ソウルナビのお墓記事と韓国の葬礼

ソウルナビに出ていたこの記事。ご自身の体験に基づいて、葬儀から納骨、そして移葬まで、そのプロセスがわかりやすいレポートになっています。

コーミィの韓国最新お墓事情〜お墓を移転しました〜! - ソウルナビ

そこでも出てくる「病院の斎場」というのは、韓国では一般的な形態ですが、日本での感覚だとちょっと違和感があります。

そのような形態が一般的となっている理由について日本語で解説したものは、例えば産経新聞のこの記事などでしょうか。

【なぜ解きコリア】韓国は病院に葬儀場がある?
2011.7.2 18:00

【質問】 韓国では、病院に葬儀場があるのが一般的というのはホント?

【解答】 日本では病院の近くに葬儀場があるだけで倦厭されそうですが、韓国では大学病院や大きな病院には付属の葬儀場があるのが普通です。もちろん韓国にも、日本のような専門の葬儀場もあります。

 2009年11月に発生した釜山市内の室内射撃場での火災事故で犠牲となった日本人の遺体も、梁山釜山大学病院の葬儀場に安置されていました。取材で病院を訪れ、驚いた記憶があります。葬儀場の施設は病院の横にありました。「病院に入院している患者さんたちは、隣に葬儀場があることをどう思っているのだろう」と気になりました。

 2009年8月に死去した金大中元大統領はソウル・新村にある延世大学付属セブランス病院に入院していましたが、死去後しばらくの間、隣接する葬儀場内に焼香所がもうけられ、遺体が安置されていました。

 昨年6月に自殺した韓流スターのパク・ヨンハさんの葬儀は、ソウル聖母病院の葬儀場で行われています。韓国ではこのように葬式は病院の葬儀場で行うのが一般的です。

 病院の葬儀場は地上1階に入り口があり、地下に葬儀場が設置されているという形態が多いようです。葬儀場の入り口は、病院側の入り口とは別にあり、遺族や葬儀の参列者を病院内で目にすることがないように配慮されています。

 さてこうした病院が経営する葬儀場が普及したのは、なぜでしょうか? 病院の葬儀場は、1970年代ごろに始まり、30年ほど前から徐々に一般化していったようです。都市化でマンションなどの集合住宅が増え、以前のように家で葬儀を行えなくなったのが主な理由のようです。ひと昔前と比べ、病院で死ぬケースが圧倒的に増えたといった事情もあります。

 韓国では、葬儀費用は健康保険から数十万円支給されるそうで、病院の葬儀場ならば、手続きがスムーズな上、死去に伴うさまざまな届け出も一括して行うことができるといった利便性も、普及した背景にあるようです。

 また韓国では以前から儒教的な理由で、交通事故などの不慮の事故で家の外で死亡した人の場合、家の中で葬儀はせず、家の外で行うといった習慣があるそうです。

 知人の韓国人に聞いたところ、病院に葬儀場があることに対する心理的な抵抗は、ほとんどないということです。逆に「移動などの手間が省けて合理的」という声が返ってきました。

 だいぶ日本人と韓国人は死生観が違うようです。

http://sankei.jp.msn.com/world/news/110702/kor11070218010004-n1.htm

この点について韓国語で理由を述べた記事を探してみると、目についたのがこの記事。出典は別にあり、そこから抜粋したもののようです。

[지식]국내 장례식장의 역사

장례의 역사(서해역사문고 9) - 인터넷교보문고

出典となっている研究書『葬礼の歴史』の著者であるパクテホ氏については、下のような記事や書評が出ています。

“젊은이의 패기를 간직한 자랑스런 성균인입니다”

「한국 고대 장묘문화」논문내며 본교 사학과 졸업하는 박태호(51) 씨
[1337호] 2003년 09월 01일 (월) 00:00:00 이혜진 기자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죠. 대학원 과정을 통해서 정말 제가 하고 싶었던 공부, 일을 본격적으로 할 겁니다.”

서울시 소속 50대 공무원이자 「한국 고대 장묘문화」라는 독보적인 학사 졸업논문을 내며 본교 사학과를 조기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박태호(51)씨.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수요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시설운영팀장(행정직 6급)으로 일하고 있는 박씨를 만났다. 앞으로 동양사를 전공하게 될 박씨는 특히 일본의 장묘문화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싶단다. 장묘문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지난 6월 ‘서울 장묘시설 100년사’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묘지, 화장장 등의 과거역사기록들을 접했는데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미비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제가 구체적인 기록을 남겨보고 싶었죠.” 이것이 바로 그가 늦은 나이에 대학입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

직장생활과 학업을 동시에 하면서 힘든 일은 없었을까. “사실 두 가지를 병행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어요.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도 몰라요.” 그런 그에게도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시험 스트레스요. 공부하는 것 자체로는 즐겁기도 했고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었지만 시험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받게 되더라고요. 특히 저의 경우는 나이도 있는만큼 사람이름, 지명 같은 소소한 것을 암기하기 힘들었어요.” 시험기간에는 직장에 일일휴가까지 내면서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곤 했다는 박씨.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학업이 하루하루 성취되어간다는 사실에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앞으로 박씨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한국을 비롯한 동양 장묘문화의 변천사를 정리, 관련 책을 서너권 정도 더 내고 싶다고 한다.

박씨는 후배들에 대한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우리학교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상대평가제도인 우리학교에서 저 같은 만학도에게 A학점을 내줬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에요. 젊은이의 생생한 머리를 가지고도 저 같은 사람에게 좋은 학점을 내준다는 것은 학생들이 노력을 안했다고 밖에 볼 수 없어요.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면서 어렵고 험난한 길도 개척해 보는 당당한 성균인이 돼보자고 권하는 박씨. 인터뷰를 마무리할 무렵 ‘skku’가 새겨진 티셔츠를 자랑스레 보여주며 학교자랑을 늘어놓는 박씨를 보면서 그의 진정한 모교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http://www.skkuw.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515

편집 2003.08.21(목) 23:07
3년만에 학사모 쓰는 장묘전문 공무원 박태호씨

“삶에 질이 있다면 죽음에도 질이 있죠”

“10여년 동안 쌓은 실무 경험과 각국의 장묘시설을 돌아다니며 얻은 견문을 깊이 있는 학문과 접목시켜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장묘문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50대 공무원이 오는 25일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꿈에 그리던 학사모를 쓴다. 주인공은 서울역사박물관 시설운영팀장(행정직 6급) 박태호(51)씨. 1971년 대학에 붙고도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진학을 포기한 박씨는 32년 만에 대학졸업장을 받게 돼 감회가 남다르다. 그것도 학점 4.5만점에 4.19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7학기만에 하는 조기졸업이다.

“하루에 5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습니다. 업무가 많을때는 수업을 마친 뒤 사무실에서 밤을 새워 잔무를 처리한 날도 많았죠.”

박씨의 졸업 논문도 화제다. ‘한국 고대의 화장문화’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박씨는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우리나라 화장문화를 다루며, 화장 풍습이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인 청동기시대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밝혀 주위에서 박사논문 수준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박씨가 처음 장묘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91년 서울시 사회과로 발령나 장묘업무를 맡게 되면서부터다. 10년 동안 실무를 하며 모은 자료와 경험을 담아 지난 6월에는 <서울 장묘시설 100년사>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삶에 질이 있다면, 죽음에도 질이 있는 것입니다. 유럽 국가들은 국민에게 평등한 사후를 보장해줍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서울 서초구 원지동에 추모공원을 설립하는 계획을 짜기도 했던 박씨는 대부분의 자치단체들이 장묘정책을 소홀히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박씨의 졸업을 누구보다 반기는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이다. 특히 박씨의 대학합격증을 30년 동안 간직해 왔던 큰누나 시자(62)씨는 이제야 동생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있게 됐다며 웃는다. 박씨는 올 가을 성균관대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박사과정도 밟아 ‘장묘전문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키운다.

윤진 기자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3/08/009000000200308212307314.html

‘장례의 역사’ 책 펴낸 서울시 공무원 박태호씨
등록 : 2006.07.24 21:55

“삶과 죽음 대하는 방식 시대따라 변화무쌍하죠”

모두 꺼리는 일에 유달리 애착과 매력을 느껴 ‘올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시 공무원 박태호(54·월드컵공원사업소 환경관리팀장)씨도 그렇다. 91년 노인복지과로 발령이 나 우연히 묘지·화장장 등의 관리를 맡게 되면서 그는 처음으로 장묘 문제에 빠져들었다. 그 뒤로 10년. 2001년 장묘 업무를 손에 놓을 때까지 그는 벽제화장장 개축, 용미리 납골당 추가 건립 등 숱한 장묘 업무와 씨름했다. 지역 주민들의 반대와 이에 쉽게 편승한 행정기관의 무사안일주의로 비록 불발에 그쳤으나, 서초구 원지동에 추모공원을 세우자고 계획안을 내놓은 것도 그였다.

장묘 업무에 골몰하다 보니 학문적인 관심도 생겨났다. 2000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해 3년반 만에 학부과정을 끝냈다. 칼을 빼든 참에 아예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한문 서적을 읽어가면서 우리 나라의 장묘 문화와 역사를 공부했다.

장묘, 장례, 죽음의 문제에 깊이 탐색해온 그가 최근 책을 펴냈다. <장례의 역사>(서해문집 펴냄). <서울장묘시설 100년사>, <세계묘지문화기행>에 이어 장묘에 관한 세 번째 저서다.

그가 보기에 사람은 어느 시대나, 누구나 죽지만,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달랐다. 고대~삼국시대엔 장례를 화려하고 위엄있게 치르는 ‘후장’을 선호했다. 그러나 불교가 들어오며 화려하게 치장한 무덤은 사라진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이며, 중생은 끊임없이 삼계육도를 돌고 돌며 생사를 거듭한다는 사상 때문이었다. 화려하게 무덤을 꾸미는 풍습 대신 간소한 ‘박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고려말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화장은 권장 대상에서 ‘엄벌’대상으로 변했다.

박씨는 그러나 “사람들이 화장을 기피하게 된 것은 일제시대 때 확고히 뿌리내렸다”고 말한다. “제대로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화장장과 허름한 공동묘지는 화장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보편화시켰지요.”

그는 삶이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는 않지만 죽음은 평등하며, 그래서 죽은 자 누구나 존귀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외국의 한 묘지에서 같은 크기로 꾸며진 장군의 무덤과 사병의 무덤을 바라보며, 죽음과 삶에 대한 한국인의 허상을 다시 돌아봤다고 했다.

정년을 3년 남겨둔 그는 가장 하고 싶은 일로 “한국장례역사 전공서를 쓰는 일”을 꼽았다. 아마 장묘 문제는 그를 평생 은퇴시키지 않을 것 같다.

이유주현 기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43854.html

こんど「韓国の病院に葬礼式場がある理由」について尋ねられたら、こうしたものを踏まえて答えればいいんでしょうか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