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関連記事:済州の陸軍病院と戦争勃発直後のメディア状況

とても全部は取り上げてられませんので、興味を惹いたエピソードを収めた記事を2本ばかり。済州にあった陸軍病院の話と、6.25当時、戦争勃発から100日のメディアの話です。

한국전쟁 당시 제주 98육군병원…쓸쓸히 사라져 간다
송고시간 | 2016/06/2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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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제주 98육군병원 순직 군의관 충혼비
(제주=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부상자를 치료하다가 순직한 98육군병원의 군의 요원을 기리기 위한 충혼비가 24일 누구도 돌보지 않은 듯 풀숲에 덮인 채 가려져 있다. 풀숲 사이로 '겨레 위해 몸 바친 제 영위의 공적은 기리 조국 위해 바치오리… 제98육군병원 장병 일동'이라고 적힌 글귀가 보인다. 2016.6.24

최후방서 50만 부상병 치료…격무로 군의관 순직하기도
초라한 병동 건물 1채, 풀숲에 가린 충혼비만 역사 증언

(제주=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소령 김의헌·하사 윤기만·일병 박희덕 충혼비'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봉 부근에 있는 대정여고 동쪽의 작은 오솔길에는 충혼비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충혼비에는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부상자를 치료하다가 순직한 군의 요원을 기리는 글귀가 선명한 군의(軍醫) 마크를 바탕으로 적혀 있다.

현재는 무성히 자란 풀숲에 가려 제대로 찾아볼 수조차 없는 이 충혼비만이 60여년 전 이곳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무수한 부상병을 치료한 98육군병원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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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98육군병원에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군의관 [김웅철씨 제공 =연합뉴스]

98육군병원은 대정읍 일대에 자리 잡았던 육군 제1훈련소 부설 군병원으로 한국전쟁 당시에는 최후방에 있었다.

1951년부터 1956년 폐쇄될 때까지 5년간 50만 명가량의 부상병 치료를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 병동은 단단히 지어진 돌집이었고 막사 병동 등을 합하면 50여 동에 400여 병상 규모였다.

대령급 원장에 군의관은 최대 10여명, 민간인 간호사 7명, 의무요원 40∼50명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매일 같이 후송돼 오는 부상병을 치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98육군병원은 육지부의 다른 군 병원을 거쳐 부상이 심한 병사들이 후송돼 오기 때문에 특성상 사망자가 많았다. 많을 때는 하루 15구의 시신을 병원 옆 '노른곶 화장터'에서 화장했다고 한다.

병원 터와 건물은 1956년 폐쇄된 뒤부터 10년간 방치돼 있다가 1964년 3월 대정여자중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일부 병동들을 개축, 임시교사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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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육군병원 터에 대정여중고가 들어선 1964년의 모습 [김웅철씨 제공=연합뉴스]

현재는 현무암을 다듬어 만든 160여㎡ 병동 1채만 남아 있으며 이마저도 여러 번 개축돼 지붕이 바뀌어 옛 모습을 잃었고 한쪽 벽면은 목재 등이 덧붙여져 가려 있다.

흐르는 세월과 무관심에 6·25 전쟁 유적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주민들은 남아 있는 병동만이라도 등록문화재로 지정, 보전해달라고 요구했으나 3년째 아무런 답이 없다.

'강병대(육군 제1훈련소)-그리고 모슬포'라는 사진자료집을 발간한 향토사학자 김웅철(66)씨는 "98육군병원이 제주도민을 치료해주기도 했으며 지역에 의료기술을 전수해주는 등 지역 의료발전에 큰 기여도 했다"며 "병원 흔적이 사라지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모슬포에 있는 강병대 교회 등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고 관리 주체가 생기면서 잘 보존되고 있다"며 "그러나 중공군 포로수용소 등 정부 관리가 허술한 시절에 망가져 버린 유적지는 다시 복원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98육군병원 병동도 등록문화재로 지정, 관리하지 않으면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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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읍 향토사학가 김웅철씨가 현재 남아 있는 98육군병원 1동을 가리키고 있다.

점차 사라져가는 98육군병원의 역사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병원 이전을 앞두고 1955년 10월 31일 장병들이 자비를 털어 순직한 전우를 위해 세운 오직 충혼비만이 증언한다.

"겨레 위해 몸 바친 제 영위의 공적은 기리 조국 위해 바치오리… 제98육군병원 장병 일동"

2016/06/24 06:01 송고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6/23/0200000000AKR201606231311000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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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읍 소재 98육군병원 터의 충혼비 풍경 - 뉴스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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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うした「知られざる戦跡」は、今も残っているところには残っているものです。ソウルも例外ではありません。

www.youtube.com

この動画に出てくる「海兵隊104高地戦跡碑」、こないだランニングマンに出ていたアンソンギがソンジヒョを待ち構えていた場所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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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chosun.com

そう言えばあの回、ミアリコゲとか漢江大橋とか、朝鮮戦争当時の戦跡を巡っていました。まさにこの記事が取り上げている時期に起きた事々の現場です。

한국전쟁 발발 직후 100일…전쟁소식은 어떻게 전파됐나
송고시간 | 2016/06/25 07:00

이불 뒤집어쓰고 단파 라디오 청취·면대면 입소문

(서울=연합뉴스) 이슬기 기자 =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7시. 국방부 정훈국은 국영 중앙방송국을 접수하고 아침방송을 중단했다. 임시뉴스로 남침 사실이 발표됐다. 자세한 전황은 모른 채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난 사실만 알게 됐다.

하지만 민심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전쟁 발발 이튿날도 대대적인 피란 행렬은 없었다. 서울운동장에서는 야구경기가 진행될 정도였다.

1949년 내내 38선 인근에서 남북한의 충돌이 계속됐기 때문에 그날의 남침도 그 연장선으로 여겨졌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북한 인민군의 서울 점령, 그해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수복까지 서울 시민들은 어떻게 전쟁 소식을 접하고 전파했을까.

25일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김영희 책임연구원의 논문 '한국전쟁 초기 전쟁 소식 전파와 대응의 커뮤니케이션'에 따르면 전쟁 발발 소식은 국영 라디오방송을 통해 처음 보도돼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졌다.

◇ 6월 25∼27일…전쟁 초기 3일

6월 25일 일요일 오후, 을지로 6가 라디오 가게 앞은 뉴스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가정집에도 전기가 들어와 라디오를 켤 수 있었다. 낮에 전기가 들어오는 경우는 이승만 대통령이 특별방송을 할 때 외에는 드문 일이었다.

이튿날인 26일에는 하루 동안 호외가 두 번 돌았다. "괴뢰군의 38 전선에 긍한 불법남침." 대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흘째인 27일 새벽 라디오에서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가 수도를 수원으로 옮긴다는 내용의 특별방송을 했다.

민심이 불안해하자 천도 소식은 취소됐고, 오전 10시 국방부는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반격에 나섰다는 특별발표를 보도했다. 이는 사실과 달랐다. 당시 북한군은 이미 서울 미아리고개에 접근해 있었다.

사흘째에는 불안한 분위기가 도시에 팽배했다. 사람들은 정확한 정보를 원했지만 자꾸만 가까워져 오는 포탄 소리의 현실과 보도는 달랐다.

미국이 운영한 '미국의 소리'(VOA) 한국어 방송, 미군이 운영한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 일본 NHK 등에 의지했다.

서울 주요 신문들은 27일까지는 급박한 전시 상황을 보도하고 호외도 발행했다. 하지만 28일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신문 발행은 중단됐다.

그 후 9월 28일 서울이 다시 수복될 때까지 서울 시민들이 접할 수 있는 남한의 미디어는 부산으로 피란가서 운영한 중앙방송뿐이었다. 그마저도 전쟁 초기 출력이 너무 약해 서울에서는 듣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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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인민군 서울 점령…9월 28일 서울 수복

북한은 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부터 방송국부터 접수했다. 오후 9시 북한 혁명송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일성의 서울 해방 축하문이 방송됐다. 평양중앙방송국 프로그램도 중계됐다.

북한 정부의 기관지 '조선인민보'와 북한 조선로동당 기관지 '해방일보' 등이 창간했고 평양에서 발행하는 '로동신문', '조선인민군'도 서울에서 배포됐다.

김영희 연구원은 "북한은 전쟁 수행을 지원하는 수단으로 각종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며 "신문은 각 동과 직장에서 자료로 활용되거나 동원행사에서 배포되는 경우도 있고, 학생들의 교양 강좌 교재로 사용됐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방송 아나운서였던 위진록은 후에 회고록에서 단파 라디오를 숨죽여 듣던 급박한 상황을 회상했다. 그는 "낮에는 마루 밑에 가마니 두 장을 깔고, 소형진공관 6개가 들어간 중파와 단파 수신기 라디오를 통해 일본 NHK를 들으면서 숨어 지냈다"고 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한다는 소문은 서울에서 9월 초순경 떠돌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듣다가 발각되면 공산당원에 끌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단파수신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총살당한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몰래 들은 라디오에서 얻은 전황 소식은 쉬쉬하는 가운데 입에서 입으로 일파만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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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만대 라디오에 의지했던 1950년 6월 서울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당시 서울에는 약 3만대의 라디오 수신기가 있었다. 라디오가 전쟁 초기 서울 주민들이 가진 가장 중요한 접촉 수단이었다.

서울 수복 이후 1950년 11월 미국이 심리전 전문가들을 서울에 파견해 조사한 결과에서도 서울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라디오의 심리전 효과가 삐라를 압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라디오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는 포로의 경우 라디오보다 삐라의 심리전 효과가 높았다.

김영희 연구원은 논문에서 "전쟁 당시 라디오 청취는 인민군이 단속하는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사람들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뉴스를 들으며 희망을 가졌다"며 "이런 대응은 북한 점령 기간 많은 사람이 북한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2016/06/25 07:00 송고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6/24/0200000000AKR201606242047000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