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大後門の「ヨンチョルバーガー」閉店というニュース

地下鉄6号線の安岩駅近くのここなら、何度も前を通っていますし、このお店もぜったい目にしたことがあるはずなんですが、残念ながら入ったことはありませんねえ。


高麗大後門の名物「ヨンチョルバーガー」が閉店
JULY 29, 2015 07:16

2012年に高麗コリョ)大学を卒業したパク・サンヒョク氏(29=会社員)には、忘れられない思い出の場所がある。ソウル城北区安岩洞(ソンブクク・アンアムドン)の高麗大学政治経済学部の後門にある「ヨンチョルバーガー」だ。大学周辺で2年間自炊をしていたパク氏は毎日、三食のうち一食を、ヨンチョルバーガーで解決した。卒業後も母校周辺に行く用事があれば、かつての思い出を思い浮かべながら、たびたびヨンチョルバーガーに立ち寄った。パク氏は、「わずか1000ウォンでハンバーガーとコーラで腹ごしらえをすることができた。懐事情の芳しくない学生たちには、学校食堂と同じだった」と話した。

高麗大学の人気もの」として大勢の学生たちから愛されてきたヨンチョルバーガーが、思い出の中に消えることになった。激しい経営難に耐えきることができず、今月初め、店を閉めたのだ。代表のイ・ヨンチョル氏(47)が2000年、リヤカーの露店で初めてハンバーガーを作ってから15年後のことだ。

イ氏は、わずか1000ウォンのストリートハンバーガーを打ち出して認知度を高めはじめ、ヨンチョルバーガーを全国的規模のフランチャイズへと成長させた。一時は加盟店が80店まで増え、「露店神話」のシンボルとも言われた。小学校4年生中退という学歴や貧しさに打ち勝った事業家として注目を集め、成功の道を走った。後になっては事業の基盤となった高麗大学側に巨額の奨学金を出すなど、分かち合いや寄付も地道に実践してきた。

しかし、2000年代後半に入って、少しずつ困難に直面し始めた。物価上昇にも拘わらず、1000ウォンの価格を固守した影響が大きかった。有名ファーストフードチェーンの攻撃的マーケティングや健康志向のブームに乗って、高級手作りハンバーガー専門店が登場したことで、年々立つ瀬が狭くなった。2009年、高級化戦略で4000ウォンを超える手作りハンバーガーを出したものの、反応は芳しくなかった。結局、経営難のため赤字が累積し、チェーン店は一つ、二つと店を閉め、今月初めは本店の安岩洞の店舗も廃業を余儀なくされた。

このニュースに接した学生たちや市民は、大変残念がっている。高麗大学生のクァク・へユン氏(26、女)は、「ヨンチョルバーガーの社長は、学校に寄付もし、学校祭のたびに食べ物を提供するなど、学校への愛情が大きかったのに、(廃業することになり)残念だ」と話した。

事業戦略の失敗が招いたやむなき結果だという声も出ている。高麗大学学生のイ某氏(25、経済学部4年)は、「ヨンチョルバーガーの価格が値上がりしたことで、学生たちがあまり行かなくなった」と言い、「似たような食べ物が多くできた状況で、学生たちの好みにうまく合わせることができず、やむなく淘汰させられたのではないかと思う」と明らかにした。安岩商人連合会の関係者は、「小規模な商店街に似たような店が集まったことで、競争が次第に激しくなっている」と言い、「周辺の自営業者らが皆苦しんでいる中、長い間、商売を続けてきたヨンチョルバーガーまでが結局を廃業させられることになった」と語った。

http://japanese.donga.com/srv/service.php3?biid=2015072949348

2000年にスタートして2015年に幕を閉じた「神話」が、長いか短いかはよくわかりません。ただ、2000年と言えば、地下鉄6号線が開通する直前で、高麗大界隈がまだ数十年来の垢抜けないキャンパスと学生街のままだった頃のはずです。

そこから高麗大は、「民族高大」から「Global KU」へとUIを転換し、「民族」とともに正門正面の土のグラウンドをなくして、キャンパス内の校舎群を今のような統一デザインにしていきました。それに合わせるかのように、高麗大周辺では、かつて見たことのないおされなお店もちらほら目にするようになっていきました*1

そんな中で、露店の格安ハンバーガーが当初は注目を集めて事業を拡大し、その後ゆるやかに学生が離れていって挽回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過程は、何だかとっても想像がつきます。このバーガー店の枠組みでどうにかしようとしてもどうにもならない、時代の流れみたいなものを感じずにはおれません。

고대앞 명물 `영철버거`의 좌절

15년만에 폐점 결정한 이영철 대표…노점 성공신화 마침표
2007년엔 전국 가맹점 80개
고급화된 대학생 입맛따라 변신 시도도 해봤지만 결국…

기사입력 2015.07.27 17:48:07 | 최종수정 2015.07.28 14:32:18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10년, 열흘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 비단 권세와 꽃만은 아니다. 호황과 불황을 오가며 요동치는 경기, 시시각각 변하는 소비자들의 취향 속에 한때 성공신화를 썼던 회사도 어느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곤 한다. 2000년대 초반 '고려대 명물'로 입소문이 나며 서울 대학가 일대를 주름잡았던 인기 프랜차이즈 수제버거, '영철버거'도 이 법칙을 피해가지 못했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 정경대학 후문에 위치한 영철버거 고려대점은 벌써 한 달째 불이 꺼져 있다. 영철버거 신화가 시작됐던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은 현재 폐점 상태다.

27일 매일경제신문은 15년간의 성공신화에 마침표를 찍고 어렵게 폐점을 결정한 이영철 영철버거 대표(47·사진)를 만났다.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이 대표는 벌게진 눈을 연신 꾹꾹 눌렀다. 그는 "불면증과 우울증 속에 1년이 넘도록 마음 놓고 잠을 자본 적이 없다"며 허탈하고 아쉬운 심경을 전했다. 이 대표에게 영철버거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그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 중퇴. 열한 살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자신의 천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이 대표다. 일을 하다가 사고로 허리를 다쳐 좌절하기도 했고, 도박에 손을 대 경마로 하루에 수백만 원을 날려보기도 했다. '인생 막장'의 기로에서 초심으로 돌아간 그는 수중에 남아 있던 돈과 지인에게 빌린 돈을 합쳐 노점을 차렸다. 그때 나이 서른두 살, 고려대 앞 리어카에서 팔기 시작한 영철버거는 이 대표의 인생 궤적을 바꿔놨다.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에게 단돈 1000원으로 근사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준 영철버거는 어느새 고려대의 명물을 넘어 서울 대학가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2007년에는 스트리트 버거로 가맹점 80개를 낼 정도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어두웠던 과거는 이 대표에게 특별한 '부의 철학'을 갖게 했다. '진정한 부자는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정신 아래 정직하게 땀 흘리며 영철버거를 키우는 데 힘썼다. 대학가에서 '부자학개론'과 같은 강연을 하며 진정한 부자의 의미를 알리고, 2005년에는 '내가 굽는 것은 희망이고 파는 것은 행복입니다'라는 자서전도 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고려대 학생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2004년부터 햄버거를 판 돈으로 1억원 상당의 장학금을 학교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대학생들의 입맛이 바뀌기 시작했다. 저렴한 영철버거보다는 비싸고 고급스러운 수제버거를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수수료 부담이 큰 신용·체크카드 사용률은 점차 높아지고 대학생들은 4000~5000원짜리 커피를 늘상 들고 다닐 정도로 소비 수준이 높아졌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1000원짜리 버거만 팔아서는 회사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집이 커졌다. 2009년 영철버거가 정부 유망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이 대표는 한계를 절감했다. 가맹점이 늘면서 관리가 소홀해지고 이익 창출이 힘들어졌다. 결국 영철버거는 이때를 기점으로 고급화 전략을 택했다. 좋은 재료를 충분히 사용하고 신메뉴 개발에 주력해 4000~7000원대 수제버거를 팔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소비자들은 영철버거를 고급 수제버거로 인정해주지 않았고, 적자가 계속됐다.

이 대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자 했지만 '1000원' 버거라는 이미지가 생각보다 강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며 마지막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돈보다는 꿈을 만들어 보이고 싶었다"며 "아직 끝이 아니다. 고려대생에게 희망을 주는 영철버거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박윤예 기자]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5&no=719997

*1:いやまあ、安岩洞あたりがそれでお洒落スポットになったかと言われれば、それは……ですけど、昔は今よりもっともっと……だったです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