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川の風景】植民地支配の痕跡・富平「タダグミ」の現在(2016年9月秋夕)

「タダグミ」についてはこちらをどうぞ。日本語での情報はこれでほぼ全てだと思います。

liumeiuru.hacca.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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個人的にはこの時のリベンジです。

blue-black-osaka.hatenablog.com

桃源駅から移動してきた富平駅。秋夕当日ということもあるのか、前回来た時以上に外国人比率が高いような気が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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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目指す「タダグミ」は、富平駅から歩いてすぐ、駅前の大きな北仁川郵便局の裏手あたりにある、と聞いていました。今回は珍しく、事前にちょっと調べました。

다다구미를 아시나요 - 샘데디

아픈역사의 흔적 '다다구미'를 아시나요? : 네이버 블로그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 부평동 - 인천@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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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も、なのに、なかなか見つけられない。我ながらどんくささに呆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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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こっちの方か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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ねえ?(熟睡につき無回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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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も。んー?あれ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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うーむ。こうきたか。ちょっと遅かったか…。

今のところ、この解体現場の周囲にはまだ旧来の建物が残っていますが、それらが姿を消すのもおそらく時間の問題でしょう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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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おっとぉ!頭上からいきなり声かけるから、ビックリするやんかキ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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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だ住んでいる方もおられないわけではないです。ですが、この状況からして、見に来るならたぶん早くした方がいいです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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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략 역사 간직한 부평 사택들 사라질 위기
“노후불량 주택 개선에 앞서 기록 보존 검토해야”
한만송 기자 [580호] 승인 2015.03.30 19:39:02

일본 제국주의는 2차 세계대전을 벌이기 위해 조선에 대규모 군수(軍需: 군대에 필요한 물자) 생산 공장을 신설한다. 이에 따라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고, 군수 공장 근처로 몰려든 노동자들의 주택난은 상당히 심각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36년부터 주택공급정책을 본격 추진했고, 1941년 공영주택기관인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영단주택으로 대표되는 공공 공동주택을 건설했다.

일제는 조선 최대 군수 공장인 부평 조병창 주변에 영단주택을 비롯해 지제사택(舍宅), 다다구미, 히로나카사택(홍중사택) 등을 지어 보급했다. 1939년에 지금의 동아ㆍ대림ㆍ욱일ㆍ현대아파트와 캠프마켓 부지에 신설된 부평 조병창에선 소통ㆍ탄약ㆍ포탄 등뿐 아니라 차량과 잠수정까지 만들었다.

해방 이후 부평 조병창 일대엔 미군부대가 들어섰다. 이에 따라 이 주택들의 거주자에도 변화가 일었다. 그중 부평2동 히로나카사택(부평동 760-279번지)은 미군기지와 가깝고, 주택 상태가 양호에 미군에게 로 성을 파는 이른바 기지촌 여성들도 거주했다. 나중에 부평공단이 생기면서 이 사택엔 공단 노동자가 살거나, 미군이 떠나고 들어온 한국 군인이 거주했다.

세월이 흘러 2000년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서는 등, 주택 상황이 변하면서 호당 건축면적이 33㎡ 안팎으로 협소한 데다 매우 낡은 이 사택은 상당수가 공가 또는 폐가로 방치돼있다.

이에 부평1지구 주거환경개선사업 구역으로 지정됐으나 부동산 경기 침체 후 정비예정구역에서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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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구 부평2동 옛 히로나카사택 전경.<사진제공ㆍ부평구>

국토부, ‘주거 취약지역 개선 사업’ 대상지로 선정

부평구와 문병호(부평구 갑) 국회의원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노후 불량 주택이 밀집한 부평구 부평동 760-279번지 일원(=부평1지구 주거환경개선사업 구역)이 국토교통부의 ‘주거 취약 지역 개선 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고 최근 밝혔다. 이 구역의 면적은 7659㎡이며, 국비 40억원 지원이 예정됐다.

국토부의 ‘주거 취약 지역 개선 사업’은 도시와 농어촌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도시지역 대상지 선정에는 총72개 지역이 신청해 30곳이 선정됐다. 인천은 두 곳으로, 부평동 760-270번지 일원과 동구 만석동 2-102번지 만석부두 일대다.

문 의원과 부평구는 “낙후한 부평1지구가 주거 개선 대상지로 선정되게 국토부에 요구했다”며 “어렵게 선정된 만큼 국비 40억원을 착실히 확보해 주거개선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부평구의 설명을 정리하면, 부평1지구는 생활여건이 열악해 주택 총87호에 63명이 살고 잇다. 거주민은 모두 취약계층으로 65세 이상 노인 32명, 장애인 10명, 기초생활수급자 12명, 차상위 계층 9명이다.

부평구는 사업비 총50억원(국비 40억원ㆍ지방비 10억원)을 확보해 향후 3년간 노후 불량 주택과 기반시설을 정비할 계획이다. 허가 건축물 28호 개량, 무허가 건축물 30호 수리, 공ㆍ폐가 20호 철거, 양호 건축물 9호 존치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공동 작업장과 화장실 등을 신설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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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구 산곡1동에 있는 영단주택. 일제는 이 영단주택을 지으면서 “질 좋은 소 주택이면서 쾌적한 환경의 빛과 통풍이 좋은 위생적, 능률적인 곳”이라고 자평했다.

일제강점기 사택들 그냥 사라질 위기
“역사적 가치 있어, 기록 보존 필요”

한편, 일각에서는 일제의 조선 강점이라는 역사성을 간직한 이 주택들을 무조건 철거하는 것을 재고해야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부평구는 이 주택들의 역사적 가치 등을 연구한 바 없다.

부평미군기지(이하 캠프마켓)가 2017년을 전후로 평택으로 이전되고 시민에게 개방될 상황 등을 감안하면, 히로나카사택을 보존할 가치가 있고, 캠프마켓과 연계한 관광코스 개발 등도 가능하다는 게 역사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산곡동 87번지 일원의 영단주택 등도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영단주택은 재개발 예정구역으로 묶여 있다. 부동산 경기가 회복되면, 철거가 불가피한 상황이다.<시사인천>이 30일 부평구에 확인한 결과, 부평구는 영단주택과 히로나카사택의 보전이나 활용을 검토한 바 없다. ‘역사적으로 보존가치가 있고, 캠프마켓 활용방안과 연계한 검토가 가능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검토해보지 않았는데, 전문가들과 논의해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김현석 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위원은 “낡은 영단주택 등을 그냥 방치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기록은 남겨놓아야 한다. 이전할 캠프마켓으로 옮겨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조병창 건물과 함께 보존하는 방법 등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박명식 부평학 스토리텔러 회장도 “영단주택 등은 지은 지 80여년 된 주택이지만, 부평구는 이 주택들의 실태 파악조차 하지 않은 상태다. 이 기회에 실태를 파악하고 보존 방법 등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영단주택 등의 연구는 민간에서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4월 ‘일제하 강제 동원 피해조사 및 희생자 지원’ 활동가 20여명은 부평 조병창 부지와 영단주택 등을 살펴봤다. 현재까지 조사한 기록을 보면, 부평에서 강제 동원은 27곳에서 이뤄졌다.

http://www.bp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30591

途中でなぜが切れていますけど、「京仁日報」の1999年のこの連載記事が、「タダグミ」の来歴をいちばん詳しく記していると思います。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22]일제조병창
경인일보 발행일 1999-07-13 제0면

<인천이야기_22:다다구미와 일제 조병창>

여관과 낡은 한옥 등으로 밀집된 부평구 부평 1동 341 일대는 일제의 침략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일제가 「세계침략의 야욕」을 뻗치던 와중에 한국인들을 전쟁을 치르기 위한 각종 공사에 강제동원하면서 형성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40대 이후 부평 토박이들은 아직도 동아아파트 입구에서 북인천우체국 큰 길 까지를 속칭 『다다구미』로 부른다. 「다다구미」는 일제가 대동아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조병창에서 출발한다. 일제는 1940년대 들어 중국침략을 위해 부평일대에 조병창을 건설한 뒤 각종 무기는 물론 잠수함 까지 만들어 최전방에 공급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병창은 지금의 동아·대림·욱일 아파트를 비롯 산곡 3_4동의 미군부대, 현대·우성·동남·삼일 아파트, 화랑농장 일대에 폭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는 1940년 4월 1일 부천군 부내면을 제2차 부역확장으로 인천부에 편입시키고 부평조병창 확장공사에 들어갔다. 이 공사의 하청업자는 모두 일본인. 관또구미(關東組), 다다구미(多田組), 다마보구미(玉操組), 시미스구미(淸水組), 하사마구미(間組)등 5개 업체가 맡아 일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국민총동원령을 공포, 전국에서 젊은 일꾼들을 모아 「근로보국대」란 이름으로 공사에 투입했다. 근로보국대는 일제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갖가지 국내 공사에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한 일종의 징용이었다. 일제는 근로보국대를 군대식으로 조직화해 각 군 단위로 이끌었다.

다다구미는 그 때 현장 사무실을 현 파레스호텔 뒷편에 마련하고 공사를 벌였다. 이 곳 주민들은 당시 지금의 부평역 앞 대한통운에서 북인천 우체국을 거쳐 상업은행 부평지점 까지를 「앞산」이라 불렀다. 높이 1백여m의 야산이었는 데, 다다구미는 이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 조병창을 확장하는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그 무렵 다다구미의 상황은 이렇다. 다다구미촌엔 전국 각지에서 몰려 든 토목·건축 기술자들이 일했고, 8가구가 한꺼번에 기숙할 수 있는 건물이 60여채나 있었다. 공사규모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가구를 평균 4명으로 기준하면 다다구미촌에 1천9백여명의 기술자와 그 가족이 살고 있었던 셈. 다다구미촌 건물은 지붕을 『루핑』이라 불리던 시커먼 기름종이로 덮어 씌울 정도로 열악했다. 아울러 이 곳에서 일하던 한국인들은 겨우 입에 풀칠할 만큼의 양식을 받으며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등 매우 비참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다다구미 등 조병창 하청회사들도 속속 철수했다. 하지만 조병창에서 일하다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인부들은 그대로 판자촌에 눌러 앉아 살았다. 해방 이후 이곳은 날품팔이로 연명하는 노동자들이 모여 생활하면서 「좌익활동」의 본거지로 지목되기도 했다. 선대가 부평향교 전교를 지냈고 부평에서 줄곧 살았다는 權태옥씨는 『다다구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일부는 오늘날 부평도심을 형성하게 됐다』며 『지금은 당시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60년대 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다다구미를 마치 부평의 중심지역처럼 여겼다』고 말했다.

다다구미촌은 「6·25」가 터진 후 인천상륙작전 때 집중적인 폭격으로 거의 다 파괴됐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 흩어졌던 주민들은 하나 둘씩 다시 이 곳으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 난리통에 갈 곳이 없게 된 서민들은 전처럼 판자집을 짓고 「달동네」를 이뤄갔다. 주민들은 그 때 다닥다닥 판자집을 잇대어 지으며 살고 있는 모습을 빗대어 이 일대를 또 다른 의미의 「다다구미」로 부르기도 했다.

한국전쟁과 함께 이 곳에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은 「호황」을 맞게 된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각종 원조물자들이 넘쳐나 많은 주민들이 재산을 축적하는 계기를 맞은 것.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 든 것도 그 즈음이다. 부평일대엔 당시 속칭 「양키물건」들이 아주 흔했고, 많은 이들은 이를 통해 장사를 하며 생활을 꾸려 갔다.

다다구미는 이처럼 오랫동안 서민들의 보금자리 구실을 톡톡히 했으나 「홍등가」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먹고 살길이 막막하던 수백명의 여성들이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간 것이다. 다다구미 홍등가에 있던 여성들은 주로 한국인 노동자들을 상대했다. 그래서 미군들을 상대하던 「관또구미」 지역 여성들과 분류돼 「싸구려」란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홍등가가 점점 더 영역을 넓혀가면서 한 때는 굴포천을 따라 대규모 집단촌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朴正熙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정화사업」이란 명목아래 이들 여성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60년대 말 쯤 「홍등가」는 거의 사라지게 됐다. 그 무렵 일부 뜻있는 주민들은 다다구미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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