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型コロナウイルスが直撃した馬山(昌原)の「3.15」

韓国では例年、春先から初夏にかけて、馬山の「3.15」、済州の「4.3」、それから「4.19」「5.18」を経て顕忠日(6.6)と民主化抗争記念日(6.10)に至る現代史的記念式典が続くシーズンとなっているのですが、今年のこの新型コロナウイルスの流行で、どこまで例年通りできるか不透明な状況になっています。

とりあえず、馬山の式典は中止されたようです。今年は3.15義挙60周年ということで、長らく4.19革命の陰に埋もれがち(というか付属品扱い)だったこの記念事業の地位をさらに向上させようと意気込んでいた人もいたようなのですが、これはやむを得ません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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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代大統領・国務総理の演説を分析している上記記事の末尾部分が、そのへんの空気を示しています。

◇4·19혁명의 과정 속 3·15의거

그렇지만 역대 정부가 3·15의거를 이 같이 바라보면서도 그 지위는 4·19혁명의 자장 아래 포함돼 있다. 의거 당시 12명이 숨지고 250여명이 다친 근현대 최초의 독자적인 유혈 시민혁명이었지만, 3·15의거 희생자는 4·19혁명 관련 유공자로 정의되는 등 역사적·법적으로 독립적인 의거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역대 대통령·국무총리 기념사에서 이따금 4·19혁명의 ‘기폭제’, ‘도화선’으로 표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영달 3·15의거희생자유족회 사무국장은 앞서 경남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법으로는 1960년 4월 19일 전후를 기해서 사망을 한 사람이나 다친 사람에 대해 4·19혁명 희생자 또는 부상자라고 칭한다”며 “우리는 법적 단체명도 ‘4·19혁명 희생자유족회 경남지부’라고 정해져 있다. 안까운 현실이다. 3·15라는 말도 없다. 3·15의거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40주년 50주년 한 걸음씩 변화, 60주년에도...

3·15의거 40주년이 되던 해 고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 처음 3·15의거 기념식에 참석했고 2년 뒤인 2002년 3·15의거 희생자가 영면해 있는 3·15 성역공원이 국립3·15민주묘지로 승격, 이듬해 준공됐다. 50주년인 2010년에는 3·15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이후 3·15의거기념식 행사는 정부 주관으로 치러졌다. 60주년인 올해 3·15의거 관련 단체를 창원지역을 중심으로 3·15의거를 재평가하고 관련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조되고 있다. 3·15의거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설치, 3·15의거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 추진 등의 내용이 담긴 ‘3·15의거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이 지난해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올 4월 총선을 앞둔 20대 국회는 얼마 남지 않았다. 회기 종료 전 통과하지 못한 법률안은 자동 폐기된다.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321493

馬山の慶南道民日報は、この機会に3.15義挙で主導的役割を果たした人物の証言を掲載したり、市内の関連史跡地を歩いて回って記事にしたりしてます。まだ当時の参加者が生存している段階でもありますし、行政側もこれを歴史コンテンツとして生かそうとする意欲も高いようです。「人々の記憶の中から歴史の彼方へ」といった現象は、これはまだだいぶ先のことですね。

午東洞や舞鶴初等学校前など、挙げられている関連史跡の一部は過去に行ったことありますが、それはそれとして、これらの「歴史」をどう扱っていくのか、しばらく見守っていく価値はありそう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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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 60주년 기획 우리가 기억하는 법 (1) 한 인물의 삶으로 보는 역사
빨갱이로 몰릴까 차마 말 못한 '그날 밤'
이동욱 기자 2020년 03월 13일 금요일

고 하상칠 씨 '민권수호'주도하고도 가족에게조차 숨겨
뒤늦게 유공자 신청했지만 증거 없단 이유로 인정 안 돼

3·15의거 60돌입니다.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올해는 국가기념식이 열리지 못하고 사회적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지만,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당대의 정신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두 차례 글을 싣습니다. 3·15의거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지적은 수년 전부터 제기돼왔는데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인물의 이야기와 마산지역 풍경을 돌아보며 3·15의거 콘텐츠화 가능성을 엿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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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하상칠 씨 딸인 하효선(왼쪽) ACC프로젝트협동조합 대표와 하 대표 남편 서익진 경남대 교수가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그날 밤 나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 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중략)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 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1960년 마산시 산호동에 살던 35세 얼음소매상 하상칠(사진) 씨 이야기다. 그는 3·15의거 당일 야간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을 평생 숨겼다. 50년이 지난 2010년 10월 7일에야 그날의 이야기를 전했고, 이는 <3·15의거 증언록>에 실렸다.

2017년 7월 91세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앞서 그가 증언을 시작한 때는 국립3·15민주묘지가 들어서고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는 시기였다. 3·15묘지 준공식은 2003년 3월,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은 2010년 3월이었다.

딸인 하효선(64) ACC프로젝트협동조합 대표와 사위인 서익진(65) 경남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도 당시 그의 증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긴 시간 침묵한 이유가 있었다.

"장인께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남원 쪽에서 나무하러 갔다가 인민군에 잡히고 나중에는 국군의 포로가 돼 거제포로수용소에서 3년을 살았다. 이런 경험 때문에 빨갱이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가족한테도 3·15 이야기를 안 했다. 이후에 경찰 퇴직자 모임인 경우회 고문에 이름을 올려놓을 정도로 철저히 숨겼다."

가족은 그가 떠나고 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사진·일기·신문기사·병원기록 등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없고 진술만 있다는 이유로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3·15와 관련한 국가기록물을 찾고 있지만, 개인정보라며 공개가 안 되고 있어 개인 또는 민간단체로서는 자료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두 가지 핵심 증언이 있다. 바리케이드를 쳤거나 총기와 관련한 이야기는 시중에 떠돌지만 증언이 없었는데, 그 내용이 장인한테서 나왔다. 미시사 방법론은 새로운 역사 기술 방법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동안 거시사·사회사·사상사·정치사 등 집단 중심의 기술이 대세였는데, 미시사는 특정 개인이나 소집단의 사고, 생활, 활동 등을 연구해 그 당시 큰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술이 신빙성은 떨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누가 봐도 합리적인 진술이라면 그보다 정확한 것이 없다. 유공자 심사에도 미시사 연구를 적용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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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용지 4쪽에 가까운 증언록 중 일부는 이렇다.

"무학국민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돌을 치마에 담아 나르고 사람들은 투석을 계속하고 있었다", "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있지만 차는 다닐 수 없도록 길을 가로지르는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하여 전봇대를 옮겼다", "총을 탈취한 학생들에게 '학생들,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데모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방해하는 무리들의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이지, 군인들이나 경찰들을 없애거나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총을 서로 겨누고 또 쏜다면 이건 우리의 목적과는 다르다. 여기 군인들은 옷이 다를 뿐 우리들의 형제이고 같은 심정일 수도 있다. 단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따라서 총을 뺏어 서로 겨누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며 총을 모두 회수했다."

2018년 서 교수는 장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이라는 논문을 썼다. 하 대표는 이를 문화예술 기획 분야로 확장했다.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여러 국내외 작가가 3·15의거를 주제로 다양한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것이다.

"사실 아버지 이야기라서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특히 3·15는 지역·인류학적 연구와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 시기 부정선거에 맞서 불붙은 곳이 마산이다. 그렇다면 왜 마산이었는지, 개개인의 삶에는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제대로 살펴봤으면 한다. 한 지역에서 능동적으로 발현한 모습, 당시 사람들의 표현 방식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눈도 함께 봐야 한다."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23882

우리가 기억하는 법 (하) 3.15의거 재현길 걸어봤더니
숨겨진 희생자 오랜 흔적들 되살려야
최석환·이동욱 기자 2020년 03월 16일 월요일

3·15의거탑·각종 부조물
단순 시설점검·유지 넘어
민주교육 기능 강화 절실

<경남도민일보>는 3·15의거 60주년을 맞아 남기문 3·15의거기념사업회 국장과 함께 '3·15의거 재현의 길'을 돌아봤다. 3·15 발원지를 시작으로 불종거리, 3·15의거 기념탑, 마산의료원,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등으로 이어지는 재현의 길 9곳을 소개하고, 기념사업회가 진행하는 3·15의거 관련 행사 일정 등을 짚어봤다.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시작된 3·15의거 = 뜯겨버린 나사와 덜컹거리는 밑바닥, 이 흔적은 3·15의거를 상징하는 부조물의 지난 14일 모습이다. 이날 오전 10시에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본 이 부조물은 지나가던 차에 부딪혀서인지 밑바닥이 반쯤 뜯겨있었다. 옛 민주당 마산시당 당사가 자리했던 건물 앞에는 '3·15의거 발원지 상징공간 조성지'라고 적힌 파란색 배경의 현수막만 걸려있고 정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남 국장은 "당시 정경도 민주당 경남도당위원장을 필두로 부정선거에 반발한 민주당원들과 시민들이 집결해 첫 시위를 벌인 장소가 바로 오동동 문화광장이었다"며 "3·15의거 당시 광장에는 2층짜리 목조건물로 지어진 민주당 마산시당 당사가 있었지만, 현재 이 자리에는 목조건물 대신 5층 상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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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기문 3·15의거기념사업회 국장이 지난 13일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앞에서 관련 설명을 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여기서 경남은행 오동동지점 방면으로 3분 정도 올라가면 불종거리가 있다. 불종거리는 마산어시장부터 육호광장으로 이어지는 일대 구간이다. 당시 시위대는 선거 무효를 요구하며 옛 당사 앞에서 불종거리로 이동했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와 경찰은 투석전(돌을 던지면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불종거리에서 마산어시장과 창동통합상가 쪽으로 5분 정도 더 걸으면 창동치안센터가 나오는데, 불종거리 일대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시민들이 우르르 몰려가 시위를 벌인 곳이 창동치안센터였다.

남 국장은 "창동치안센터는 마산시청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구두닦이를 하던 오성원 열사가 여기서 돌아가시고, 강융기 열사는 여기서 총을 맞았다"며 "이곳은 항상 표적이 되는 장소였다. 부마항쟁, 6월 항쟁 등과 관련이 되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마산의료원 방면으로 15분 정도 걷다 보면 3·15기념탑이, 기념탑에서 3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3·15의거 무학초등학교 총격담장이 세워져 있다.

당시 경찰은 시위대가 옛 마산시청(현 마산합포구청)으로 가는 길목에서 무학초등학교 앞 도로에 집결하자 실탄 조준사격을 했다. 이 총격으로 무학초등학교 담장에는 실탄 자국이 남았다.

남 국장은 "실탄 자국이 있는 실제 담장은 원래 무학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었지만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다"며 "지금 있는 총격담장은 실제 담장이 있던 장소 옆에 교육용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담장이 있던 자리에는 3층 규모의 상가 건물이 있었다. 그 옆에 있는 교육용 총격담장은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해서 생긴 총알 자국을 실제 모습처럼 본떠 지난 2014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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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 재현의 길은 = 창원 마산합포구 오동동 3·15의거 발원지에서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에 이르는 '3·15의거 재현의 길'은 1960년 3월 15일부터 4월 19일까지 역사적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창원시는 2016년 이후 이 일대 역사 탐방 활성화를 위해 코스를 만들었다. 걸어서 이동하면 3시간 정도 걸리는데, 역사 현장을 체험하며 자유·민주·정의 등 3·15의거 정신을 되새기자는 취지다.

이와 함께 '마산 민주화의 길'(3·15아트센터~부마민주항쟁 조형물)도 조성했다. 3·15의거,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6월 항쟁이 일어난 민주성지로서 탐방 코스도 마련한 것이다. '3·15의거 재현의 길'과 '마산 민주화의 길'은 시청 누리집에서도 자세히 볼 수 있다.

하지만 3·15의거 교육·탐방 콘텐츠와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지적은 계속 제기돼왔다. 행정에서도 단순히 기존 유적지와 시설물 점검이나 유지관리에 그치지 않고, 유적지를 활용한 콘텐츠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창원시는 올해 3·15의거 발원지 상징공간을 조성 중이다.

마산합포구 문화의길 54(오동동 165-7)에 있는 지하 1층~지상 5층 상가가 상징공간으로 만들어진다. 3·15의거 당시 2층 목조 건물로 옛 민주당 마산시당사로 전해지는 장소다. 시는 이곳에 민주화 유적지 탐방객과 시민을 위한 교육장, 홍보 자료관, 시위 체험관, 민주주의 역사관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박성원(더불어민주당, 완월·자산·오동동) 창원시의원은 지난 1월 본회의 5분 발언에서 건립한 지 60년이 되는 3·15의거탑 보강·보수 등을 요구하고, 3·15의거 발원지에서 3·15의거탑을 지나 마산중부경찰서까지를 '민주화거리'로 명명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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