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煕生誕100年に主張する朝鮮日報:陣営論理的党派性の一方の当事者
ま、よろしいんではないでしょうか。朝鮮日報ですもの、それくらいのことを言わなくては。もっとも、堅固な陣営論理をさらに強化したところで、何がどう変わるということも今さらないでしょう。現状維持です。
blue-black-osaka.hatenablog.com
ときに、この2本の記事、韓国語版と日本語版とで画像と図が変に移動してしまってますよ。図を翻訳してくれているのはたいへん有り難いのですが、読者が両方の記事を読むとは限らないわけですし、普通にしといてもよかったような気がします。
記事入力 : 2017/11/14 10:25
「英雄」「独裁者」…韓国を変えた朴正煕生誕100年
「朴正煕・元大統領、功罪どちらかだけしか見ない党派性の最大の被害者」100年前のきょう(11月14日)、朴正煕(パク・チョンヒ)元大統領(1917-79)が生まれた。波乱万丈の人生を送った朴・元大統領は、「祖国近代化」と「民族中興」という念願をかなえるため腐心した。朴・元大統領が率いた産業化は、数千年続いてきた韓国社会を根底から変えていった。
朴・元大統領が政権を樹立した1961年の時点で82ドル(現在のレートで約9316円。以下同じ)だった1人当たりの国民所得は、79年には1647ドル(約19万183円)まで急増した。輸出は4100万ドル(約46億6000万円)から150億ドル(約1兆7000億円)にまで増えた。「隠者の国」だった韓国は自由貿易市場の世界秩序を成功裏に活用した。その結果、社会構造も変わった。61年の時点で、韓国国民の63%が1次産業に従事するという農業社会だったのが、79年には63.4%が製造業やサービス業で働く産業社会へと変貌した。
朴正煕政権時代の変化は、量的な側面にとどまらない。朴・元大統領の「なせば成る」「豊かな暮らしをしてみよう」という精神は、無気力だった韓国国民の胸を躍らせた。貧しさをこれ以上後世に受け継がせないために、昼夜を問わず働いた。「近代化の英雄」「無慈悲な独裁者」という相反する評価がいまだに続いているが、朴正煕後の韓国がそれ以前とは異なることは明らかだ。
朴正煕生誕100周年は、対立と摩擦の中で迎えられた。朴正煕生誕100周年記念事業推進委員会は、朴正煕全集の発行、市民講座、音楽会などの記念行事を用意している。しかし、上岩洞の朴正煕大統領記念図書館に建てることになっていた朴・元大統領の銅像は、一部の団体の反対運動に直面した。朴槿恵(パク・クンへ)前大統領の弾劾と政権交代の余波で、韓国歴史博物館をはじめとする政府機関は記念行事を何も準備しなかった。
朴・元大統領は、歴史の舞台から突然姿を消した直後から、「触れることがはばかられる難題」と化した。朴・元大統領の懐で育った新軍部は憲法の前文から「5・16革命」(1961年5月16日。朴正熙陸軍少将〈当時〉らによる軍事クーデター)を削除し、距離を置こうと試みた。87年の民主化後に登場した各政権は、民主主義を抑圧した朴・元大統領に好意的ではなかった。「朴正煕論争」は、娘が父の後光を資産として政治に飛び込んだことで一層深刻になった。
朴・元大統領に対する政治的賛否は、学問的評価にも影響を及ぼした。朴・元大統領の最大の業績に上げられる経済発展すら、評価が鋭く対立した。朴正煕存命中に彼の経済政策を批判した代表的な学者は、故パク・ヒョンチェ朝鮮大学教授だった。彼は、朴正煕体制が対外従属を深める中で破局に直面することは避けられない、と主張した。しかし高度成長が続いたことで、こうした批判の説得力は大きく低下した。そんな中、安秉直(アン・ビョンジク)ソウル大学名誉教授が提起した「中進資本主義論」は、朴正煕政権時代を見つめる新たな視点を提示した。先進国との国際分業の中で先進国を追撃(catch-up)する朴・元大統領の経済発展戦略は正しかった、というものだった。
その後、朴正煕体制に対する批判は、経済は発展したが独裁が問題だったという「開発独裁論」へと変形した。李炳天(イ・ビョンチョン)江原大学教授は、政治を民主的に行っても開発を成し遂げることはできた、と主張した。「経済はうまくいったが政治は誤った」という大衆の感情的評価と合致するこうした主張に反論したのは、故・金一栄(キム・イルヨン)成均館大学教授だった。故・金教授は、近代化のモデルたる英国を含め、産業化の初期に経済と政治を共に発展させた国はなかった、と主張した。
朴・元大統領は、韓国国民の世論調査で「最もうまく職務を遂行した大統領」に挙げられる。こうした現象を、林志弦(イム・ジヒョン)西江大学教授は、朴・元大統領の独裁が大衆の同意に立脚していたという「大衆独裁論」で説明した。逆に、チョ・ヒヨン・ソウル市教育監(教育委員会の教育長に相当)は「大衆は動員されただけ」と主張した。朴・元大統領が、大衆的人気とエリートの批判という二重の評価を受けていることについて、宋復(ソン・ボク)延世大学名誉教授は「反対側に属する人は、どれほど功が大きくとも罪しか見ないという党派性の、最大の犠牲者が朴正煕」と指摘する。
李先敏(イ・ソンミン)記者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7/11/14/2017111401115.html
[NEWS&VIEW] '영웅' '독재자' 어떻게 불리든 대한민국을 바꾼 지도자였다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 2017.11.14 03:13 | 수정 : 2017.11.14 07:33"박정희, 功과 過 한쪽만 보려는 당파성의 최대 피해자"
100년 전 오늘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이 태어났다. 파란만장한 삶을 거친 그는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박정희가 이끈 산업화는 수천년 이어져 온 한국 사회를 뿌리부터 바꾸어 놓았다.
1968년 12월 21일 경부고속도로 1단계 구간인 경수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샴페인을 고속도로 바닥에 뿌리고 있다. /국가기록원박정희가 집권한 1961년 82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79년 1647달러로 급증했다. 수출은 4100만달러에서 150억달러로 늘어났다. '은둔의 나라'였던 한국은 자유무역시장의 세계 질서를 성공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로 사회 구조도 달라졌다. 1961년 국민의 63%가 1차 산업에 종사하던 농업사회는 1979년 63.4%가 제조업과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산업사회로 탈바꿈했다.
박정희 시대의 변화는 양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하면 된다' '잘살아 보자'는 정신은 무기력해져 있던 국민을 뛰게 만들었다. 더 이상 가난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근대화의 영웅'과 '무자비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박정희 이후의 한국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박정희 탄생 100년은 대립과 마찰 속에서 맞았다. 박정희탄생100돌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박정희전집 발간, 시민 강좌, 음악회 등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 세우기로 한 박정희 동상은 일부 단체의 반대 운동에 부딪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 여파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비롯한 정부 기관은 아무런 기념행사를 준비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직후부터 '뜨거운 감자'가 됐다. 박정희의 품에서 자라난 신군부는 헌법 전문에서 '5·16혁명'을 삭제하면서 거리 두기를 시도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등장한 정부들은 민주주의를 억압했던 박정희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박정희 논란'은 그의 딸이 아버지의 후광을 자산으로 정치에 뛰어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찬반은 학문적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경제 발전조차 평가가 날카롭게 대립한다. 박정희 생전에 그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 대표적 학자는 고(故) 박현채 조선대 교수였다. 그는 박정희 체제가 대외 종속의 심화 속에서 파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계속된 고도성장은 이런 비판의 설득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이런 가운데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제기한 '중진자본주의론'은 박정희 시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선진국과의 국제 분업 속에서 그들을 추격(catch-up)하는 박정희의 경제 발전 전략이 옳았다는 것이었다.
이후 박정희 체제에 대한 비판은 경제는 발전했지만 독재가 문제였다는 '개발독재론'으로 변형됐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정치를 민주적으로 해도 개발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경제는 잘했지만 정치는 잘못했다"는 대중의 정서적 평가와 부합되는 이런 주장을 반박한 학자는 고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였다. 그는 근대화의 모델인 영국을 포함해서 산업화 초기에 경제와 정치를 함께 발전시킨 나라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국민 여론조사에서 '가장 직무를 잘 수행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이런 현상을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박정희의 독재가 대중의 동의에 입각해 있었다는 '대중독재론'으로 설명했다. 반면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대중은 동원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박정희가 대중적 인기와 엘리트의 비판이라는 이중적 평가를 받는 데 대해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다른 편에 속하는 사람이면 아무리 공(功)이 커도 과(過)만 보는 당파성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박정희"라고 지적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14/2017111400162.html
記事入力 : 2017/11/14 10:27
朴正煕大統領生誕100年、記念図書館には銅像ないまま
▲1968年12月21日、京釜高速道路第1段階区間に当たる京水高速道路と京仁高速道路の開通式で、路面にシャンパンをまく朴正煕大統領。/写真=国家記録院故・朴正煕(パク・チョンヒ)元大統領誕生100年を翌日に控えた13日、ソウル市麻浦区上岩洞の朴正煕大統領記念図書館で執り行われた「朴正煕元大統領銅像寄贈証明書伝達式」に、銅像の設置に反対する団体が押し寄せ式典を妨害した。図書館を運営する朴正煕大統領記念財団はこの日「李承晩(イ・スンマン)、トルーマン、朴正煕銅像建立推進を進める会」から朴正煕元大統領の銅像(高さ4.2メートル)の寄贈を受けることになり、この日はその証明書だけを受け取ることになっていた。ところが反対する団体は寄贈式が執り行われる建物の入り口近くにある階段の下に集まり「朴正煕は去れ」などと叫びながら行事を妨害した。
銅像の設置を進める財団側は太極旗(韓国の国旗)を振りながら反対を阻止したため、両団体のメンバーらは激しくもみ合いとなった。警察が双方の間に割って入ったが、一部メンバーが相手の首などに暴行を加えたため、現行犯で一時身柄を拘束され、後に釈放された。
財団は当初、記念図書館に朴正煕元大統領の銅像設置を進め、この日はその証明書だけを受け取ることにしていた。ところがこの計画が知られると、ソウル市議会は7日「積弊清算が行われているこの時期に、歴史的に議論が続く人物の銅像を設置するのは認められない」として制止に乗り出した。ソウル市も「銅像を設置するには必ず審議が必要だ」と主張している。現在、記念図書館はソウル市が無償で提供した市有地にあり、また銅像の設置には美術や歴史の専門家などで構成されたソウル市公共美術委員会の審議を経なければならない。
「韓国現代史を築いた李承晩、トルーマン、朴正煕の3人の銅像の設置」を目指して昨年立ち上げられた「銅像建立推進を進める会」は寄贈式で「大韓民国に繁栄をもたらした朴正煕大統領の功績を記憶すべきだ」と訴えた。また朴正煕大統領記念財団のチャ・スンヒ理事長は「全世界のどこに行っても大統領記念館にはその人物の銅像がある。金大中(キム・デジュン)、盧武鉉(ノ・ムヒョン)記念館も銅像があってこそまともな国だ」とした上で「政治的な立場によって一方的に反対し、騒ぎを起こすのは先進的な市民がやるべきことではない」と不快感を示した。
一方で同じ頃に記念図書館前では「民族問題研究所」などの市民団体が銅像設置に反対する記者会見を開き「憲法に『大韓民国臨時政府の法統』と『不義に抗した4・19民主理念』が明記されている限り、朴正煕は清算の対象にはなっても決して記念の対象にはならない」と訴えた。
ソン・ユジン記者 , ユ・スジョン記者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7/11/14/2017111401138.html
박정희 탄생 100주년인데… 기념도서관에도 못세운 동상
성유진 기자 윤수정 기자 입력 : 2017.11.14 03:02
추진모임 기증 증서 전달식에 반대단체 몰려와 "청산 대상"
서울시 "심의 거쳐야 설치 가능"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하루 앞둔 13일, 서울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 동상' 기증 증서 전달식에 동상 건립 반대 단체들이 시위를 벌였다. 기념도서관을 운영하는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이날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건립추진모임'으로부터 4.2m 높이 박 전 대통령 동상을 향후 기증받기로 하고 이날은 증서만 받기로 했다. 그런데도 반대 측은 기증식이 열리는 입구 계단 바로 아래에서 "박정희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사를 방해한 것이다.
동상 건립에 찬성하는 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맞대응하면서 찬반 단체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경찰이 찬반 단체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반대 집회 참석자와 기증식 참가자가 서로의 목 부위를 손으로 폭행해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풀려나기도 했다.
재단은 당초 기념도서관에 박 전 대통령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이날은 기증 증서만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7일 서울시의회가 "적폐 청산에 나선 현시점에 역사적 논란이 큰 인물에 대한 동상이 건립돼서는 안 된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서울시 측도 "동상을 세우려면 반드시 심의를 받아야 한다"고 나섰다. 현재 기념도서관은 서울시가 무상 제공한 시유지에 들어서 있다. 동상을 세우려면 미술 전문가와 역사학자 등으로 이뤄진 시 공공미술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이날 기증 증서를 전달받은 기념재단은 조만간 실물 동상을 세우기 위해 서울시에 동상 설치 심의를 요청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가 파악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은 문래근린공원에 설치된 '박정희 흉상'이 유일하다. 이 흉상은 1966년 세워진 것으로 문래근린공원은 박 전 대통령이 5·16 군사 쿠데타를 모의했던 옛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13일 서울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 증서 전달식이 열렸다. 동상 건립에 찬성하는 단체(오른쪽)와 반대하는 단체(왼쪽)가 경찰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이날 기증식에서 동상건립추진모임 측은 "대한민국 번영을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모임은 지난해 '한국 현대사를 만든 이승만·트루먼·박정희 세 사람의 동상을 건립하겠다'며 결성됐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의 좌승희 이사장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대통령기념관에 동상이 없는 곳이 없고 김대중, 노무현 기념관에도 동상이 있어야 제대로 된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 "진영 논리에 따라 반대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은 선진 시민이 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기념도서관 앞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들이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헌법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명시하고 있는 한 박정희는 청산의 대상이 될지언정 결코 기념의 대상은 될 수 없다"고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14/2017111400265.html
こっちは特に画像はないので、対訳にしなくても大丈夫でしょう。
記事入力 : 2017/11/14 10:55
【社説】朴正煕時代の功罪きょう(11月14日)は朴正煕(パク・チョンヒ)元大統領の生誕100年に当たる。朴・元大統領は、韓国の歴史において最も栄えた今の時代を開いた指導者だ。しかし現在の韓国社会の雰囲気は、朴・元大統領の功績をたたえるどころか、敵対的な憎悪まで現れている。郵政事業本部は朴正煕生誕100周年記念切手を発行することにしていたが、政権が代わるや、それを取り消した。セマウル運動(農村改革運動)は名称すら消えてしまいそうな危機にある。朴正煕記念図書館は、100周年の誕生日に銅像一つ建てることもできない。
現在の目で過去を裁断したり、イデオロギーや党派的利害関係で時代を規定してしまったりしては、歴史や歴史的人物を客観的に評価することはできない。現在、韓国はGDP(国内総生産)基準で世界12位の経済大国となり、先進国の地位もうかがっているが、朴・元大統領が1961年に5・16軍事政変を起こしたとき、韓国国民1人当たりのGDPは82ドル(現在のレートで約9316円、以下同じ)で、世界の最貧国だった。希望の芽すら見えない国だった。国家予算を米国の援助に依存する「物乞いの国」だった。輸出は年1億ドル(約114億円)にもならず、しかも主要品目は黒鉛・タングステンなどの原材料やイカ、ノリ、かつらといった物だった。どの家も春になると食べるものがなく、春の端境期を越えて麦が実るまで飢えは続いた。山という山には木がなく、砂漠を思い起こさせた。朴・元大統領は、こんな国を一変させ、こんにちにおける韓国の繁栄の礎を築いた。
韓国現代史の実現は、朴正煕一人だけでなく、韓国国民が成し遂げたものでもある。しかし、国家発展の確固たるビジョンと意思を持って前進する指導者なしには、こうした奇跡は起こせなかった。朴・元大統領の輸出立国戦略、外資導入戦略、重化学工業育成戦略は、韓国国内の激烈な反対にぶつかった。それでも「われわれにもできる」と言って押し進めた。キューバのカストロやエジプトのムバラク、リビアのカダフィも開発独裁を掲げたが、残されたのは国民の貧困と落後だ。同じ民族ではあるが北朝鮮の住民は、金日成(キム・イルソン)のような誤った指導者に率いられ、地獄で暮らしている。
若いころ朴正煕が嫌いだった、という人は少なくない。息が詰まりそうな社会統制と自由に対する束縛は、多くの人々に多大な苦痛をもたらした。悲劇も少なくなかった。しかし全ての時代には、その時代の使命がある。朴正煕時代の最大の課題は、貧困と挫折、敗北意識から脱出することだった。朴正煕が離陸させた産業化の結果として堅固な中産層が形成され、この中産層の熱望が民主化につながり得たのも事実だ。
今、韓国の青少年が学んでいる歴史教科書は、こうしたプロセスを客観的に盛り込んでいない。朴正煕は旧日本軍の将校出身で、しかもクーデターの主役で、屈辱外交、維新独裁、人権じゅうりんの張本人といった姿で描かれている。朴・元大統領の死去から38年が過ぎた。朴正煕政権の18年間に実現したことは、韓国の民族史の流れを変えた。韓国社会の一部は、こうした指導者に対し「功7、罪3」程度の評価をすることも拒否している。むしろ外国で朴正煕を研究し、手本にしようとしている。政権が代わるたびに過去を否定し、秘密を暴き、ののしり、今や現代史の偉人の中で残っている人物はいないようなありさまになった。韓国人は何のために、こんな自虐行為を毎回繰り返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7/11/14/20171114012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