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均館大学校を定年退官する宮嶋博史

そうですか。来年定年を迎えるんですね。

宮嶋先生には、いちど成均館大学校の東アジア学術院でお会いしたことがあります。ごく簡単な挨拶程度でしたけど。

両班(ヤンバン)―李朝社会の特権階層 (中公新書)

両班(ヤンバン)―李朝社会の特権階層 (中公新書)

植民地近代の視座―朝鮮と日本

植民地近代の視座―朝鮮と日本

西洋史観に埋没した日本、朝鮮侵略は誤った判断だった(1)
2013年01月18日11時23分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国史研究40年をまとめた宮島博史教授。東アジアの近代は朱子学が盛んに行われた16〜17世紀にすでに始まった」と話した。

成均館(ソンギュングァン)大学東アジア学術院で韓国史を教える日本人の宮嶋博史(65)教授。韓国の民主化運動が盛んだった1987年、ソウル大学図書館4階で催涙弾のにおいをがまんしながら朝鮮時代の『量案(土地台帳)』を読んでいた彼はこのように繰り返した。

「私はなぜこのような研究をしているのか」

彼は京都大学のような大学、大学院に通っていた60年代末〜70年代初め、韓国史を専攻に選んだ。日本学界で韓国史に関心を持つ者はほとんどいなかった時代であった。主任教授から「韓国史を勉強するのは良いが、大学就職は断念するように」とまで言われたという。

彼は運良く40才を過ぎて東京大学東洋文化研究所国史教授になった。続いて2002年、韓国行きを決心する。ちょうど新設された成均館大学東アジア学術院教授職の誘いがあった。そして時は流れて来年初めに定年をむかえる。

宮嶋教授が「韓国史研究40年」を整理した『宮嶋博史、私の韓国史勉強』(ノモブックス)を出版した。「近くて遠い」両国の関係を客観的に省察する。韓国史に対する挑戦的な認識も含んでいる。

韓国と日本の歴史紛争、やはり彼が最も解きたい問題だ。彼は東アジア文明を新たに解釈しながら歴史葛藤を溶解させようとする。「16〜17世紀、韓国はすでに近代的社会で変化し始めた」という特異の仮説を提起した。「西欧中心的な歴史認識こそ、韓国と日本の対立を生んだ要因」と指摘した。

−−−西欧中心的な歴史認識というのは。

「古代‐中世‐近代で分ける時代区分が典型的だ。特に「中世封建制」設定が最も深刻だ。封建制は中世ヨーロッパだけであった。東アジアにはヨーロッパのような封建制がなかった」

http://japanese.joins.com/article/913/166913.html

西洋史観に埋没した日本、朝鮮侵略は誤った判断だった(2)
2013年01月18日11時25分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日本の封建制は学校で習うが。

「日本の封建制の話が初めて出てきたのは1905〜1906年、日露戦争の時だ。ロシアに勝って一等国になったという自負心にその根源を問い詰めて日本でもヨーロッパのように封建制があったので、中国や韓国と違い近代化に早く成功できたという主張が出始めた。東アジアの歴史から日本を分離させる作業だ。日本がアジアを抜け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脱亜論」の根拠として活用されたことだが、それは一種の政治的イデオロギーであった」

−−日本学界で受容された理論なのか。

まだ教科書に反映はされていないが、この20年間の推移をみると、日本の歴史学者の間で「日本封建制」用語を使う人はますます少数になっている」

−−−東アジアの近代が16〜17世紀に始まったと見る根拠は。

「朝鮮時代の土地台帳と戸籍台帳を見ると西洋での富農型地主のような土地貴族がいなかった。特権的土地所有がないことが朝鮮時代の特徴だ。そのため近代化の道も違った。その背景には朱子学がある。中国「宋」国は朱子学を教材にして「科挙制を通じて官僚を選抜した。身分制解体という近代性が現れ始めたのだ。これは朝鮮につながるが、ヨーロッパよりはるかに早かった」

−−−韓国・日本の歴史紛争をどのように見るか。

「日本の侵略を認めて批判する日本人に会うことは容易だ。ところで侵略認定よりさらに根本的な問題がある。朝鮮と清国は落伍して自ら近代化できないので日本の地図が必要だったという見解だ。このような歴史認識を克服してみたかった。 こういう誤った認識と侵略で日本は第2次世界大戦敗北というみじめな結果をむかえることになった。韓国歴史学界で朝鮮時代を封建社会として、朝鮮後期を封建制解体期と把握する見解も問題だ。近い将来発表する『日本の歴史観を批判する』(チャンビ)でこのような問題を詳しく扱うつもりだ」

http://japanese.joins.com/article/914/166914.html

日本の歴史学界への批判が韓国の史観の擁護には必ずしもつながらないということ、宮嶋さんが指摘している点に関する「歴史認識の問題」については、日韓がある意味で全然対立していないこと、などがポイントになりますかね。

こういう意味での「西欧中心的な歴史認識」については、井上章一さんがこの本で集中的に取り上げていました。これを読むと、日本の歴史学界の認識も必ずしも一枚岩ではなかったことがわかります。

日本に古代はあったのか (角川選書)

日本に古代はあったのか (角川選書)

ところで、朝鮮日報にもほぼ同趣旨の記事が載っていますが、いくらなんでもこの見出しは、こないだの『週刊文春』に載っていた、「いじめ」を絡めて桑田真澄に当てこすったセコい記事並みに中身とズレていませんか?

…と思って、元記事に当たってみたら、どうも見出しと本文とが別々の記事から採られているような気がするんですけど、意図あってのことなんでしょうか?

それとも、私の気のせい?

記事入力 : 2013/01/20 09:24
成均館大の宮嶋教授、日本の歴史学界に苦言

宮嶋博史教授、韓国史研究の集大成となる書籍を出版


▲宮嶋博史教授は「日本の進歩的な歴史学界ですら、日本政府の歴史歪曲を正すことに無気力になっている」と語った。/写真=ソン・ヒョンジュ記者

 2002年、宮嶋博史・東京大学教授(当時)=写真=が成均館大学東アジア学術院教授のポストに移ったとき、韓日の学界に静かな波紋が広がった。『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研究』『両班』などの力作を出版し、韓日両国で注目されていた韓国史の研究者が、東京大学教授の椅子を蹴って韓国の大学を選んだからだ。15日に会った宮嶋教授は「当時の選択を後悔はしていない。東アジアという枠組みの中で韓国史を研究するという目標を実現したから」と語った。

 来年初めに定年を迎える宮嶋教授が、約10年に及ぶ韓国での研究成果をまとめた『宮嶋博史−私の韓国史の勉強』を出版した。著書の中で宮嶋教授は、韓中日の近代を解釈する枠組みである「小農社会論」や「儒教的近代」といった研究成果はもちろん、韓国歴史学界の問題点や、歴史をめぐる韓日の対立についての考えまで披露した。

 宮嶋教授は、まず「韓国の歴史学界は、依然として西欧モデルに基づいた内在的発展論に捉われている」と批判した。「古代−中世−近代と続く発展ルートをたどった国は欧州の数カ国にすぎないのに、それを絶対不変の原則であるかのごとく東アジアやほかの世界に適用すること自体が問題」という。宮嶋教授は「ほとんどの歴史教科書が『古代−中世−近代』と書くのは、これに代わり得るモデルがないからだが、こうした欧州モデルをほかの地域にそのまま適用するのが難しいという点には、多くの研究者が同意している」と語った。

 宮嶋教授は、安倍政権の発足でさらに激化が予想される韓日の歴史対立を懸念した。「何よりもまず、従軍慰安婦やアジア侵略を、日本社会が解決すべき自分たちの問題と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日本は終戦直後、米軍を相手にする慰安婦を政府レベルで組織していた。日本の未来のため、こうした問題を自ら解決すべきと考えない限り、歴史をめぐる対立は、韓国や中国といった隣国との問題としか考えなくなる」

 宮嶋教授は「進歩的な歴史学界も、1990年代の社会主義諸国の崩壊とともに、歴史を解釈するスケールの大きな議論が崩れて消滅し、各研究者は個別の実証研究に没頭して無気力になっている」と批判した。日本政府の歴史歪曲(わいきょく)に対し、学界がきちんと声を上げずにいるというわけだ。宮嶋教授は「日本の知識人は、韓国の知識人に比べ、社会を引っ張っていくという責任意識が弱い。朝鮮王朝時代の両班(貴族階級)と日本の武士階級の差ではないかと思う」とも語った。

 宮嶋教授は来年定年を迎えるが、研究スケジュールは立て込んでいる。日本の歴史学界の問題点を指摘した『日本の歴史観を批判する』(創批社)が近く韓国で出版され、朝鮮の族譜を研究した『族譜』(仮題)も出版を待っている。日本では、岩波書店から『韓国史』通史、東京大学出版会から『小農社会論』が相次いで出版される予定だ。

金基哲(キム・ギチョル)記者

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3/01/20/2013012000185.html

일본인 잘못된 역사인식 꾸짖는 미야지마 교수
연합뉴스
입력 : 2013.01.16 06:28

“일제 침략은 한국 문제가 아니라 일본 자체의 문제”
연구성과 집대성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 펴내

“일본은 한국 등을 침략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패배라는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한국 침략은 한국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자체의 문제입니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 (과거사 보상 등) 무엇인가를 요구하니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대답해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의 조선사 연구 권위자인 미야지마 히로시(宮島博史·65)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가 일본인들의 역사인식에 일침을 가했다.

미야지마 교수는 한일 역사 화해의 걸림돌로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꼽았다.

그는 “우익 성향의 일본 역사 연구자들도 문제지만 이른바 진보적인 역사 연구자들의 한국 인식에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본적으로 2차 대전까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황국 사관’이 일본의 역사학을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배한 뒤 일본의 역사학계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한국과 명청(明芿) 시기 중국은 유교가 지배한 나라였고 그래서 독자적으로 근대화할 수 없었던 반면 일본은 유교 영향력이 약해서 근대화를 빨리 이룰 수 있었다는 기본 인식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한일 두 나라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일본인들이 이러한 역사 인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야지마 교수는 조선시대와 근대시기 한국의 경제사, 사회사, 사상사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낸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사 연구자.

한국사 연구를 위해 2002년 일본 명문 도쿄대 교수직을 버리고 한국에 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2년부터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 펴낸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너머북스)는 지난 10년간 한국에서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책이다.

15일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기자와 만난 미야지마 교수는 “지난 10년간의 연구 성과를 모은 것”이라면서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한국사를 바라봤다”고 소개했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가 농민이 농업의 주체가 된 소농 사회였다는 이른바 ’소농 사회론’을 펼친다.

“일본 학자들은 한국과 중국에는 봉건제가 없었고 일본에는 봉건제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빨리 근대화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맞서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은 한국과 중국에도 봉건제가 있었다고 반박합니다. 하지만 봉건제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에서 만들어진 개념이어서 한국 등 동아시아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미야지마 교수는 “유럽 봉건 사회에서는 영주들이 직접 운영하는 직영지가 있었지만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는 16-17세기 이후 중국의 사대부, 한국의 양반, 일본의 사무라이가 농업 생산에서 완전히 빠지게 된다”면서 “농민이 농업의 주체가 된 소농 사회는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아주 독특한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시아에 근대 사회가 도래한 시점에 관해서도 기존 학계의 주장과 시각을 달리한다.

개항기가 아니라 소농 사회로 접어든 시점이 바로 동아시아에서 근대가 시작된 시기라는 게 미야지마 교수의 분석이다. 한국과 일본의 근대는 16-17세기부터, 중국의 근대는 이보다 조금 이른 명나라 때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는 “(1991년 펴낸) ’조선토지조사사업사 연구’에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한국에 근대적인 제도가 확립됐다고 주장했다가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는데 조선 시대부터 (근대적 제도를 확립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다면 일제가 한국에 근대적 제도를 확립하려고 해도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년 2월 성균관대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는 미야지마 교수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 사람이 다됐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갓김치 등 한국 음식을 즐겨 먹는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연구를 할 수 있었다”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한국은 알면 알수록 재미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한국에까지 와서 연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 사회도 제 체질에 맞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보다 더 건강합니다. 제가 오사카 출신인데 오사카 사람은 같은 일본인인 도쿄 사람보다 한국 사람과 유전적으로 더 가깝다고 합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도쿄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편하고 친근감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백제마을 출신인데 아마도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의 후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와 학계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10년 전보다 한국 사회가 여유가 없어지고 더 빨라진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학계에 대해서는 “질보다 양을 강조하는 업적주의가 큰 문제”라면서 “전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둘러싸고 학계가 논쟁도 벌이고 했는데 요즘은 논쟁 자체가 사라진 것 같다”고 지적했다.

미야지마 교수는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에 이어 조만간 일본 역사학계의 역사인식 문제점을 지적한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창비)를 펴낼 예정이다.

또 올 연말에는 한국의 족보를 연구한 책을 출간할 계획이며 조선 초기부터 1948년까지 한국의 주요 사상을 담은 문헌 자료를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에 소개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16/2013011600408.html

日人 '한국사 전문가'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 10년 연구 책으로 내, 양국 역사학계에 일갈
김기철 기자
입력 : 2013.01.17 03:04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일본의 진보 역사학계조차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는 데 무기력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성형주 기자

2002년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65) 도쿄대 교수가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로 자리를 옮겼을 때, 한·일 학계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조선토지조사사업사 연구'와 '양반' 등 역저를 펴내 한·일 두 나라에서 주목받던 한국사 연구자가 도쿄대 교수 자리를 박차고 한국 대학을 택했기 때문이다. 15일 만난 미야지마 교수는 "당시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동아시아라는 틀 안에서 한국사를 연구한다는 목표를 이뤘기 때문"이라 했다.

내년 초 정년을 앞둔 미야지마 교수가 10여년간 한국에서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미야지마 히로시―나의 한국사 공부'를 펴냈다. 책 속에서 그는 한·중·일의 근대를 해석하는 틀인 '소농사회론'과 '유교적 근대' 같은 연구성과는 물론 한국 역사학계의 문제점과 한·일 역사 분쟁에 대한 생각까지 풀어낸다.

미야지마 교수는 먼저 "한국 역사학계는 여전히 서구 모델에 기초한 내재적 발전론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했다. "고대-중세-근대로 이어지는 발전 경로를 밟은 나라는 유럽 몇 나라에 불과한데, 그걸 절대불변의 원칙처럼 동아시아나 다른 세계에 적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가 '고대-중세-근대'로 쓰는 것은 이를 대신할 만한 모델이 없기 때문이지만, 이런 유럽 모델을 다른 지역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은 많은 연구자가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야지마 교수는 아베 정권 출범으로 한층 첨예해질 한·일 역사 갈등을 우려했다. "무엇보다 일본군위안부나 아시아 침략을 일본 사회가 해결해야 할 자신들의 문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종전 직후 일본은 미군을 상대할 위안부들을 정부 차원에서 조직했거든요. 일본의 미래를 위해 이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역사 갈등은 한국과 중국 같은 이웃 나라와의 문제라고만 생각하게 되죠."

미야지마 교수는 "진보적 역사학계도 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 붕괴와 함께 역사를 해석하는 거대담론이 무너져 논쟁이 사라지고 연구자들이 개별 실증연구에 몰두하면서 무기력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에 대해 학계가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지식인들은 한국 지식인만큼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책임의식이 약하다. 조선시대 양반과 일본 사무라이 계급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고도 했다.

내년 정년을 맞지만 미야지마 교수의 연구 일정은 빡빡하다. 일본 역사학계 문제점을 지적한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창비)가 곧 나오고, 조선 족보를 연구한 '족보'(가제)가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일본에선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한국사' 통사, 도쿄대에서 '소농사회론'을 잇달아 펴낼 예정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16/20130116030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