(17年死去)が絡むトラブルだった。「公私混同によるチームへの悪影響」。記者会見で野村さんは解任理由を強く否定したが、沙知代さんがチーム運営や選手起用に口出ししたとされ、これを機に野村さんと南海との「愛憎劇」が始まった。

f:id:bluetears_osaka:20210217155251j:plain
式典で始球式を行う江本孟紀さん=大阪市浪速区なんばパークスで2021年2月14日(代表撮影)

 今回のプロジェクトは「おかえり!ノムさん 大阪球場なんばパークス)に」と題し、サンケイスポーツ南海電鉄でつくる実行委員会が主催。南海で野村さんとバッテリーを組んだ江本孟紀(たけのり)さん(73)=サンケイスポーツ評論家=が発起人となり、ギャラリーのリニューアル費用は20年11月から3カ月間、クラウドファンディングで募った。全国の2388人から目標だった2000万円の倍以上となる4300万円超が集まり、ファンが「南海の大スター」を忘れていないことが証明された。

 江本さんにとって、野村さんは恩人だ。社会人野球の熊谷組からドラフト外東映(現日本ハム)に入団し、71年は未勝利だったが、その荒れ球に将来性を感じた野村さんがオフにトレードで獲得した。野村さんの卓越した野球理論による指導と巧みなリードで「再生」した江本さんは移籍1年目に16勝を挙げ、プロ11年間で通算113勝と大きく飛躍した。

f:id:bluetears_osaka:20210217155326j:plain
南海で野村克也さん(右)とバッテリーを組んだ江本孟紀さん=東京・後楽園球場で1975年4月29日

 江本さんは「野球に関する考え方がまるで違った。あそこまで考え、野球を突き詰める人は他にいなかった」と回想する。球場へ高級米国車リンカーンで通う野村さんから、「こういう車に乗りたかったら、頑張れよ」と言われたことを今もよく覚えている。弱肉強食の厳しい世界を生き抜くための、ちょっと気取った激励だった。

 京都・峰山高から54年にテスト生として南海に入団した野村さん。底辺からはい上がり、24年間も在籍した古巣を追われた後は、「生涯一捕手」としてロッテ、西武で45歳まで現役を続けた。さらに90年から9年間監督を務めたヤクルトでは3度の日本一にも輝いた。それでも、江本さんは「野村さんといえば南海。また、南海なくして野村さんも語れない。王(貞治)さんや長嶋(茂雄)さんに匹敵するスターがギャラリーにいないことが、そもそもおかしかった」と南海とのつながりを強調する。

 「花の中にはヒマワリもあれば、人目につかないところでひっそりと咲く月見草もある。王や長嶋はヒマワリ、俺は月見草」

f:id:bluetears_osaka:20210217155403j:plain
名選手パネルのコーナーに追加された野村克也さんの写真。野村さん関連の映像も流れている=大阪市浪速区で2021年2月14日午前9時50分、大東祐紀撮影

 野村さんが通算600本塁打を達成した75年5月、当時巨人の大スターだったONと自らを比較した言葉だ。代名詞である「ぼやき」の中に、注目度が劣るパ・リーグで、その老舗球団だった南海の屋台骨を支えてきた自負が感じられる。

 野村さんが南海を解雇されるまでのいきさつを、江本さんは振り返る。「大阪市内のホテルで、何人かの選手と一緒に野村さんと話をした。不満に思っている選手もいる、と進言しました。普段は選手の話を聞くことはなかったけれど、その時は『分かった』と言っていましたよ」

 だが、世間的に「悪妻」とされた沙知代さんへの思いやりもあったのだろう。輝かしい球歴を切り開いてくれた球団でもある南海と生前、溝が埋まることはなかった。生前、ギャラリー展示の許可を求められても、かたくなに首を縦に振らなかったという。ただ、江本さんは「そろそろ、俺も南海に帰ってもいいか」という野村さんの思いを感じ取っていた。「沙知代さんが亡くなったのもあるでしょう。大阪、南海への郷愁が年々強まっていたと思う」

f:id:bluetears_osaka:20210217155446j:plain
野村克也さんが使用したユニホームやキャッチャーミットなどの遺品=大阪市浪速区で2021年2月14日午前9時20分、大東祐紀撮影

 14日にリニューアルオープンセレモニーが開催され、江本さんや野村さんの孫で楽天野村克則捕手育成コーチ(47)の長男・忠克さん(19)さんが会場を訪れ、記念の始球式などを行った。リニューアルにより、「名選手パネル」のコーナーに野村さんの写真が追加された他、愛用したキャッチャーミットや背番号19のユニホーム、3冠王達成時の記念盾などが展示された。

 江本さんは阪神移籍後の81年、起用法を巡る不満から「ベンチがアホやから」と球団首脳陣を批判し、引退した。ノムさんも「手を焼いた」やんちゃな弟子が、44年ぶりの「里帰り」を実現した。

 江本さんは言う。「本当はむりやりにでも、生きているうちに戻って来させたかった。でも、天国で喜んでくれているんじゃないかな。『いらんことをしやがって』と言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けど」

南海ホークス

 1リーグ時代の1938年、南海電鉄(本社・大阪市)を親会社とした「南海軍」として発足。46年に「近畿グレートリング」のチーム名で初優勝を果たし、翌年から「南海ホークス」となった。50年からの2リーグ分立ではパ・リーグに。88年オフのダイエーへの球団譲渡による福岡移転(2005年シーズンからソフトバンク)まで、12回の優勝(日本シリーズは59、64年制覇)で「パ・リーグの雄」として知られた。

https://mainichi.jp/articles/20210216/k00/00m/050/200000c

懐風館高校の「染髪強要」をめぐる訴訟の大阪地裁判決 

2017年の記事にした訴訟の地裁判決が出たようです。

blue-black-osaka.hatenablog.com

簡単にまとめれば、「指導そのものには合理性があって違法性は認められないが、指導の結果行なわれた措置は不法行為と認められるから、そこのところは賠償を命じる」ということですか。とすれば、「指導そのものの違法性」や「被告らの判断の合理性」をめぐって原告側は控訴するのも当然でしょうね。裁判を続けるのは大変でしょうけど…。

校則・黒染め指導、違法性は否定 原告側は控訴を検討
米田優人 山田健悟 2021年2月16日 21時33分

f:id:bluetears_osaka:20210218123054j:plain
大阪地裁・高裁=2020年10月15日、大阪市北区、米田優人撮影

 茶髪を黒く染めるよう繰り返し指導され、精神的苦痛を受けたとして、大阪府立懐風館(かいふうかん)高校(大阪府羽曳野市)の元女子生徒(21)が府に慰謝料など約220万円を求めた訴訟の判決が16日、大阪地裁であった。横田典子裁判長は校則や黒染め指導を違法とはいえないとし、生徒が不登校となった後、学級名簿に名前を載せなかった学校側の行為などを「著しく相当性を欠く」として違法とし、府側に33万円の賠償を命じた。

 判決によると、生徒は2015年4月に入学。同校には「染色・脱色」を禁止する校則があり、教諭らは生徒に黒く染めるよう何度も指導。「黒染めが不十分」として授業への出席や修学旅行への参加を認めないこともあり、それによって生徒は不登校になったとした。

 判決は、校則について、華美な頭髪を制限することで学習や運動に注力させる目的などから合理的と判断し、茶髪に対する社会一般の認識に変化が認められるとしても、校則の合理性に影響しないと述べ、違法性を否定した。

 教師らの頭髪指導についても「根拠に基づいて生徒の髪の生来の色は黒と認識していた」などとして違法性は認められないとした。

 一方、頭髪指導によって不登校になった生徒が3年に進級した際、学校側が生徒の席を教室に置かなかったほか、学級名簿に名前を載せず、生徒側から抗議を受けた後もこうした措置を5カ月間続けたことについて、教育環境の配慮義務に反するとした。「登校の意思を回復しつつあった生徒は教員らに不信感を募らせ、卒業まで高校に行けない状態が続いた」と指摘し、「生徒に与える心理的打撃を著しく軽視し、著しく相当性を欠く」として、学校側の裁量を逸脱して違法とした。(米田優人)

訴訟がきっかけ、注目された「ブラック校則」

 「大人は自由にできることを高校生だから規制してよい、校則は問題ないというのはおかしい」。原告側代理人弁護士は判決後の取材にこう語り、控訴を検討する意向を示した。

 今回の訴訟は国内外のメディアが取り上げ、議論を呼び、理不尽な校則や合理性がない指導を指す「ブラック校則」が注目され、NPO法人の理事長らがこうした校則をなくすプロジェクトを立ち上げた。発起人の須永祐慈さんは判決を読み、「過去の判断を踏襲し、この校則を違法でないとしてよいのか。裁判所の認識が時代に合っていないのでは」と批判した。

 一方、府教育委員会は控訴しない方針。酒井隆行教育長は、名簿に生徒の名前を載せなかったことを「許されるものではない」とし「今後、このようなことがないよう取り組む」とコメントした。

 吉村洋文府知事も報道陣に、名簿から削除したのは間違いとしたが「黒髪から茶髪にしたときにダメだよという校則は必要な教育的指導の範囲内」と話した。

 大阪大学の小野田正利・名誉教授(教育制度学)は「教諭らは一方的に黒く染めるよう指導するのではなく生徒側と丁寧に話し合う余地があった」と話した。(米田優人、山田健悟)

https://digital.asahi.com/articles/ASP2J6W8LP2JPTIL013.html

なお、判決前に争点をまとめた毎日新聞の記事はこちら。

「生徒に黒染め強要」地毛の色で主張対立、司法判断は
毎日新聞 2021/2/13 08:00 (最終更新 2/13 08:00) 1679文字

f:id:bluetears_osaka:20210218134847j:plain
髪の染色などを禁じた大阪府立懐風館高校の校則。提訴後に改定され、「故意による」との文言が追加された=大阪市北区で2021年2月9日午後11時13分、服部陽撮影

 「黒染め強要」はあったのか、なかったのか――。生まれつき茶色の髪を黒く染めるよう学校から強要されたとして、大阪府羽曳野市の府立懐風館高校に通っていた女性(21)が、約220万円の慰謝料などを府に求めた訴訟の判決が16日、大阪地裁で言い渡される。地毛の色や指導の妥当性を巡り、主張は対立。校則や生徒指導のあり方に一石を投じた訴えの行方は。

 同校は校則で、髪の染色や脱色を禁じている。女性は2015年春に入学後、髪を黒く染めるよう再三指導され、2年生の2学期から不登校に。弁護士事務所に教員を派遣してもらうなどして授業を受け、18年3月に卒業した。

再三の注意で不登校、席なく名簿も削除

 女性側は入学時、生まれつき茶髪で、黒染めを強要しないよう母親が配慮を求めていたと主張。教諭から4日ごとに髪の色を注意され、「黒染めしないなら学校に来る必要がない」などと言われて不登校に追い込まれたとして、「生徒指導の名を借りたいじめだ」と訴えている。

f:id:bluetears_osaka:20210218134935j:plain
大阪地裁が入る合同庁舎=大阪市北区で2020年11月27日、服部陽撮影

 一方、府側は入学前説明会で、頭髪への配慮を求めた生徒はいなかったと指摘。教諭が指導した際、女性の髪の根元が黒かったことを確認しており、地毛は黒だと主張する。校則に反して茶色に染めていたため指導しただけで、違法性はないと反論している。

 不登校になった後の対応も焦点だ。女性側は教室に自分の席がなくなり、名簿からも削除されたことで、「筆舌に尽くしがたい精神的苦痛を被った」と主張。府側は「不登校状態が目立たないようにした」と反論したが、府教委は提訴後の記者会見で「不適切だった」と釈明している。

 頭髪指導を巡る訴訟は過去にも起きている。熊本県内の公立中で男子生徒を丸刈りとする校則の違法性が争われた訴訟で、熊本地裁(1985年)が「著しく不合理ではない」とした判決が確定。奈良県生駒市立中の女子生徒が黒染めは体罰だとして市に賠償を求めた訴訟では、大阪地裁(11年)が「教育的指導の範囲内」として請求を棄却、最高裁で生徒側敗訴が確定した。【伊藤遥】

https://mainichi.jp/articles/20210212/k00/00m/040/133000c

映画「ブラザーフッド(태극기 휘날리며)」製作当時、国防部が要求した「3つのこと」

別のことを調べていてたまたま見つけたこの記事。これ自体、もう2、3年前の話ですけど。

ブラザーフッド(태극기 휘날리며)」(2004年)製作当時、国防部が製作陣に要求したことが3点あったのだそうです。

① 兄弟の「強制徴収」を「志願入隊」に改めること。
②「保導連盟事件」を削除すること。
③ 「主人公の越北」を削除すること。

なるほど。国防部の立場も理解はできます。ただ、それに応じてしまったら、実につまらなくて退屈なプロパガンダ映画になったでしょうね。軍の新兵教育には使われたかもしれませんが、1000万人もの観客動員を記録することはなかったでしょう。

포텐 ‘태극기 휘날리며’ 제작 당시 국방부가 요구했던 ‘수정사항’3가지
냄새나고털난구슬 조회 수 54742 추천 수 484 댓글 161

f:id:bluetears_osaka:20210302120547j:plain
f:id:bluetears_osaka:20210302120557j:plain

남한군이었던 이진태(장동건)이 중공군에게 끌려가 인민군으로 전향한 장면.

국방부는 대한민국 군인이 북한군이 되는 내용을 불편하게 생각했고, 이를 수정해달라 했지만 역시 감독은 이를 거절한걸로...

한국 영화 사상 두 번째 ‘천만 관객’영화이기도 하고, ‘프로파간다’를 하지 않은 전쟁영화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평가도 받았다.

https://www.fmkorea.com/2128331342

‘태극기 휘날리며’ 제작 당시 국방부가 요구했던 ‘수정사항’3가지

f:id:bluetears_osaka:20210302115313j:plain

2004년에 개봉한 한국 전쟁을 그려낸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이 영화는 한국 영화 사상 두 번째 ‘천만 관객’영화이기도 하고, ‘프로파간다’를 하지 않은 전쟁영화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평가도 받았다.

f:id:bluetears_osaka:20210302115358j:plain

한편 천만 관객을 돌파했던 ‘태극기 휘날리며’는 제작 당시 위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JTBC ‘#방구석 1열’에 출연한 정윤철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를 제작할 때 투자자를 제대로 찾지 못해,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적이 있다”고 밝혔다.

f:id:bluetears_osaka:20210302115415j:plain

그러면서 연출을 맡은 강제규 감독의 시나리오를 본 국방부가 “(시나리오를)몇 개 고쳐주세요”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f:id:bluetears_osaka:20210302115437j:plain

국방부가 시나리오를 보고 요구했던 사항 중 첫 번째는 극 중 이진태(장동건)와 이진석(원빈)형제가 군인들에 의해 강제징집되는 장면을 ‘자원입대’로 수정해달라는 것.

f:id:bluetears_osaka:20210302115458j:plain

하지만 강제 징집은 명백한 사실이기에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 요구 사항은 ‘보도연맹 사건’을 삭제해달라는 것이었다.

f:id:bluetears_osaka:20210302115530j:plain

그러나 감독은 이 영화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영화 속에서 ‘쌀’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는데,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으로 총살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자국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 6.25전쟁 최악의 흑역사로 불리는 사건이다.

f:id:bluetears_osaka:20210302115610j:plain

세 번째 수정사항은 남한군이었던 이진태(장동건)이 중공군에게 끌려가 인민군으로 전향한 장면.

국방부는 대한민국 군인이 북한군이 되는 내용을 불편하게 생각했고, 이를 수정해달라 했지만 역시 감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f:id:bluetears_osaka:20210302115643j:plain

국방부의 요구를 거절한 감독은 결국 국방부에 총 한 자루도 협조받지 못했으며, 제작비 30~40%를 절감할 기회를 날렸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은 자체 제작을 통해 ‘기획 의도’를 그대로 반영했고, 영화는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영화가 됐다.

한편 개봉 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분들을 위한 특별시사회를 가졌는데, 시사회에 참석한 분들은 영화의 결말을 보고 전쟁 당시를 떠올리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f:id:bluetears_osaka:20210302115912p:plain
f:id:bluetears_osaka:20210302115926j:plain
f:id:bluetears_osaka:20210302115940p:plain

영화의 마지막 장면..

꼭 돌아온다고 약속한 형이었지만, 50여 년의 세월이 흐를 동안 알 수 없었던 형의 생사..

뒤늦게서야 형을 보게된 71살의 이진석

2018. 06 저작권자(c) 지식의 정석 (무단 사용-재배포 금지) / 사진 –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JTBC #방구석1열,

https://principlesofknowledge.kr/archives/72004

広島・似島の平和資料館

広島港の沖にこんな島があって、こんな風に戦争と関わっていたこと、私は知りませんでした。

hiroshimaforpeace.com

今後、広島に行く機会があれば、こちらにも行ってみたいと思います。

www.ninoshimakisen.jp

似島に平和資料館 戦争遺構の資料を保存・展示、「学びを深める場に」
2021/2/12 21:29

f:id:bluetears_osaka:20210218135957j:plain
4月の開館を目指し、建設が進む「似島平和資料館」(広島市提供)

f:id:bluetears_osaka:20210218140007j:plain:right 広島市南区似島の住民有志たちでつくる「似島歴史ボランティアガイドの会」が、島に点在する戦争遺構の資料を保存・展示する「似島平和資料館」の整備を進めている。来島者の平和学習の拠点とする計画で4月の開館を目指す。12日、メンバーが市役所に松井一実市長を訪ね、入り口の看板の揮毫(きごう)を依頼した。

 資料館は島の南東にある国有地の「慰霊の広場」内で1月に着工。鉄筋の平屋で展示室(約35平方メートル)と事務室(約15平方メートル)を設ける。約1千万円の建設費は市の補助金で賄い、土地は市が国から無償で借り受ける。

 似島日清戦争から太平洋戦争にかけて軍用施設が建設され、原爆投下時は負傷者も受け入れた。軍用桟橋や軍馬関係の施設といった遺構や慰霊碑が多く、資料館では説明パネルを展示し、発掘調査で見つかった被爆者の遺品を並べる。

 さらに地元の郷土史研究家で同会の宮崎佳都夫会長(72)が所有する第1次世界大戦中に似島に収容されたドイツ人捕虜の日常生活を撮影した写真も展示予定。資料館は当面、申し込みに応じて開ける方針という。

 同会は昨年9月に発足。会員は約15人で、平和学習のガイド養成も進めている。この日、松井市長と面会した宮崎会長は市の支援に感謝し「戦争遺構を実際に見て、資料館で学びを深め、戦争の無意味さを考える場にしたい」と意気込んだ。松井市長は揮毫を快諾し「似島の歴史や文化を子どもたちに伝承する新たな拠点に」と期待した。(寺本菜摘)

https://www.chugoku-np.co.jp/local/news/article.php?comment_id=726544&comment_sub_id=0&category_id=112

茅野市民館図書室という「最低の施設」

長野県のこの施設が話題となったのは、こちらがきっかけのようです。本を扱ったことのある人ならば、これが本にとってどんなにひどい環境か、すぐにわかるものでした。

その後、朝日新聞が取材に入り、この記事が出ました。現場を管理する当事者の苦悩はよくわかりました。

図書館の本が真っ青 開放的過ぎた?「本に申し訳ない」
依光隆明 2021年2月12日 10時30分

f:id:bluetears_osaka:20210217142747j:plain
茅野市民館に並ぶ本。退色し、青っぽくなっている

f:id:bluetears_osaka:20210217142842j:plain
図書館を外から見ると…。意識的にそうデザインされている=茅野市民館

f:id:bluetears_osaka:20210217142935j:plain
全面ガラスの向こうに八ケ岳が見える。ロケーションと日当たりは最高なのだが=茅野市民館

f:id:bluetears_osaka:20210217143015j:plain
両側が全面ガラスとなっている細長い空間に延びる茅野市民館図書室。真っすぐな通路の左側に書籍が並ぶ

f:id:bluetears_osaka:20210217143102j:plain
両側全面ガラスの細長い空間に書棚が並んでいる=茅野市民館

f:id:bluetears_osaka:20210217143141j:plain
茅野市民館図書室の全景=長野県茅野市

 長野県のJR茅野駅に隣接する茅野市民館図書室が最近、ネットで熱い話題となっている。ずらりと並ぶ本の背表紙が退色してしまい、青っぽくなっているのだ。原因は紫外線とみられ、「本の悲鳴が聞こえる」「意匠重視の設計者の自己満足」などなど、ネット上では厳しい意見があふれるが……。市民館側には公共空間としての狙いと高所にあるがゆえの悩み、ジレンマがあった。

 茅野市民館は2005年10月にオープンした。キーワードは「交流」で、外からも見えるし、内からも外が見える。そうすることで異分野の人々の出会いを意識した。

 図書室は最も駅に近い空間に細長く作られている。長辺は両側とも高さ5メートルを超える全面ガラス。蔵書は約1万点で、片側の全面ガラスから茅野駅の列車やホームが見え、片側には八ケ岳の山々が映る。開放感とロケーション、日当たりは申し分ないのだが……。

 ネットの指摘通り、図書室に並ぶ本の多くは背表紙が青く変色している。

 「簡単に言うと色飛びです。日焼けで色が抜け落ちていく現象です」。話すのは茅野市民館ディレクターの辻野隆之さん(65)。辻野さんは国内外の芸術関係施設に関わってきた。

 「美術館が日照を計算するのは当たり前ですが、書籍も同じ。意匠も含めてきちんとしているのが書籍の価値なので、書籍に申し訳ない。なんとかしなきゃいけないと思っています」

 ジレンマという言葉を使いながら悩みを明かす。

 「15年前、オープン型図書室という新しい考え方でスタートしました。だから外に向かって本を見せているのですが、そうすると直射日光の影響を受ける。標高が高いので紫外線が特に強いんです。自然の力に影響を受けています」

 市民館の標高は約800メートルで、標高ゼロの平地よりも1割近く紫外線が強いといわれている。しかも全面ガラスは北東と南西を向いており、特に午後の日差しが強烈に差し込んでくる。対策としてガラスにはUVカットのものを使用、南西面にはロールスクリーンもつけたが、日差しの強さは予想以上だった。

 施設のデザインと図書館機能が相反した象徴的な事例だけに、ネットの反響も大きくなっている。最初のツイートから3日で「いいね」は7万を超え、リツイート(転載)は2万5千に達した。

 辻野さんは「自然の中にある開かれた空間というのが最大の特徴。設計思想をつぶすと持ち味もつぶすので、それは違う」と悩みを明かす。「なんとかしたいという思いは強いのですが……。答えが見つからないのが現状です」(依光隆明)

https://www.asahi.com/articles/ASP2C6SYBP2BUOOB003.html

ただ、これを読んでもよくわからないのが、「設計者は何を考えて設計し、今これを見て何を考えているのか」です。そのデザインをもって数々の賞を取っているわけですし、当人に設計意図や現状に対する見解などを質しに、取材に行ってもおかしくないとは思うのですが…。

ja.wikipedia.org
www.tozai-as.or.jp

これを放置していたら、「こういうのを作って何とも思わない設計者である」と思われるような気もしますし、それって決して得策ではないと思うのです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