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革命53周年

毎年いろいろ話題になることのある日です。今年は朴槿恵大統領就任後、最初の記念日となります。

下の朝鮮日報の記事では、「記念式典に出席した朴大統領」となっていますけど、首相がコメントを発表していることからすれば、大統領は式典には参加していないじゃないでしょうかね…。墓地参拝はしたんでしょうけど。

記事入力 : 2013/04/20 09:27
「四月革命」記念式典に出席した朴大統領

 朴槿恵(パク・クンヘ)大統領は19日午前、国立4・19民主墓地(ソウル市江北区)で行われた四月革命(1960年4月19日、不正選挙に端を発したデモにより、当時の李承晩〈イ・スンマン〉大統領が下野した事件)53周年記念式典に出席した(写真提供=大統領府)。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3/04/20/2013042000365.html

2013年 04月 21日(日)
韓国首相「国民幸福時代を築く」 四月革命から53年

【ソウル聯合ニュース】韓国の鄭ホン原(チョン・ホンウォン)首相は19日、1960年に発生した学生・市民による反政府・反不正闘争、4・19革命(四月革命)の記念式で、「成長と分配、雇用と福祉が好循環する幸福社会を築くことこそ、4・19革命が目指した自由で正義ある国、国民が真の主役となる国をつくることだ」と述べた。

 鄭首相は「新政権は国民一人一人が幸せを感じる新時代を切り開いていく」と表明。これまで数多くの歴史の峠、危機や瞬間を迎えるたびに国民の偉大な底力が発揮されてきたとした上で、「今も国内外で続いている多くの挑戦を賢明に克服できる成功の鍵を握っているのも国民だ。国民の心が一つになる疎通と統合が何よりも重要だ」と強調した。

http://japanese.yonhapnews.co.kr/pgm/9810000000.html?cid=AJP20130419001400882

その他、目についた記事をいくつか。まず、「学生革命」とも言われる4.19を記念する大学行事。当時からある大学のキャンパス内では、しばしば4.19の記念碑を目にします。

「4.19」というプライド

ソウル大で民主化オリエンテーリング

동국대 “우리는 4.19혁명을 기억한다”..3천명 기념등반 등 다양
기사입력 2013-04-19 15:53 기사수정 2013-04-19 15:53


▲4.19혁명 동지회 회원인 윤천영(동국대 농학과 59학번) 전국농업기술자협회장이 19일 헌화를 하고 있다.

동국대가 4.19혁명을 기념해 교직원 및 학생 3000여명 등반대회 등 각종 기념행사를 이어가 눈길을 끌고 있다.

동국대가 19일 오전 11시 4.19혁명 53주년을 맞이해 동국대 만해광장 동우탑에서 기념 추모식을 거행했다.

추모식에는 동국대 박정극 학술부총장과 정각원장 법타스님을 비롯해 4.19혁명 동지회 윤성열 회장과 회원, 동국대 총학생회 학생 등 6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가 열린 동우탑은 동국대가 지난 1960년 11월, 4.19 혁명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로, 이후 매년 4월 19일이면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자랑스런 선배들의 뜻을 기리고자 추모식을 개최해오고 있다.

동국대는 이와 더불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선배들의 뜻을 계승하고 단결을 위한 시간으로 매년 북한산에서 4.19 혁명 기념 동국인 등반대회도 개최하고 있으며, 올해는 지난 12일 3000여명의 교수, 직원,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김경수 기자


▲4.19혁명 53주년을 맞이해 동국대학교 캠퍼스 내 동우탐에서 열린 추모식에 동국대 박정극 학술부총장과 정각원장 법타스님, 4.19혁명 동지회 윤성열 회장과 회원, 동국대 남보라 총학생회장과 학생 등 60여명이 참가했다.

http://www.fnnews.com/view?ra=Sent1501m_View&corp=fnnews&arcid=201304190100218210012144&cDateYear=2013&cDateMonth=04&cDateDay=19

その点でいちばん主張が強いのはたぶん、一日早い「4.18」を記念する高麗大学校でしょう。

4.19혁명 촉발시킨 고려대 4.18의거 마라톤 열려
기사입력 2013-04-19 16:03 기사수정 2013-04-19 16:03


▲고려대 학생들이 지난 18일 4ㆍ18 희망나눔 마라톤 대회를 갖고 있다.

고려대(총장 김병철)는 지난 18일 4.18의거 53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을 오전과 오후에 걸쳐 열었다고 19일 밝혔다.

4.18 의거는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맞서 4.19혁명의 불을 붙인 시위다. 고려대 총학생회가 주최하고 사회봉사단이 후원한 4.18 희망나눔 마라톤은 오전 9시 30분 열렸고 약 200여 명이 참석했으며, 오후 2시에 열린 구국대장정에는 약 5000여명이 참여했다.

'♥/m, 한걸음의 기적'이라는 부제가 붙은 4.18 희망나눔 마라톤은 지난 해부터 고려대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기존에 매년 고려대에서 열어오던 '4.18기념 마라톤' 행사에 1m당 1원씩 후원이라는 취지가 더해졌다.

참가자들은 고려대 중앙광장에서 출발하여 국립4.19민주묘지까지 16.4km를 완주하면 1만6400원을 자율 기부하게 된다. 이번 행사로 모금된 후원금은 고려대 안암병원 소아병동 환우에게 전달된다.

고려대 사회봉사단은 2010년부터 고려대 안암병원 소아병동 봉사활동을 통해 어린이 환자들과 종이접기, 찰흙공예 등을 함께 하며 병마와 싸우는 환자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며 따뜻한 친구이자 인생의 멘토로서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또한 2010년부터는'혈기왕성프로젝트'라는 명명 하에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헌혈캠페인을 벌여 지금까지 약 2000여장의 헌혈증을 고려대 안암병원에 기부해왔다.

고려대는 지난 18일 고려대 4.18기념탑 앞에서 '헌화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김병철 고려대 총장, 주선회 고려대 교우회장, 이기택 4월 혁명고대 회장, 4.18의거 참가 교우들 등이 참석하여 4.18의거로 희생한 고려대생들을 기렸다.

김경수 기자

http://www.fnnews.com/view?ra=Sent1501m_View&corp=fnnews&arcid=201304190100218210012144&cDateYear=2013&cDateMonth=04&cDateDay=19

また、「4.19」のデモは当時、よく知られた馬山・ソウルだけではなく、各地方でも同時多発的に展開されています。今回はその中の一つ、光州の話をクリップしておきましょう。

광주시, 제53주년 4.19혁명 기념행사 개최
2013년 04월 20일 (토) 21:31:30 손은수 기자



광주광역시(시장 강운태)는 19일 오전10시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제53주년 4․19혁명 기념식을 개최한다.

이날 기념식은 4․19단체 회원, 보훈단체장, 지역 기관단체장, 시민, 학생 등이 참여한 가운데 4․19통일의병 선언문 낭독, 4․19혁명 경과보고, 기념사 등의 순으로 열린다.

기념식에 앞서 오전9시50분에는 광주공원 4․19영령 추모비에서 각급 기관․단체장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분향과 함께 참배가 진행될 예정이다.

기념식 전날인 18일 오후4시에는 광주공원 광장에서 4․19관련 단체 주관으로 희생자 영령 추모제와 통일운동 1,000만 서명 촉진대회를 개최했다.

한편, 시는 4․19유공자에게 18일부터 이틀간 4․19혁명 유공자와 동반가족 1인에게 지하철과 시내버스 무임승차를 실시하고, 시립박물관 과 우치공원 무료 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이형석 경제부시장은 “광주는 지난 1960년 3월15일 마산보다 3시간 앞서 자유당 부정선거에 항거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며 “광주 4‧19혁명 정신을 알리고 계승해 세계적 민주․인권․평화 도시로 거듭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http://www.dailyj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03

そう言えば、光州の4.19デモの出発地となった光州高等学校は、光州駅から東に行ったところにありますが、その途中に4.19革命記念館があります。

【光州の風景】4.19革命記念館

"3ㆍ15 부정선거 규탄" 광주 葬送시위 4ㆍ19 첫 유혈사태였다
(16) 광주고에서 시작된 광주 4ㆍ19 혁명
입력시간 : 2013. 04.19. 00:00


4ㆍ19 당시 교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광주고 학생들. 이들은 계림파출소와 경양방죽 쪽 두 갈래로 나뉘어 시내에 진출해 전남여고와 광주여고, 광주일고, 광주공고 등 시내 고교를 돌며 시위 동참을 호소했다.

1960년 3ㆍ15 정ㆍ부통령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자 광주의 민주당 전남도당은 투표소 참관인의 철수를 지시한 후 '부정선거 규탄 거리 시위'를 하자는데 뜻이 모아진다. 그래서 제작된 플래카드가 '곡(哭) 민주주의'였고 훗날 '민주주의 장송(葬送) 시위(데모)'로 불리게 된 이유가 된다.


금남로 카톨릭센터 앞에서 열린 민주주의 장송 시위. 전국 최초의 3ㆍ15 부정 선거 규탄 대회였다.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장송 시위는 전국 최초의 3ㆍ15 부정 선거 규탄 대회였다. 당시 민주당 중앙 당사에서는 4시30분 선거 무효를 선언했고, 마산에서는 이보다 앞선 3시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한 후 시위가 시작된다.

그러나 민주당원이 중심이 된 금남로의 광주 시위는 이보다 앞선 12시50분께였다(동아일보는 당시 시간을 12시45분께로 옛 전남일보는 12시50분께로 쓰고 있다). 이 날 광주 시위는 당시의 동아일보와 전남일보, 조선일보에 보도됐지만 15일 7시께에 일어난 마산의 2차 시위 당시 경찰의 발포로 시위 학생들의 피해가 속출한 마산항쟁에 곧 묻히고 만다.

1000여 군중이 합세한 광주의 3ㆍ15 민주주의 장송 시위는 자유당 정권의 3ㆍ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선거 무효를 선언한 전국 최초의 시위였고, 장총의 개머리판으로 후두부를 맞아 금남로에 흘린 조계현의 피는 4ㆍ19 혁명의 첫 피였다.

19일의 광주 시위는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된다. 그 중심에 이홍길(광주고 3년)이 있었다. 18일, 이홍길은 시내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 벽보판에서 고대생의 데모를 알리는 호외를 접한다. 그리고는 저녁 무렵 그의 계림동 하숙집에 홍갑귀(기), 김신담, 김병옥(욱) 등 10여명이 모여 19일 시위를 모의한다. 여기에 조선대 부속고등학생인 전만길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19일 1교시 난타의 종소리를 신호로 운동장에 집결하기로 약속하고, 종을 칠 타종수로 몸집이 큰 신강식과 조병수를 정한다. 그리고 19일 목이 터져라 외칠 구호를 만든다. 그날 밤에 만든 구호는 '3ㆍ15 부정선거를 다시 하라', '마산의 발포 경찰을 처단하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 '경찰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 등이었다.


담을 넘어 거리로 진출하는 광주공고 학생들. 광주고 학생들과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했다.

19일 시위를 결의했던 학생들이 등교하자 낌새를 눈치 챈 교장은 간부들과 모의 주동 학생을 불러 자중하고 대학 입시에 전념하라고 훈계한다. 이홍길을 비롯한 학생 대표들은 협의 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한 후 시간을 얻어 회의를 진행한 끝에 시위를 감행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이 때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4ㆍ19와 관련된 전국적인 현상으로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타종(打鐘)이 있다. 시위를 계획하면서 신강식, 조병수를 타종자로 지목해놓은 것만 보아도 그 상징적 의미가 짐작된다. 타종이 곧 시위의 상징임은 서울대 선언문의 한 구절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임을 자랑한다" 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미 약속한대로 종소리에 맞춰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하고 학생 대표들도 잠긴 교장실의 문을 박차고 나온다. 1960년 4월19일, 10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운동장에 집결했지만 정문은 이미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정문이 막히자 일부 학생들은 후문을 통해 거리로 박차고 나간다.

후문을 통해 거리로 진출한 학생은 100여 명, 계림동 앞길로 나오자 경찰이 곤봉으로 후려친다. 경찰의 곤봉 세례에 광주고생들은 계림파출소와 경양방죽 쪽의 두 갈래로 나뉘어 시내에 진출,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일고, 광주공고 등 시내 고교를 찾아다니며 동참을 호소한다. 이에 광주여고생들은 판자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시위대에 합류한다.

오후 2시, 금남로는 몰려드는 고교생들로 물결을 이룬다. 일부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수천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 학생 의거 선배를 따르자"고 외치며 시내 곳곳 파출소와 소방서를 파괴하며 경찰과 충돌한다.

그리고 광주 4ㆍ19혁명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한다. 19일 오후 8시경, 광주 학동 파출소 앞에서 시위하던 강정섭(당시 17세)이 경찰이 쏜 총알을 맞고 좌우상박부 관통상으로 숨진다. 그의 신원은 10일이 지난 4월 29일이 되어서야 확인된다.

강정섭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지만 발포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방치되다 1961년 2월, 특별검찰부에 의해 학동파출소 김남중 주임, 이용수ㆍ김해수 순경 등이 공소됨으로 그 진상이 드러난다. 공소장에 의하면 오후 8시경 파출소로 밀려오는 시위대 1000명을 향해 김남중은 칼빈 실탄 6발을, 이용수와 김해수는 각각 3발과 4발을 발사한다. 그리고 그 중 한발이 파출소에서 70여 m 떨어진 곳에 있던 강정섭에게 명중된다. 시위대들에 의해 전대 병원에 옮겨졌지만, 그의 몸은 이미 식어 있었다.

학생 시위대의 최대 격전지는 광주경찰서였다. 1000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 경찰서로 모여들었고,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이에 맞서고 있었다. 시위대와 경찰과의 밀고 당기기를 수차례, 9시25분께 40명의 경찰 돌격대는 시위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탕, 탕, 탕, 경찰의 발포가 시작된다. 9시40분이었다. 여기저기서 시위대가 쓰러졌다. 경찰은 금남로로 후퇴하는 시위대를 끝까지 쫓아와 사격을 해댔다. 순식간에 이귀봉(당시 18세)을 비롯해 7명이 금남로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한다. 20일 오전, 농고생들이 합세한 전남대생들의 시위가 있었지만 무장한 군인과 장갑차의 공격으로 해산된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시위는 이후 목포 여수순천 등 전남 일대로 퍼져나간다.

광주고등학교 정문에 '광주 4ㆍ19 민주 혁명 발상지' 표지판과 교정 안쪽에 '광주 4월 혁명 발상 기념탑' 및 '4ㆍ19 혁명 그날' 시비 등을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고, 계림동(구 시청 옆)에는 '4ㆍ19혁명 기념관'이 건립돼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4ㆍ19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발상지인 광주고등학교 앞길(중앙초교~대인시장~광주고~서방 4거리)을 '4ㆍ19로'로 지정했고 버스 419번이 이 구간을 운행하도록 하고 있다.

노성태 빛고을역사교사모임 회장ㆍ국제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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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원 추모비, 시위 장면ㆍ조지훈 詩 새겨


광주공원 4ㆍ19 희생영령 추모비.

1962년 4월19일 광주공원에 '광주 4ㆍ19 의거 희생영령 추모비'가 세워진다. 4ㆍ19 당시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고 4ㆍ19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중앙에 4ㆍ19를 양각하고 우측에는 4ㆍ19 당시의 시위 모습을, 좌측에는 조지훈의 시를 새겼다.

자유여 영원한 소망이여.
피 흘리지 않곤 거둘 수 없는 고귀한 열매여.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맨 가슴 총탄 앞에 헤치고 달려왔더이다.
불의를 무찌르고 자유의 나무의 피거름되어
우리는 여기 누워 있다.
잊지 말자, 사람들아.
뜨거운 손을 잡고 맹세하던
아 그 날 4월 19일을.

전국 최초로 3ㆍ15 부정 선거의 무효를 외쳤던 광주 3ㆍ15 장송 시위는 진주, 마산을 돌아 다시 광주고생들이 중심이 된 광주 4ㆍ19혁명으로 타오르게 된다. 광주 4ㆍ19 혁명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을 있게 했던 한국 민주 지형의 토대였고 허리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그들이 흘린 피는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민주, 인권의 광주 정신이 된다.

http://www.jnilbo.com/read.php3?aid=136629720041528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