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ソウルの風景】柳寛順銅像

行きっぱなしで放置していたものを一つ蔵出し。

それは、奨忠壇公園の南、奨忠壇路からトンネルに向かう道が鋭角に分かれるT字路にあります。

韓国自由総連盟にある李承晩の銅像や、奨忠壇公園の李儁の銅像を見に行ったときに訪れたその場所にあるのは、柳寛順の銅像です。



柳寛順の銅像と言えば、以前に天安市の竝川にある柳寛順記念館のものを見たことがあります。竝川は柳寛順の出身地で、スンデで有名なところです。

ナショナリスティックな山歩き・2―天安・竝川編

竝川との比較で言えば、1970年建立のソウルの柳寛順像のほうが古いはずで、人々にもよく知られていると思います。以前、朝鮮日報がこの銅像のことを取り上げている記事をクリップしたことがあります。

柳寛順の銅像をめぐるソウル市の言い訳

そこにもある通り、この時期のこの手の銅像ではおなじみの彫刻家・金世中氏の名前がはっきり確認できます。


台座の周囲の銅像もぐるっと回って見てみましたが、それなりに時代感はあるものの、朝鮮日報が嘆くほどのみすぼらしさは感じませんでした。


どうやら、上のリンク先にある朝鮮日報の記事が出た後、ソウル市はこの柳寛順像を含む南山の銅像の補修作業を行なったようです。

서울 남산공원 8개 동상 '재정비'
김지혜 인턴기자
입력 : 2010.08.30 09:47

서울시가 남산공원에 있는 8개 동상의 대대적인 보수·정비 작업에 나선다.

서울시 푸른도시국 공원조성과는 29일 “역사·문화 자산을 보존하고 공원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9월 중 남산공원의 역사인물 동상 8개를 보수·정비하는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오는 9월 보수 공사에 들어가는 서울 남산공원 내 유관순 동상. 만들어진 지 오래돼 저고리와 겨드랑이 부분이 심하게 부식됐다. /연합뉴스

현재 남산공원에 있는 동상은 모두 10개다. 이 중 △이준(1859~1907) △이시영(1869~1953) △김구(1876~1949) △안중근(1879~1910) △김용환(1892~1919) △유관순(1902~1920) 등 6개는 구한 말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의 것. 나머지는 김유신(595~673·신라시대 장군), 이황(1501~1570·조선 중기 학자), 사명대사(1544~1610·조선 중기 승려), 정약용(1762~1836·조선 후기 학자)의 동상이다.

이번에 정비 대상이 된 건 이 중 안중근·이시영 동상을 제외한 8개다. 대부분 만들어진 지 40~50년이 지나 곳곳이 부식(腐蝕·금속이 화학작용 등에 의해 소모되는 현상)되고 틈이 생겨 갈라졌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상은 약 6억 원의 예산으로 이미 재건립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오는 10월 말 새로 지어지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입구로 위치를 바꿔 설치될 예정. 이시영 선생상은 별도 보수 공사 없이 기존 안중근 의사상이 있던 자리로 옮겨간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최근 일부 동상의 안전 진단을 마쳤으며, 9월 초 공사 시행 업체를 선정해 올해 안에 보수·정비 작업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9/2010082900562.html

ちなみに、セレブの方々はあまり興味ないかもしれませんけど、新羅ホテルから奨忠壇路を挟んだ向かい側にありますから、そちらに面した部屋にお泊りの方からは窓からも見えるはずです。


ただし、この像は初めからここにあったわけではなく、最初は南大門のところにあったらしいんですよね。そのことを思えば、ずいぶんなところに移転させられたものです。

기념비와 동상 - 60~70년대의 기념비와 동상

少々古いのですが、韓国の「銅像全盛時代」を伝えるこの記事は、実に面白い内容です。

민족중흥시대, 사실은 '동상 전성시대'였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만든 15구의 동상
04.05.12 13:16 l 최종 업데이트 04.05.13 21:15 l 이순우(takehome)

크리스마스를 막 넘긴 1964년 12월 26일 이례적으로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 제16차 회의가 서둘러 소집됐다. 직전회의가 있었던 것이 불과 4일 전인 12월 22일이었으니 그 사이에 필시 무슨 긴박한 사안이 발생하긴 했나 본데, 알고 봤더니 이날의 토의사항으로 올라온 것은 '성현(聖賢) 37인 조상도금(彫像鍍金) 보수사업에 관한 당국 예비비 사용요청에 대한 건'이었다.


▲ <동아일보> 1965년 7월 29일자에 보도된 '태풍에 넘어진' 석고상의 모습이다. 위가 남대문 쪽에 놓여 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것이고, 아래가 시청광장의 분수대 옆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석고상이다. 1964년 5월경 이러한 석고상들이 미술대학생의 손으로 세종로와 태평로를 따라 37기나 배치되었다.

무려 서른 일곱 분에 달하는 성현들의 조상이라니, 이것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난데없이 도금을 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일까?

참으로 아득한 날의 얘기가 되고 말았지만, 한때 세종로의 중앙청에서 태평로의 남대문으로 죽 이어지는 한길 양편으로 웬만한 역사위인들을 망라하여 그 형상을 만들어 세웠던 시절이 있었다.

듣자하니 이것들은 1964년 5월경에 서울 시내 미술대학생들이 연합하여 제작한 결과물이라는데, 실상은 그 솜씨가 다분히 습작과 같은 정도로 대단치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더구나 재질이 석고상이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했다. 당연히 비가 오면 얼룩이 지기 일쑤고, 때로 강풍이 불어 넘어지거나 깨지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말하자면 기껏 위인들이랍시고 석고상을 만들어 세우긴 했으나 모양새는 둘째치고라도 그것을 수선하고 관리하는 일에 돈이 더 들게 된 판국이었다. 앞에서 '도금 운운'한 것도 석고상의 얼룩을 가리기 위한 방편의 하나였던 것이다. 문화재위원회에 올라온 예비비 사용요청의 안건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 일을 하필이면 문화재관리국이 떠맡으려 했던 것이 누군가의 강청에 따른 것이었는지 자의적인 결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안건에 대한 문화재위원들의 판단은 비교적 단호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이홍직 분과위원장의 견해를 인용하면 대충 이러했다.

"이 문제는 문화재관리국 소관이 아니라고 보며, 또한 문화재관리국 자체에서 이런 일을 애써 맡아서 할 일이 못되며, 이 일에 예비비 100만원을 사용한다는 것도 부당하다고 본다. 아울러 차제에 세종로에 있는 이 조상들을 철거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문화재도 아닌 일에, 그것도 별 가치도 없는 석고상에 문화재관리국이 공연히 나설 일이 아니라는 얘기로 들린다. 결국 이날의 회의는 '철거론'이 대체로 우위를 지킨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결의로 끝을 맺었다.

"1. 위인선열 자체는 역사상 남는 인물이나 조상 자체는 문화재로서 간주할 수 없다.
2. 여론상 현조상(現彫像)은 임시적인 습작으로 사회의 인정을 받고 있으나 이를 반영구화 또는 영구화하는 것은 국민의 여론을 야기시킬 우려가 다분히 있다.
3. 일정한 장소에 일시 이전보관하고 이를 참고기초로 하여 새로이 위인동상건립위원회를 설치하여 연차적으로 영구적인 동상을 제작하여 서울 시내 적당한 장소에 건립하는 방향으로 건의한다."


▲ 1968년 이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만들어 세운 동상들의 현재 모습이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이충무공 동상이 도로의 한복판에 서 있을 뿐 나머지는 대개 공원이나 녹지대의 한갓진 자리에 놓여 있다. 그리고 셋은 이미 원래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른 곳으로 옮겨진 바 있다.ⓒ 이순우

요컨대 위인들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어렵고, 기왕에 일이 이렇게 된 판국이니 반영구적이고 제대로 된 동상을 만들어 이것들을 차츰 대체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세종로와 태평로의 석고상들은 그 후로도 대략 2년 가량 더 그 자리를 지킨다. 문화재위원회의 견해 표명은 어디까지나 그랬으면 좋겠다는 취지를 담은 것이었을 뿐 구체적인 실행력을 갖춘 것은 전혀 아니었던 탓이다.

그런데 얼마 후 1966년 광복절이 되었을 때 이번에는 정말 '애국선열들의 조상건립운동'을 알리는 안내문이 <서울신문>에 등장했다. 이름하여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결성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추진된 구체적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때의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이 운동의 발단은 제1회 5·16민족상 산업부문 장려상수상자 이한상(李漢相)씨가 상금 50만 원을 본사에 기탁, 영구성(永久性) 있는 동(銅) 또는 대리석(大理石)으로 선열들의 조상을 건립하도록 의뢰해온 데 말미암은 것입니다."

명시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길거리에 너저분하게 늘어선 석고상들의 존재가 '견고한' 동상조성운동의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한상이라는 인물은 당시 풍전산업과 불교신문사 운영자였는데, 그런 탓인지 나중에 장충단 공원에 세우는 사명대사 동상은 자신의 몫으로 떠맡는다.


▲ <계간 미술> 1980년 봄호에는 윤범모 선생이 정리한 '동상 건립내역'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2번째 동상 때까지는 박정희 대통령이 어김없이 제막식에 참석했다. 목록 가운데 을지문덕 장군의 동상건립일자는 '1969년 10월 14일'의 착오이며, 당초에는 제2한강교(양화대교)에 위치했다가 그 후 1981년 4월에 어린이대공원으로 변경된 바 있다.

당시로서는 권력의 최고 실세였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총재를 맡았고 여기에다 서울신문사가 직접 이 사업을 주관했으니, 그야말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듯이 보였다. 동상의 건립은 힘있는 권세가 또는 잘 나가는 재계의 실력자들에게 하나씩 떠맡기는 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자금갹출을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많은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다. 우선 누구의 동상을 건립할 것인지,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역사 인물들의 모습은 또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들이 속속 드러났던 것이다.

비록 각계 인사들을 설문조사하여 건립대상을 선정했다지만, 실제로는 헌납자의 의향에 좌우되거나 이런 저런 외부 압력이 무수하게 작용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세종로에 세워진 충무공 동상의 경우에서 보듯 처음부터 역사고증에 대한 논란에 휩싸여 두고 두고 철거해야 한다거나 재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듭되고 있는 것은 얼마나 사전준비없이 이 작업을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졸속'이었다. 새삼 지적할 것도 없이 한정된 시간에 너무나 많은 동상들을 한꺼번에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쪽에서는 서둘러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야 했고, 제 철을 만난 조각가들로서는 이것저것 재고 말고 할 여유조차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겠나 싶다. 뭐라도 그저 후딱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제일이었던 시절이었다.

또 동상을 배치해야 할 공간에 대한 고민도 그리 깊지는 않았던 듯이 보인다. 특정한 인물의 동상이 어떠한 자리에 놓일 때는 일말의 역사적 관련성이랄까 장소성이랄까 하는 고려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한 사려 깊은 검토가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몇 군데의 간선도로 주변과 유명한 공원지역을 위주로 그저 '적절하게' 안배했던 것이 장소 선정의 기준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 1969년 9월 19일에 있었던 이충무공 동상의 건립기공식 때의 모습이다. 사진 속의 조감도에는 '박정희 헌납'이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충무공 동상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각별한 애정(?)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정부기록사진집

이런 과정을 거쳐 1968년 4월 이후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 동상, 덕수궁에 세종대왕 동상, 장충단 공원에 사명대사 동상이 세워졌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박정희 대통령이 헌납한 것이며, 세종대왕 동상은 김종필 의장이 헌납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애착이 실로 대단했는데, 이순신 장군 말고도 다른 애국선열들에 대한 애정(?)도 이에 못지 않았는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건립한 12번째 동상 준공이 이뤄질 때까지 빠짐없이 모든 제막식에 참석했다. '민족중흥'의 시대였으니 만큼 애국선열들의 존재가 그만큼 긴요했던 까닭은 아니었을까?

1969년 이후에도 동상건립은 계속되어 사직공원에는 이율곡 동상과 신사임당 동상이, 효창공원에는 원효대사의 동상이, 시청광장에는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남대문 앞에는 유관순 동상이, 남산의 시립도서관 앞에는 정약용 동상과 이퇴계 동상이, 제2한강교의 양편에는 정몽주와 을지문덕 장군의 동상이 이내 들어섰다.

다만 1971년에는 완공된 동상이 없었고 1972년에는 절두산 성지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만들어졌다. 지방 쪽으로는 수원의 팔달산에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대전의 충무체육관 앞에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따로 세워졌다. 이렇게 하여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만든 동상은 모두 15기였다.


▲ 1970년 10월 12일에 건립된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당초 남대문 앞의 녹지대에 세워졌으나 불과 반 년여에 해체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다. 알고도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하필이면 진작에 확정된 지하철 1호선의 굴착공사구간에 서 있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시청 앞쪽에 보이는 김유신 장군의 동상 역시 똑같은 운명이었다.

그런데 정해 놓은 위인들의 동상을 수량만큼 만들어 채우는 것이 뭐 그리 급하고 또 중요했는지 그 와중에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이없는 일도 생겼다. 가령 유관순 열사의 동상과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그러했다.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준공된 것은 1969년 9월 23일이었다.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이보다 한 해가 늦은 1970년 10월 12일에 남대문 앞 녹지대에 세워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두 동상은 모두 해체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처지에 놓인다.

알고 보니 때마침 지하철 1호선 굴착공사가 벌어진 탓이었다. 김유신 장군의 동상 쪽은 그렇다치더라도, 유관순 열사의 동상 쪽에야 지하철 예정 선로가 그곳을 지난다는 사실 정도는 진작에 알려진 상태였을텐데, 그것을 알고도 그 자리에 그냥 건립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 바람에 '신제품'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남산2호터널의 장충단공원 쪽 입구로 옮겨졌고, 약간 '중고품'이었던 김유신 장군의 동상도 덩달아 힐튼호텔 인근의 남산공원으로 즉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이것과는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제2한강교 양평동 방면의 녹지대에 세워졌던 을지문덕 장군의 동상 역시 지하철2호선 및 인터체인지 확장공사의 영향으로 1981년 4월에 이르러 어린이대공원 후문 쪽의 한적한 공간으로 밀려난 상태다.

비록 조악한 석고상의 형태나마 서른 아홉 분에 달하는 성현들이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에 한꺼번에 등장한 것이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또 그 일을 계기로 열다섯 분에 달하는 애국선열들이 단단한 재질로 탈바꿈하여 동상으로 거듭났으니, 이때를 일컬어 가히 위인들의 전성시대라 할 만했다. 실상은 '동상파' 조각가들의 전성시대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위인들의 동상을 그토록 서둘러 양산한 것이 반드시 잘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모든 역사는 기념물의 역사라는 얘기가 있긴 하지만, 그저 이름 있는 공원의 구석구석마다 넘쳐나는 것이 동상이고 비석이고 기념탑인 것을 보면 언젠가는 서원철폐령과 같은 '동상철폐령'이 단행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을까 싶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858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