こちらの続きです。このシリーズもこれで終わりになります。
【天安の風景】国立望郷の丘を訪れる・3:慰霊塔と三つの墓域 - 大塚愛と死の哲学
まず、薔薇墓域のいちばん奥まった場所に見えるのが、1993年に完成した奉安堂(納骨堂)の「望郷の家」です。
망향의동산 안내 망향의동산 안내도 망향의집(봉안당) | 국립망향의동산
サイトに公開されたデータを見る限り、受け入れにはまだまだ余裕があります。
一般の墓地の納骨堂であれば、普段から参拝自由なところがほとんどですが、基本的に遺族は国外在住者なはずのこちらでは、人々が日常的に訪れることが少ないこともあってか、施錠されていました。参拝者は、管理事務所に連絡してその都度開けてもらうのでしょう。
ただし、将来的には、例えば従軍慰安婦関連の追慕空間などがこちらの内部に置かれたりすれば、もう少し開放的になるかも知れません。
さて、この奉安堂から薔薇墓域を囲むように外縁を回って下っていくと、中腹あたりに「無縁故合葬墓域」と称する墓域があります。
案内標識となっている追慕碑は「1994年」となっていますが、設置されている慰霊碑群の中には1970年代のものもありますので、望郷の丘開場後間もない時期から墓域として存在はしていたようです。ここに数多く立ち並ぶ慰霊碑は、1970年代から2000年代にかけて設置されています。
その一覧は、望郷の丘サイトで確認できます*1。
망향의동산 안내 망향의동산 안내도 합장묘역 | 국립망향의동산
ですが、その前に、墓域の入り口階段の脇の、誰もが目にするはずのところに、そこの一覧には載っていないもう一つの石碑があります。載っていない理由はおそらく、単に「墓碑ではない」というだけのことだと思います。
これです。
日韓対訳で碑文が刻まれていますけど、とりあえず、「日本人の謝罪碑」「1983年12月15日 元労務報国会徴用隊長 吉田清治」などの文字は読めると思います。
日本語環境だと、こちらのページに同じ碑の写真があります。内容を読むと2005年頃の記事のようです。
…が、そこには「何の碑か」がハッキリとは書いていないために、検索等で引っかからず、「それ」に気付く人はこれまであまりいなか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
韓国内でもさほど知られているとは思えませんが、「吉田清治」に言及する際には引き合いに出される程度には、知られているようです。
용서 비는 '일본인 사죄의 비'
2007년 03월 28일 (수) 이재경 기자
요시다 세이지 위안부 징용대장, 天安에 건립
위안부 동원 비인도적 행위·정신 반성하며 사죄아베 총리 등 일본 정치 수뇌부들의 잇딴 일본군 위안부 관련 망언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일본 정부가 1993년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한 '고노 담화'를 이끌어 낸 요시다 세이지(吉田請治)가 충남 천안 망향의 동산에 세운 '사죄의 비'가 뒤늦게 조명을 받고 있다.
천안시 성거읍 요방리 산6번지 일대 36ha에 지난 1976년 들어선 국립 '망향의 동산' 정문 입구에서 동쪽으로 200여m를 올라가면 산끝자락에 무연고 묘역이 있다.
이곳은 정부가 일제에 강제로 징용됐거나 위안부 등으로 끌려갔다가 일본 등 해외에서 원혼이 된 동포들 중 국내외에 연고가 없는 이들을 모셔 놓은 곳.
이 묘역에는 10기 정도의 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중 유일하게 눕혀져 있는 비가 하나있다.
묘비명은 '일본인 사죄의 비'.
이 비는 지난 1983년 12월 15일 세워졌다. 태평양전쟁때 조선인을 강제징용하고 위안부 동원 임무를 맡았던 요시다씨가 참회의 뜻으로 세운 것이다. 그는 1991년 홋카이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노무보국회의 야마구치현 동원부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인 6000명을 강제 연행했고, 이중 위안부 여성도 많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주로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 동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증언이 신문에 기사화되면서 폭발적인 논란이 일었으며, 그는 일본 국수주의자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2년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위안부의 실체를 인정해 발표한 일 정부의 공식 문서인 '고노담화'(1993년 8월)를 이끌어냈다.
이에 앞서 그는 자신의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사죄하는 뜻에서 '조선 위안부와 일본인', '나의 전쟁범죄'라는 제목의 책 두 권을 발간했다.
이때 출판사로부터 받은 인세로 그는 1983년 겨울 한국에 건너와 강제징용과 위안부로 끌려가 희생된의 한국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천안에 있는 국립 망향의 동산에 사죄의 비를 세웠다.
이 비는 같은 묘역에 세워진 10여기의 비와는 달리 유일하게 눕혀져 있다. 그가 비문 건립의사를 밝히자 이두훈 한국 중소(中·蘇)이산가족회장이 "비를 세울 염치도 없는 사람들이다. 세우지말고 누워있게 하라"고 일갈해 결국 눕혀지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금 미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결의안 채택을 앞둔 일본 정가는 아베 총리의 연이은 망언도 부족해 26일에는 시모무라 하쿠분 관방부장관이 "일부 (한국인) 부모들이 딸을 팔았던 것으로 본다"는 망언을 내뱉어 세계 여론을 들끓게 하고 있다. 27일 오전 황사바람을 맞으며 쓸쓸히 누워있는 요시다의 '사죄의 비'가 그런 일본의 작태를 말없이 꾸짖고 있다. 그는 비문에 "귀하들께서는 일본의 침략전쟁시 징용과 강제연행으로 강제노동의 굴욕과 고난중에 가족과 고향땅을 그리워하다 귀중한 목숨을 빼앗겼습니다.나는 징용과 강제연행을 실행지휘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비인도적 그 행위와 정신을 깊이 반성하며 이곳에 사죄하는 바입니다.늙은 이 몸이 숨진 다음에도 귀하들의 영혼앞에서 두 손 모아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 1983년12월15일 元勞務報國會 징용대장 吉田請治"이라고 용서를 빌었다.
http://www.cctimes.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56005
‘요시다’가 보이지 않는 일본
김병길 주필
18면 2012년 08월 30일 (목) 김병길 주필
▲ 김병길 주필정신대 끌려 갔다온 엄마 때문에
놀림받던 어릴적 동네 친구
‘징용귀신’요시다의 용감한 증언
일제 위안부 실체 폭로
양심적인‘요시다’자취감춘 일본
‘과거사 부정’역주행 광풍 확산1950년대, 철부지 초등학교 시절 ‘데신따이’라는 말을 처음들었다. 아이들이 동네의 한 친구가 미울때는 “데신따이, 데신따이”라면서 놀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데신따이’가 무슨 뜻인지는 제대로 모르면서 ‘데신따이’라면서 놀리고 있었다.
나 역시 ‘데신따이’가 뭔지 몰라 집에와서 어른들에게 물어보니 일제때 강제로 끌려간 종군위안부(여자 정신대)라고 했다. 그런데 왜 아이들이 그 친구에게 ‘데신따이’라며 놀렸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의 어머니가 일제때 열여덟 나이에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다 왔다는 것이다.
이후 ‘데신따이’는 철이 든 이후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1992년 태평양 전쟁중 정신대 강제 연행자로 악명높은 ‘징용귀신’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증언을 듣고 ‘데신따이’의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당시 78세의 요시다는 아마 죽기 전 죄업을 마지막으로 털어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20만명의 부녀자를 노예사냥 하듯이 체포해 전장에 몰아놓고, 패전후에는 사지(死地)에 버려둔 채 철수한 행위가 유대인을 가스실에 집단 학살한 나치스 범죄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했다.
요시다는 1943년 한국인 강제연행 목적으로 일제가 만든 노무보국회 야마구찌현(山口縣)본부 동원부장이었다. 그때 한국인 징용자 5,000명, 종군위안부 1,000명 이상을 직접 연행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리고 당시 “미야자와(宮澤喜一)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어떤 말로 사죄할지 예의주시하겠다”며 일본 정부는 사죄의 성의표시로 1조엔의 ‘선린복지기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시다는 일본 정부가 정신대 ‘모집’에 ‘관여’했었다는 당시 미야자와 총리의 언급에 대해 “그것은 모집이 아니라 노예사냥보다 더한 체포·구금이었다”고 했다. 또 일본 정부가 위안소 관리에 관여했다는 말에 대해서도 “위안소라면 안락한 매춘시설로 상상되지만 실제로는 마굿간과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으며, 매춘이 아니라 집단강간행위였다”면서 분개했다.
그의 증언을 정리하면 일제는 조선인 징용자 200만, 종군 위안부 20만명을 연행했으며 국가권력으로 위안부를 강제연행한 곳은 한국뿐이었다. 그는 서부군사령부의 명령이 있을 때마다 자신이 책임자가 되어 10여명의 징용대를 이끌고 한국에 왔다. 현지 경찰과 군부대에서는 트럭과 20~50명의 지원병력을 동원했다. 경찰이 미리 조사한 자료와 지도로 지원병력이 마을을 포위한 다음 마을 사람들을 모두 넓은 마당에 모아놓고 젋고 건강한 여자만 체포했다니 노예사냥이나 다름 없었다. 또 1943년 무렵에는 미혼 여성들은 거의 다 끌려가고 없어 젊은 주부들을 연행했으며 주로 영·호남과 제주도 지역이었다.
이렇게 붙잡아들인 여자들은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에 수용했다가 일본으로 끌고가 주로 동남아시아·남태평양 군도의 전쟁터로 보냈다. 일본군은 패전 후 그녀들이 미군포로가 되어 기밀이 탄로 날 것이 두려워 집단 살해하거나 사지에 버려두고 철수했다.
1914년 후쿠오카 현(福岡縣)에서 출생한 요시다는 일본의 괴뢰정권이었던 만주국 관리를 지냈고, 중국 남경(南京)과 한구(漢口)에서 장교대우 군무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어 야마구찌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으로 발탁되었다. 당시에는 한국인 징용자와 정신대 강제연행이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언제나 목표초과에 급급했다고 밝혔다.
나이 60세가 되면서 옛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요시다는 자신의 범죄행위를 참회하는 수기 집필을 계기로 적극적인 사죄운동을 벌였다. 1983년 발간된 <나의 전쟁범죄>라는 고백록을 출판한 뒤 받은 인세로 1984년 천안(天安) ‘망향의 동산’에 사죄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일본에 알려지자 “왜 지난 일들을 들추어 내느냐”는 일본인들로 부터 수많은 협박전화와 편지를 받았다.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일본군 위안소는 당시 군(軍)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 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관여했었다”며 위안부 동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고노 장관은 일본군위안부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의 사죄를 요구하고, 중국과 센카쿠 영토분쟁이 심화된 이후 일본사회에서 요시다 같은 양심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는 고노 장관의 사과까지 부정하고 과거사(史)를 반성한 ‘자기 과거사’까지 부정하고 있으니 막가자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1983年当時の吉田自身の個人的な「誠意」については、私は必ずしも否定す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ですが、今この2016年の段階でこの碑文を目にすると、やはり政治的に「取扱い注意」の物件であると言わざるを得ません。仮にここに「慰安婦被害者特別墓域」を造成するとすれば、今まで数十年間ほぼ捨て置かれていたこの碑が俄然注目を集めても、不思議ではありません*2。
「国立望郷の丘」に「慰安婦被害者特別墓域」を造成へ - 大塚愛と死の哲学
この件、今後も政治的に揉めるのは確実なので、その前提となる実証的かつ学術的なところをしっかりと固めておく必要があ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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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り口で大きく寄り道をしてしまいましたが、肝心の墓域の墓碑の写真も、いくつか掲げておくことにします。
先の一覧表と照らし合わせながら、建立者や碑文の内容などを読みこんでいくと、いろいろ見えてくることもあると思います。私自身は撮るのが精一杯で、その辺まだちゃんとやっていません。
また、サイト上の一覧は現状を反映した最新のものではなく、最近の墓碑の中にはそこから漏れているものもあります。
誰か、労力も根気も要るけど、悉皆調査してデータベース化してくれへんかなあ…。
キリがなくなるので、今回のところはこのへんで切り上げて、そろそろ帰るとし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