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の陸士出身韓国人:李基東『悲劇の軍人たち』書評記事

興味深い本の書評記事が出ていたので、日韓対訳でクリップ。

実際の本に当たるには、韓国語で読まないといけないですけどね。こういう書籍を、よりカジュアルに翻訳で読むことができる環境なりシステムなりを構築できないかなー。

www.kyobobook.co.kr

記事入力 : 2020/08/15 17:00
「光復のために学ぼう」…日本の陸士出身韓国人の苦悩と背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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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年陸軍士官学校15期生として卒業した朝鮮人留学生らが、予備課程である東京の成城学校時代に撮った写真。/写真=一潮閣

「日本軍の将校だったという事実だけで親日派と断定するのは穏当でない」

【新刊】李基東著『悲劇の軍人たち』(一潮閣)

f:id:bluetears_osaka:20200821095301j:plain:right 大韓帝国が亡国を迎えた1910年8月、東京の陸軍中央幼年学校には朝鮮人およそ40人が留学中だった。大韓帝国が設立した武官学校の1学年・2学年に通っていた彼らは、1909年に統監府の圧力で学校が閉鎖された後、国費で留学に来た20歳前後の青年たちだった。陸軍士官学校の予備課程である中央幼年学校にやって来て1年にもならない彼らは絶望した。「全員辞退して帰国しよう」…。激論が繰り広げられた。先輩の池錫奎(チ・ソクキュ)が語った。「学ぶべきことを最後まで学んだ後、中尉になる日に軍服を脱いで投げ、祖国の光復のため立ち上がろう」。

 「大韓帝国の忘れ形見」として知られる彼らは、1914年5月に卒業した日本の陸士26期生(13人)と翌年卒業した27期生(20人)だ。日本軍に配属された彼らに、3・1運動は衝撃を与えた。池錫奎(26期)、李種赫(イ・ジョンヒョク、27期)は部隊を脱出して独立運動に乗り出した。チョ・チョルホ(26期)も1918年に中尉へ昇進するや予備役編入を選んで民族運動に飛び込んだ。池錫奎(1888-1957)は、後に光復軍の総司令官を務めた独立運動家・李青天(イ・チョンチョン)の本名だ。

 『悲劇の軍人たち』は、旧韓末から日帝末期まで、日本の陸軍士官学校に身を置いた朝鮮人141人の生涯を追跡した労作だ。大物の国史学者、李基東(イ・ギドン)東国大学名誉教授が1982年に出版した著書を大幅に修正した。

■革命を夢見た陸士11期生

 1895年に留学した11期生21人は、甲午改革の際に実力者として台頭した朴泳孝(パク・ヨンヒョ)が自ら選んだ国費留学生だった。1896年に高宗がロシア公使館に滞在する「俄館播遷」が起こると、官費の支給が中断され、親日派として追われた。1899年11月に卒業した彼らは東京の第1師団で見習士官を終え、1900年7月に大韓帝国参尉(少尉に相当)として任官する予定だった。ところが帰国の指示もなく、俸給も送ってもらえず、生活難に苦しんだ。一部は秘密結社「革命一心会」を結成し、日本に亡命中の兪吉濬(ユ・ギルジュン)と接触して革命を謀議した。帰国したメンバー8人は直ちに逮捕された。張浩翼(チャン・ホイク)など3人は1904年3月の日露戦争勃発直後、死刑に処された。万民共同会運動で当時服役中だった青年・李承晩(イ・スンマン)は、監房の窓からこの場面を目撃した。処刑直前に万歳を三唱した張浩翼の堂々とした態度に、深い感銘を受けた。朝鮮人が日本の陸軍士官学校に入学するケースは、併合後に一旦実施例がなくなり、1933年から再び行われるようになった。朝鮮軍司令部側から学校を訪ねてまわり、入学を勧めた。蔡秉徳(チェ・ビョンドク)と李鍾賛(イ・ジョンチャン)が1933年4月に49期生として4年制の陸軍士官学校に入った。翌年、50期生として李竜文(イ・ヨンムン)と池麟泰(チ・インテ)がやって来た。蔡秉徳と李鍾賛は朝鮮人士官生徒の集まりである「鶏林会」を作った。1933年から解放直前まで、陸士に留学した鶏林会メンバーは72人。これは満州国の将校や軍官学校予科出身で陸士を卒業した朴正煕(パク・チョンヒ)、丁一権(チョン・イルグォン)など24人を含めた数字だ。日中戦争と太平洋戦争が起こる中で戦死者も続出した。1939年にノモンハンソ連軍と空中戦を繰り広げて戦死した池麟泰、インドネシアパレンバン飛行場空襲中に不時着して自決した崔鳴夏(チェ・ミョンハ)、沖縄に出撃した崔貞根(チェ・ジョングン)などだ。

■6・25開戦からわずか1カ月で戦死した蔡秉徳少将

 光復を迎えた鶏林会メンバーらは、米軍政の下で国防警備隊創設に参加した。1948年の政府樹立直後、李応俊(イ・ウンジュン)と蔡秉徳が相次いで陸軍本部総参謀長を務め、李竜文は蔡秉徳の下で陸軍本部情報局長になった。また金貞烈(キム・ジョンリョル)は初代空軍本部総参謀長を務めた。陸軍と空軍は鶏林会出身者が掌握した。

 6・25戦争で先頭に立って戦ったのも彼らだった。6・25戦争勃発からわずか5日で陸軍総参謀長を解任された蔡秉徳少将は、同年7月に慶尚南道河東で北朝鮮軍と戦い、戦死した。35歳だった。李竜文准将は1953年6月24日、智異山共産ゲリラ討伐中の飛行機事故で散華した。朴範集(パク・ボムジプ)将軍は1950年11月、故郷の咸興付近の上空で作戦指揮中、飛行機が墜落した。戦争初期に起きた漢江橋梁爆破の責任者だった崔昌植(チェ・チャンシク)工兵監は無念の死刑となった。

 旧韓末から日帝時代まで、日本の陸軍士官学校に通った朝鮮人の選択をどう見るべきか。シベリアに亡命して独立運動を行った李甲(イ・ガプ、15期)、日本軍の騎兵中尉から独立軍司令官に変身したキム・ギョンチョン(23期)、戦犯裁判にかけられて死刑になった洪思翊(ホン・サイク)中将(26期)、広島原爆で犠牲になった王族のイ・ウ(45期)…。映画の主人公のように劇的な生涯を過ごした人々だ。中尉昇進と共に独立運動に乗り出すと決意した大韓帝国武官学校出身者ですら、実践した人は少数だった。李基東教授は「日帝時代に日本軍の将校だったという事実だけで親日派と断定するのは穏当でない」と語り、「解放後の創軍や6・25戦争において寄与した部分も評価すべき」だとした。736ページ、4万2000ウォン(約3740円)。

金基哲(キム・ギチョル)学術専門記者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20/08/14/2020081480005.html

"광복을 위해 배우자"… 日육사 출신 한국인의 고뇌와 배신
조선일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0.08.08 05:00

"일본군 장교였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 단정하는 건 온당치 않아"

f:id:bluetears_osaka:20200821095356j:plain:left비극의 군인들
이기동 지음|일조각|736쪽|4만2000원

망국(亡國)을 맞은 1910년 8월,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엔 조선인 40여 명이 유학 중이었다. 대한제국이 세운 무관학교 1·2학년에 다니던 이들은 1909년 통감부 압력으로 학교가 문을 닫은 뒤 국비로 유학 온 스무 살 안팎 청년들이었다. 육사(陸士) 예비 과정인 중앙유년학교에 들어온 지 채 1년이 안 된 이들은 절망했다. '전원 자퇴하고 귀국하자'…. 격론이 벌어졌다. 연배가 높은 지석규가 말했다. '배울 것은 끝까지 배운 뒤 중위가 되는 날 군복을 벗어 던지고 조국 광복을 위해 궐기하자.'

'대한제국의 유복자'로 알려진 이들은 1914년 5월 졸업한 일본 육사 26기생(13명)과 이듬해 졸업한 27기생(20명)이다. 일본군에 배속된 이들에게 3·1운동은 충격을 줬다. 지석규(26기), 이종혁(27기)은 부대를 탈출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조철호(26기)도 1918년 중위로 승진하자 예편하고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지석규(1888~1957)는 훗날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청천의 본명이다.

'비극의 군인들'은 구한말부터 일제 말까지 일본 육사에 몸담은 조선인 141명의 생애를 추적한 노작(勞作)이다. 원로 국사학자 이기동(77) 동국대 명예교수가 1982년 낸 책을 38년 만에 대폭 수정했다.

◇혁명 꿈꾼 육사 11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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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의친왕 아들 이우의 결혼 사진. 아내는 박영효 손녀인 박찬주다. 1933년 일본 육사 45기로 졸업한 이우는 일제에 저항적이었으나 1945년 히로시마 원폭으로 희생됐다. /일조각

1895년 유학을 떠난 11기생 21명은 갑오개혁 때 실력자로 떠오른 박영효가 직접 뽑은 국비 유학생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관비 지급이 중단되고 친일파로 몰렸다. 1899년 11월 졸업한 이들은 도쿄 1사단에서 견습 사관을 마치고 1900년 7월 대한제국 참위(소위)로 임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귀국 지시도 없고 봉급도 보내주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렸다. 일부는 비밀결사 혁명일심회를 결성, 일본에 망명 중인 유길준과 접촉하면서 혁명을 모의했다. 귀국한 회원 8명은 곧 체포됐다. 장호익 등 3명은 1904년 3월 러일전쟁 발발 직후 사형당했다. 만민공동회 운동으로 복역 중이던 청년 이승만은 감방 창문으로 이 장면을 목격했다. 처형 직전 만세를 세 번 외친 장호익의 당당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조선인의 일본 육사 입학은 강제 병합 이후 뜸하다 1933년부터 다시 이어졌다. 조선군사령부에서 학교를 찾아다니며 입학을 권했다. 채병덕과 이종찬이 1933년 4월 49기생으로 4년제 육사에 들어갔다. 이듬해 50기생 이용문·지인태가 들어왔다. 채병덕과 이종찬은 조선인 사관생도 모임인 '계림회'를 만들었다. 1933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육사에 유학한 계림회원은 72명이다. 만주국 장교와 군관학교 예과 출신으로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정일권 등 24명을 포함한 숫자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사자가 속출했다. 1939년 소련군과 노몬한에서 공중전을 벌이다 전사한 지인태, 인도네시아 팔렘방 비행장 공습 중 불시착해 자결한 최명하, 오키나와로 출격한 최정근 등이다.

◇6·25 한 달 만에 전사한 채병덕 소장

광복을 맞은 계림회 회원들은 미 군정 아래서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이응준과 채병덕이 육군본부 총참모장을 잇달아 맡았고, 이용문은 채병덕 아래 육본 정보국장이 됐다. 김정렬은 초대 공군본부 총참모장을 맡았다. 육군과 공군 모두 계림회 출신들이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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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육사 15기생으로 졸업한 조선인 유학생들이 예비과정인 도쿄 세이조학교 시절 찍은 사진. /일조각

6·25 전쟁에서 앞장서 싸운 것도 이들이었다. 6·25 전쟁 발발 닷새 만에 육군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채병덕 소장은 그해 7월 경남 하동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용문 준장은 1953년 6월 24일 지리산 공비 토벌 중 비행기 사고로 산화했다. 박범집 장군은 1950년 11월 고향인 함흥 부근 상공에서 작전을 지휘하다 비행기가 추락했다. 전쟁 초 한강 다리 폭파 책임자였던 최창식 공병감은 억울하게 사형당했다.

구한말에서 일제 시대까지 일본 육사로 간 조선인의 선택을 어떻게 봐야 할까. 시베리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이갑(15기), 일본군 기병 중위에서 독립군 사령관으로 변신한 김경천(23기), 전범 재판에 회부돼 사형당한 홍사익 중장(26기), 히로시마 원폭에 희생된 왕족 이우(45기)…. 영화 주인공처럼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인물들이다. 중위 진급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서겠다고 결의한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들조차 실천에 옮긴 사람은 소수였다. 이기동 교수는 "일제 시대 일본군 장교였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로 단정하는 건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해방 이후 창군(創軍)과 6·25 전쟁에서 기여한 몫도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08/20200808002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