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清・咸陽良民虐殺事件をめぐって
「ハンギョレ」が記事にしていたのをクリップ。
‘산청·함양 양민학살’ 특무대 문서원본 첫 공개
[한겨레] 이경미 기자 등록 : 20110831 21:07 | 수정 : 20110831 22:45빨치산 토벌 빌미 “적의 손에 있는 사람 전원 총살”
전 진실화해위원 논문서 발표…“명백한 국가 책임”
» 안정애 전 진실화해위 조사관이 31일 공개한 ‘특무대 문서철’의 일부. 사진 속 문서는 “9연대가 1951년 2월7일 오전11시께 산청군 금서면 방곡부락에 도착하자 부락민 7명이 근처 뒷산으로 도피하므로, 부락민을 전원 집결시켜 도피한 놈이 몇 놈이냐고 물으니, 묵묵부답한 이유로 전원 총살시켰다”는 보고내용이다. 안정애씨 제공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빨치산 토벌을 위해 경남 산청·함양 지역 양민 학살을 지시한 내용이 담긴 문서 원본(영인본)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유족회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산청·함양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60주년 학술대회’를 열고, 학살 당시 국군의 지시 내용 등이 담긴 ‘특무대 문서철’을 공개했다. 특무대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을 수행한 방첩부대다.산청·함양사건 기록은 522쪽 분량의 이 문서철 중 헌병사령부가 작성한 보고서에 나온다. 보고서의 ‘연대작전명령제5호부록(1951년 2월2일)’을 보면, 국군11사단이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돼 있다. 자료를 공개한 안정애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관은 “당시 토벌 대상 지역이 됐던 산청·함양 일대는 유엔군이 북진한 이후에도 정부가 치안을 확보하지 못했던 곳”이라며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이란 대다수 지역주민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이 작전명령이 포함된 보고서는 특무대로 이관되면서 특무대 문서철에 통합됐다. 이후 이 자료는 수십년간 잠자고 있다 2007년 안 전 조사관이 진실화해위 활동을 하던 중 이를 발견해 영인본을 특무대의 후신인 기무사로부터 건네받았다. 이를 토대로 진실화해위가 보고서를 발간하고 안 전 조사관이 논문을 발표하면서 국군이 양민 학살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한겨레> 2010년 10월11일치 10면)
안 전 조사관은 “이번 공개로 산청·함양사건 학살이 명백한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며 “가해자인 국가가 나서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청·함양사건은 1951년 2월7일 경남 산청·함양군 일대에서 국군 제11사단 9연대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지역 주민을 논으로 불러모아 705명(유족회 주장)을 총살한 사건이다. 11사단 9연대는 산청·함양사건 이틀 뒤인 9일부터 11일까지 거창에서 700여명을 학살했고, 이는 ‘거창 양민학살’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경미 기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94350.html
こちらの記事は、日本語訳が下記にあります。
ハンギョレ・サランバン - ‘山清(サンチョン)・咸陽(ハミャン) 良民虐殺’特務隊 文書原本 初公開
記事の末尾にもある通り、この山清・咸陽事件は「国軍による良民虐殺事件」としてよく知られた居昌事件と一続きのものです。居昌事件の舞台となった居昌郡神院面と山清郡・咸陽郡とは、バス一本で結ばれているようなお隣さんです。
この事件については、「居昌事件等関連者名誉回復に関する特別措置法」(1996年)によって居昌事件と同様の追慕事業が進められているのですが、なお国家責任追及に向けた課題が残っていることを示唆させる記事です。
以前、山清郡には行きましたが、この追慕公園には行っていません。アクセスするバスもあることにはありますが、便数を考えると、実際にはタクシーで行くしかないかもしれませんねえ。
작성일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산청․함양 양민사건 추모 및 공원 준공식 개최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 열어 영령 위로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2월 7일 억울하게 학살당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제57주기 산청․함양사건양민희생자 제21회 합동위령제․추모공원 준공식 및 추모식이 7일 오전 10시 30분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에서 열린다.
산청․함양사건양민희생자 유족회(회장 정재원)가 주관하는 이날 행사는 천사령 함양군수와 김호기 산청부군수를 비롯한 산청 함양지역 기관단체장, 유족, 지역주민 등 600여명이 참석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이 날 위령제는 초헌관에 신성범 국회의원, 아헌관에 박성서 함양군의회 의장, 종헌관에 정재원 유족회장이 각각 맡아 헌작하며 민계호 유족회 감사의 집례에 따라 제례를 올린다.
이어 식전행사로 시극공연(그림내시낭송회), 희생자 추모 한풀이 공연(서울보라매 무용단), 순국선열 및 705명의 희생자에 대한 묵념, 천사령 함양군수, 신성범 국회의원의 추모사, 강희근 경상대 교수의 추모시 낭송, 헌화, 산청중학교 합창단의 위령가 합창 순으로 추모식을 진행하며, 회양문에서 준공식테이프 커팅식을 하게 된다.
산청․함양사건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7일 일부 국군병력이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과정에서 산청군 금서면 방곡, 가현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동강, 유림면 서주강변에서 주민 705명이 통비분자로 간주되어 집단 학살된 사건으로 지난 1996년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합동묘역사업이 추진됐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지난 1999년부터 2004년까지 13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건립한 72,265㎡ 규모로 합동묘역, 희생장소 보존지역, 위패봉안각, 위령탑, 일주문, 영상실 등이 설치되었고, 10억여원의 예산을 추가 확보하여 2008년 역사교육관 제 1․2전시실 공사를 착공하여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현재 참배객과 방문객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과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뉴스투데이21/정갑영기자
http://newstoday21.co.kr/bbs/board.php?board=sub0501&page=2&command=body&no=141
산청 함양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
2011.08.10 15:43:42 (*.128.140.97)
강희근 지음 /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유족회 / 2004 / 비매품[책 소개] - 저자의 말에서
산청 함양 양민 학살사건의 역사를 집필해 달라는 희생자 유족회의 부탁을 받고 망설였었다. 우선 필자가 역사학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했고, 필자 자신이 8살 때 4개 학살지역의 하나인 서주리에 가족들과 함께 불려나갔다가 경찰가족이라는 혜택으로 생존자 대열에 합류해 나왔던, "사건 생존자"라는 입장에서 그러했다. 생존자 대열에 끼었던 사람들은 학살 시간대에는 유림면 국계마을로 도보 이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학살 현장을 볼 수는 없었다. 그렇더라도 아침 밤상 물리는 시간에 불려나와서 희생자들이 학살되기 직전에 현장을 나왔으므로 8시간 가량 밤 한 톨 물 한 모금 입에 넣지 못하며 추위와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경천동지의 참혹한 살상의 순간만 피했을 뿐이지 그 이후 통곡과 숨소리 내지 못하며 엎드려 사는 긴 침묵의 세월을 더불어 보내야 했다. ... (이하 생략)[저자 소개]
1943년 경남 산청 출생
진주고, 동국대 국문과, 동아대 대학원 수료
문학박사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 당선
국립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장, 인문대학장
전국국공립대교수협의회 부회장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책 발행 당시)
そして実はこの話、居昌・山清・咸陽で終わりではありません。この点に関して、昌原(旧馬山)の地方紙「慶南道民日報」の記事をクリップしておきます。
<잠들지 못하는 뼈>(선안나 글·허태준 그림)
보도연맹 다룬 청소년 소설
데스크승인 2011.08.17 00:42:04
정성인 기자가장 좋은 방법은 경남에 추모공원을 겸한 유해안치시설을 조성해 그곳에 모시는 것이다. 같은 국가범죄에 의한 불법학살이지만 특별법이 먼저 제정된 거창과 함양·산청학살사건의 경우 이미 위령공원이 조성돼 있다. 그러나 그 외의 민간인학살사건 희생자 유해는 이처럼 발굴이 되어도 갈 곳이 없는 처지다. 심지어 지난 2004년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에서 발굴된 163구의 유해도 안치할 곳이 없어 우선 경남대 예술관 밑 공터의 컨테이너 속 플라스틱 상자에 보관돼 있는 실정이다.<경남도민일보> 2009년 7월 13일자 17면
국민보도연맹. 줄여서 '보도연맹' 또는 '보련'.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따로 관리하려는 목적으로 1949년 6월부터 정부에서 조직했던 단체로 전국적으로 가입자 수는 약 30만 명에 이릅니다.
점차 모집 인원 늘리기로 변질되어 실제 대다수의 가입자가 평범한 농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듬해 전쟁이 터지자, 경찰과 퇴각하던 한국군이 이들을 집단학살했습니다.
경남에서도 산청 외공리를 비롯해 마산, 진주, 거제 등등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민간인이 재판 절차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조사 결과 최소 5000명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청소년 소설로 탄생한 <잠들지 못하는 뼈>는 이렇게 학살당한 보도연맹원들의 유해 발굴과 한국전쟁 때 아버지와 오빠가 학살당하고 숨죽인 채 살아왔던 남주의 기억을 양 축으로 해서 전개됩니다.
1950년 6월도 지나갈 즈음, 충북 청원의 한 시골마을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보도연맹은 마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는 오빠를 찾으러 청주로 갔습니다. 그사이 마을에 보도연맹 소집이 떨어지고 남자들은 농기구를 하나씩 둘러메고 면 소재지로 향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는 70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창고에 갇히게 됩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소집이 있기 전에 미리 몸을 피한 보도연맹원도 있었지만 대신에 그 가족들이 고초를 겪게 됩니다. 창고에 갇힌 지 엿새가 지나고, 야산에서 총성이 울리고, 보도연맹원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마을에 전해집니다.
남주는 무논에서 일하다 바짓가랑이를 걷은 채 면 소재지로 향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보도연맹 소집이라는 말을 전한 것은 남주 자신이었습니다. 창고에 갇히기 전 꼭 아버지 피하시게 해야 한다며 선생님이 몰래 일러 주기까지 했는데 그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럽고, 죄스럽습니다.
지난 2009년 7월 공개된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민간인학살 유해발굴현장에서 참석자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유해를 보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청주에서 영화배우를 보고서 크면 배우가 될 거라고 했던 여동생 향주는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청각을 잃고 결국 스무 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집 안의 자랑이었던 중학생 오빠는 전쟁이 끝났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희망을 안고 열심히 하루를 살았던 남주 가족의 비극과 슬픔은 지켜보는 독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이 책에서 주인공 남주만큼 주목해야 할 인물이 바로 '태오'입니다. 처음에 태오는 새 기타를 사기 위해 유해 발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열흘쯤 지났을 때 보도연맹을 학살한 헌병이 양심 고백을 한다기에 동료들과 기자회견장을 찾아갔는데 그 헌병이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진로를 바꿔 체질인류학을 공부하고, 계속해서 발굴작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삼 년 기한의 보도연맹 유해발굴사업은 끝이 나고 진실화해위도 해체를 합니다. 아직 수십만 피해자가 땅속에 묻혀 있고, 이미 발굴된 유해도 갈 곳이 없어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있는데 말입니다.
태오는 그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홀로 전국의 학살 장소를 찾아 다니며 아직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는 뼈들을 위해 기타 연주를 들려 줍니다. 태오만의 위령 공연을 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현실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해자의 참회와 반성, 그리고 진정한 화해의 길까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자는 '태오'라는 인물을 통해 유해발굴사업의 안타까운 현주소를 자세히 알 수 있고, 유족들의 슬픔을 보다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진정한 화해의 길도 함께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208쪽, 미세기, 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