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陽市の歌」使用中止騒動と、花田共同墓地「京城操車場第三工区内無縁合葬之墓」碑

こちらのツイートで知ったこの話。その調子でやってると使えなくなるもの続出で収拾つかなくならないか?と思わなくもないのですが、ま、それはそれとして、今のところそれ以上深く突っ込む気にはなりません。

あ、件の歌は、これではないです。

www.youtube.com

それより気になるのは写真の方で、ちょっと確認してみたんですが、他のソースはおおむねどうでもいい高陽市庁の写真を掲げる中、オーマイニュースだけでした。この写真を掲げているのは。

www.yna.co.kr
news.kmib.co.kr
www.hankookilbo.com

고양시 "'친일파' 김동진 작곡 '고양시의 노래' 사용 중단"
이재준 시장 "3·1운동 100주년 '일제 잔재 찾기'와 항일운동 조명에 주력"
19.02.27 09:45 l 최종 업데이트 19.02.27 09:58 l 이한기(hanki)

f:id:bluetears_osaka:20190412130336j:plain
▲ 고양시 화전동 663-9번지 공동묘지에는 일제 전범기업이 세운 묘비석이 있다. 일제시대 조선 땅에서 철도와 다리를 놓으며 부를 축적한 일본인 하자마구미(間組)가 공사장에서 발견된 무연고자의 유해를 강제이장한 뒤 세워 놓은 곳이다. 이재준 시장은 지난 19일 이 곳을 방문했다. ⓒ 고양시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고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고양시(시장 이재준)가 시가(市歌)인 '고양시의 노래'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27일 밝혔다.

'고양시의 노래'를 지은 김동진 작곡가는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 음악인으로 기록돼 있다. 김동진은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일제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노래를 작곡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인물이다.

김동진은 '고양시의 노래' 외에도 대한민국 육군가 등 여러 곡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전국 초·중·고 교가, 시가 등 많은 관공서의 공식 노래에 김동진을 비롯한 친일 음악인의 손길이 미쳐 있다.

이에 고양시는 '고양시의 노래'를 시가로 사용하는 것을 일단 중단하고, 시민 공론화 작업을 거쳐 새로운 시가를 보급할 계획이다.

이처럼 고양시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도시 곳곳에 스며있는 '일제 잔재 찾기'에 나섰다. 일본군 군사 기지로 추정되는 30사단 탄약고,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건설한 덕은동 쌍굴터널 조사 등이 그것이다.

한편, 고양시는 이번에 개최되는 3·1운동 100주년 항일음악회에 북한측 인사 초청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휴전선과 단 2km 떨어진 고양시에서, 남북을 하나로 연결하는 매개체가 될 항일운동가를 부르며 평화의 메시지를 한반도에 전파한다는 것이다.

이재준 고양시장은 "역사의 청산은 정치적 논쟁이 아닌 성장의 토양을 다지는 작업"이라고 강조하며 "시간이 흐르며 점차 잊혀져 가는 일제의 흔적은 역사의 아픔으로 생생하게 보존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항일운동의 정신은 3·1운동 100주년을 기점으로 남북이 하나 되는 평화의 정신으로 승화해 그 불씨를 되살리겠다"고 밝혔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15145

写真の石碑があるという共同墓地の所在地、高陽市花田洞663-9番地を確認してみると、韓国航空大学校の近くです。京義中央線の花田駅で降りて、大学のキャンパスを抜けるのがいちばん手っ取り早いですかねえ。

ko.wikipedia.org
namu.wiki

f:id:bluetears_osaka:20190412131003j:plain

なお、この碑石については、「フィナンシャルニュース」のこの記事の解説が詳しいです。

[단독]일제가 세운 한반도 유일 위령비 발견
파이낸셜뉴스 입력 : 2018.03.25 11:01 수정 : 2018.03.27 09:03

수색동 '경성조차장' 내 무연고 시신 안치한 '합장지묘비'
높이 2.1m의 화강암 비석...건립은 日 '하자마구미'
"일본인이 타국인을 위해 묘비를 세운 전례 없어"

설립 129년에 이르는 일본 굴지의 기업 ‘하자마구미(間組·Hazama Corporation)’ 건설·토목 회사가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무연고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를 세운 것으로 확인됐다.

경기도 고양시 화전동 화전동공동묘지에 위치한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京城 操車場 第三工區内 無緣合葬之墓)라는 비석으로 지금까지 한반도 내에서 일본인이 세운 묘비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위령비가 세워진 지리적 특성을 감안할 때 이 비석이 중국 등 해외에서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제가 한반도에서 수많은 국내외 노동자들을 강제동원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 발견된 위령비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확산되고 있다.

f:id:bluetears_osaka:20190412132501j:plain
▲ 정동일 정동일 고양시청 역사문화재 위원이 '화전동 합장지묘' 비석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 정용부 기자

f:id:bluetears_osaka:20190412132527j:plain
▲ 비석 뒤편에 '1940년 주식회사 간조수색출장소건입'이라 쓰여져 있다.

25일 역사학계와 주요 관계자들에 따르면 경기도 고양시에서 일본력으로 소화(昭和) 15년 3월, 즉 서기 1940년 3월에 만들어졌다고 표기된 위령비가 발견됐다. 높이 2.1m·너비 60cm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2단 비대석을 깔아놓아 한눈에 보기에도 크고 튼튼하게 세워뒀다. 뒷면에는 ‘산 15번지’, ‘산 2번지’라는 주소가 명시돼 있어, 무연고 시신이 발견되거나 목숨을 잃은 장소를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의 맨 아래에는 ‘주식회사 간조수색출장소 건립’(株式會社 間組水色出張所 建立)이라 쓰여 있다. 비석을 세운 주체가 명기된 것이다. 단 위령비에는 매장된 시신의 이름이나 국적 그리고 몇 구의 시신을 합장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표기하지 않았다. 이를 종합해볼 때 이 비석은 1940년에 주식회사 하자마구미 사가 경성조차장 3공구 건설장에서 죽거나 발견된 무연고 시신을 합장해 안치한 위령비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제 토목자본의 전형 '하자마구미'

하자마구미는 일제가 일으킨 러일전쟁과 함께 조선에 진출해 1903년 경성 영업소를 설치하고 식민지 인프라를 구축한 기업이다. 2015년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위원회'가 연구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하자마구미는 주로 철도·수력 발전소·비행장 등의 토목사업을 맡아 한반도 내 총 33개소의 사업장에서 경부선, 한강철교, 압록강 철교, 대전 유성비행장, 수풍 수력발전소 등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1226건의 강제동원 관련 피해 건수가 확인됐으며 현재 한국인 생존자는 17명으로 파악된다. 이명수 자유한국당 의원이 발표한 299개 전범기업 중 한 곳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또 1990년 하자마구미가 펴낸 '하자마구미 100년사'에 따르면 이 회사는 1940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발주한 당시 고양군 은평면 수색리에 경성조차장 건설에 참여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철도국은 한반도의 철도 물동량이 크게 증가하는 반면, 경성역(현 서울역)과 용산역의 규모가 협소하고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 경성과 부산·평양과 함께 '3대 조차장' 건설을 계획했다. 이중 경성조차장은 부지만 약 10만여 평 달하는 어마어마한 면적에 당시 예산 1300만원이 투입됐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완공되지는 못했다.

f:id:bluetears_osaka:20190412132608j:plain
▲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2가 112-2에 위치한 '구 하자마구미 경성지점'의 모습./사진=정용부 기자

f:id:bluetears_osaka:20190412132632j:plain
▲ 일제가 고양시 사업장에 강제노역한 한국인 생존자 중 일부 /사진= 2016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위원회 활동 결과 보고서' 중 일부

■"지속적 조사연구 필요"

비석이 발견된 화전동 공동묘지도 심상치 않다. 비석이 발견된 공동묘지 내에는 약 700기에 달하는 무연고 묘가 수두룩하다. 인근 주민들은 덕은동 국방대학교 터가 일제강점기 시대 중국·러시아 등에서 끌려온 포로를 수용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라고 입을 모았다. 당시 포로들은 아침에 수용소를 나와 각 현장에 노역을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길 반복했으며, 주민들은 포로들이 워낙 시끄러워 수용소가 있던 언덕을 '짱꼴라 고개'이라 불렸다는 증언들도 나왔다.

또 인근에서 오래 살았던 주민들은 일본인은 시신을 차로 실어와 공동묘지에 묻거나 골분을 뿌리기도 했으며, 때로는 이름을 새긴 목판을 두고 가는 모습을 수차례 목격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당시 포로들은 인근 조차장과 철도관사·육군 창고·비행장 등의 군사 시설 건설현장에 투입됐고, 이 과정에서 숨진 시신을 화전동 공동묘지에 안치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비석 또한 수백구 의 무연고 묘들 중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

관계 기관 담당자와 학계에선 하자마구미의 위령비 발견과 함께 일제의 한반도 내 강제동원에 대한 지속적인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확산되고 있다.

비석을 처음 발견한 정동일 고양시청 역사문화재 위원은 “이 일대는 그린벨트와 군사보호구역에 묶여 오랫동안 개발되지 않으면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면서 “전국 어디에서도 일본인이 자국 외의 사람들을 위해 묘비를 세운 전례가 없지만 신원이 밝혀지지 않아 정확히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세웠는지에 대해 추정하긴 어렵다”라고 밝혔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이 비석은 여전히 미스터리 한 부분이 많다"며 "일제 말기 당국은 무연고자를 위한 비석을 설치할 여유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숨지면 출신 지역에 통보를 하게 했고, 특히 경기도 사업장에는 대부분 인근 지역 출신이 투입됐기 때문에 이 비석의 주인은 조선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는 "일본 도쿄의 하자마구미 본사에 위령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자료 공개를 요청해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정용부 기자

https://www.fnnews.com/news/201803051415577274

www.fnnews.com
www.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