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の風景】西門市場の火災跡を見る。

昨日の記事の続きになります。

【大邱の風景】大邱駅で純宗皇帝に出会う。 - 大塚愛と死の哲学

と言っても、大邱駅からまず向かったのはチャガルマダン。そこが大邱駅から徒歩圏にあるのはわかっていました。

【大邱の風景】チャガルマダン(覗いただけ) - 大塚愛と死の哲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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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かし、その後どこに行くかを何も考えていない。ので、チャガルマダンの裏手、大邱芸術発展所の前の公園で今さらながら検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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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あそうか、ここからやと西門市場が近いわ。

ということで、目の前のモノレール(都市鉄道3号線)には乗らず、達城路を徒歩で南に向か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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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はたいへん大きな総合市場です。昨年11月の大規模火災で焼けたのはその一区画、「4地区」と呼ばれているところ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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亀尾・朴正煕大統領生家と大邱・西門市場の火災、そして朴槿恵大統領 - 大塚愛と死の哲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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黒く煤けたアーケードの屋根は、火災の激しさを示すとともに、通路一つを挟んで全焼した店舗と無傷だった店舗との明暗を物語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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焼け落ちた4地区は塀で囲まれています。ベタベタ貼られているのは、まずそこにあった店舗の移転や仮営業の案内、そして様々な糾弾の言葉の書かれた横断幕などです。被害を受けた店舗の多さが一目瞭然ですし、多数の当事者・利害関係者が合意して営業再開に至るまでの道のりはなかなか険しそうだという印象を持ち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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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

まあともかく、まずは撤去工事が完了しないことには始まりませんね。

서문시장 4지구 6일부터 철거공사
25억 투입, 7월5일까지 공사
금은방 귀금속 등 거둬들여
전재용기자 승인 2017.02.02

지난해 11월 큰 화재가 났던 서문시장 4지구 상가가 오는 6일부터 철거공사를 시작한다.

대구 중구는 지난달 31일 A건설사와 `서문시장 4지구 화재 건축물 및 석면 철거공사` 계약을 체결하고 오는 6일부터 7월 5일까지 철거를 진행한다고 1일 밝혔다.

또, 국민안전처에서 받은 재난안전 특별교부세 35억 원은 철거 비용 18억 원과 석면 폐기물 처리 비용 5억 7천만 원 등 25억여 원의 사업비를 사용한다.

이와 함께 서문시장 4지구 1층에서 운영하던 금은방의 귀금속 등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인들의 물품도 거둬들일 계획이다.

하지만, 수거에 앞서 건설사와 현장을 방문해 안전과 철거 순서 등을 논의해야 하고, 서문시장 4지구 비상대책위원회의 의견도 수렴해야 하기 때문에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중구청 관계자는 “애초 철거 완료할 시기를 6월로 잡았지만, 설연휴 동안 적격 심사가 미뤄지면서 일정이 조금 늦게 잡혔다”며 “상인들의 고충을 생각해 6월까지 철거를 완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인들의 물품 회수 일정은 오는 6일 착공계를 내기 전까지 협의할 내용이 많다”며 “아마 철거 작업이 시작된 이후에 일정이 잡힐 것 같다”고 말했다.

/전재용기자

https://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405995

4지구, 베네시움 이전 답보…3월 말 입주 물 건너가나
2017-02-02 04:55:01

임대료·공사비 뚜렷한 입장차

서문시장 4지구의 대체상가로 '베네시움'이 최종 확정됐지만 당사자 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이전 논의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대구시와 베네시움 관리단, 4지구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 등은 임대료와 시설 수리 공사비, 보증금 등 이전에 따른 구체적 금액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런 논의를 하지 못했다.

베네시움 관리단은 지난달 24일 열린 총회에서 전체 716명의 점포 소유주 중 642명의 동의를 받아 대체상가 계약 권한을 위임받았다. 관리단이 권한을 갖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임대료나 시설 수리 공사비 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됐다. 비대위도 하루빨리 논의를 끝내고 이전을 통해 영업 재개를 바랐다.

대구시 역시 애초 지난달 말까지 베네시움 관리단, 비대위 관계자와 논의를 마치고 시설 수리 공사에 착수해 이르면 3월 말 입주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방치된 상가를 활성화하려는 베네시움 측과 서둘러 장사를 재개하려는 4지구 피해상인들의 이해관계도 일치, 합의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란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막상 권한을 위임받자 임대료 등 세부 사항을 두고 베네시움 측과 비대위 간 입장 차가 드러났다. 베네시움 측은 약 3.97㎡ 규모인 점포당 수백만원의 임대료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비대위는 현재 베네시움이 거의 방치돼 있는 만큼 수백만원의 임대료는 지나치다는 입장이다. 비대위 관계자는 "각자 입장이 다른 만큼 원하는 금액 역시 다르다. 어쨌든 이전은 꼭 해야 하는 만큼 조만간 양자가 만나 논의를 시작하면서 맞춰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양측은 설 연휴가 직후인 지난달 31일과 이달 1일 만날 예정이었지만 잇따라 연기했고, 아직 아무런 접촉조차 없는 상태다. 베네시움 관계자는 "베네시움 관리위원회 자체 회의도 하지 않아 구체적 입장이 나오지 않은 상태"라며 "최대한 빨리 내부 의견을 모아 협상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당초 목표였던 1월 말 합의가 무산되면서 입주 시기도 늦어질 전망이다. 현재 상태로는 일러야 4월 말쯤 가능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한편 대구 중구청은 4지구 철거를 위해 지난달 31일 업체와 계약을 맺었고, 6일부터 7월 5일까지 철거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상구 기자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092&yy=2017

【大邱の風景】大邱駅で純宗皇帝に出会う。

まだチャガルマダン朴槿恵さんの生家跡のことしか記事にしてませんけど、大邱のネタはまだいくつもあるんですよねえ。

【大邱の風景】ARTBOXとPARIS BAGUETTEとの間 - 大塚愛と死の哲学
【大邱の風景】チャガルマダン(覗いただけ) - 大塚愛と死の哲学

ま、ぼちぼちやります。

とりあえずその日、釜山から大邱に向かったわ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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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通したてのこの水西発高速鉄道(SRT)ではなく、ITXセマウル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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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ので、降り立ったのは東大邱駅ではなく、大邱駅です。大きな建物は全部が駅舎なのではなく、大部分がロッテ百貨店です。よくあるパターン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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ところで、駅前に降り立つところで、こんなの見つけました。何こ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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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迷うまでもなく、すぐそこの柱や壁面に答えが書いてあるんですけどね。これらは、大韓帝国・純宗皇帝の地方巡幸(1909)に関する展示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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詳しい解説はこちらにあります。

大韓帝国 純宗の地方巡幸 釜山 韓国

103년전 대구 방문 순종황제 열렬히 환영
4만여 지역민·학생 만세 외쳐
김영태기자 승인 201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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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달성공원에 중앙에 있는 두 그루의 향나무. 왼쪽은 순종황제가 오른쪽은 이토 히로부미가 대구를 방문한 기념으로 심었다. 당시 황제의 성산과 이토의 나이를 이유로 기념식수 향나무의 수령도 달리해서 심는 일제의 강압을 엿보는 듯하다.

1909년(융희3년) 1월7일 날씨는 맑았지만 일제강점기 강압에 못이기는 나라의 형편과 같이 겨울철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렸고 대한제국 순종황제는 이날 오전10시 서울에서 어전열차에 올랐다.

어전열차는 천안과 전의 등지를 지나 오전11시50분에 대전에 도착했고 오후 1시45분 추풍령을 거쳐 5시간30여분만인 3시24분에 대구역에 도착했다.

당시 만국기가 펄럭이는 대구역 광장에는 순종황제의 도착과 함께 21발의 연화(축포)가 터졌고 4만여명의 지역민들과 1천636명의 남녀 학생이 모여 대한제국기와 일장기를 손에 들고 건강을 기원하는 `성수(聖壽) 만세`를 부르며 황제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어 뚜껑이 없는 옥교라는 어가를 탄 황제는 기마병의 호위를 받으며 대구역에서 당시 관찰도청인 대구 행재소(경상감영)로 향했고 오후7시 달성관(현재 경북인쇄소)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행렬이 도열한 가운데 연합 환영회에 참석했다.

이곳에 여장을 푼 황제를 위해 대구시민들은 밤을 새워 제등행렬로 도성을 떠난 순종의 적적함을 달래주기도 했다. 이같은 제등행렬은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왕들이 도성에서 10리 이상은 벗어난 적이 없었음에도 매국노 이완용과 일제가 강압적으로 대구방문을 추진한 것은 일본으로 납치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지역민들이 판단하면서 황제를 지키려는 충정이 있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전언이다.

실제로 수창학교 30여명은 일제가 순종황제를 일본으로 납치한다는 강한 의구심을 품고 대구방문 다음날인 1월8일 황제가 청도로 향할때 철길에 누워 온몸으로 이를 막으려는 했던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어 순종황제는 대구 도착이후 청도와 마산을 5일간 방문한 뒤인 1909년 1월12일 마산에서 다시 대구역에 도착해 달성공원으로 향했고 정문에서 조금 위쪽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가이즈까 향나무 한그루씩 기념식수를 했다.

이 기념식수에서 일제는 당시 황제의 성산 33세인 것과 히로부미가 66세였던 것을 이유로 향나무 수령을 달리하는 웃지 못할 촌극까지 벌이는 횡포를 부렸다.

사진에서 보듯이 왼쪽이 순종황제가 심은 향나무로 나란히 자라고 있는 2그루의 크기가 약간 차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영태기자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67752

また、これらの展示についての記事もありました。設置されてからまだ1年も経ってないんですね。

ときに、この写真に写っている女性お二人、「市民」とありますけど、たまたま通りがかったところを記者が声掛けたんですか?モデルさんを用意したのではなく?*1

107년 전 순종이 대구 다녀간 길 따라가볼까?
‘롯데백 대구점 1층 광장 ‘순종황제 어가길’ 모형 설치 대구역 등 관광자원화 동참
201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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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역 광장을 찾은 시민들이 롯데백화점 대구점이 조성한 ‘순종황제 어가길’ 관련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롯데백화점 대구점이 1층 대구역 광장에 ‘순종황제 어가길’ 모형 전시물을 설치했다.

이는 대구시가 순종황제의 남순행을 기념해 대구역에서부터 달성공원까지 이어지는 지역을 역사적 관광 자원화하는 사업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는 1909년 1월7일 오후 3시25분 근대화된 교통기관인 기차를 타고 대구역에 도착해 대구시내를 비롯해 청도, 부산, 마산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일주일 후인 13일 오전 8시10분에 다시 대구역을 출발해 서울 남대문에 도착, 덕수궁으로 환어했다.

대구점은 총 5천여만원을 투자해 진열대와 액자, 동판 등을 포함해 대구역에 도착한 순종황제 궁정열차, 행재소까지 이동하는 노부식 행렬, 순종황제 어차 등 세 가지 전시물을 설치했다.

순종황제의 궁정열차는 모두 8량으로 기관차-환급차-1,2등-식당 1등-1,2등-옥차-화물차-3등으로 구분돼 있다.
이 중 옥차는 순종황제가 직접 탔던 칸이다.

특히 노부식 행렬은 임금의 임시 거처(행재소)이던 경상감영까지 이어진 것으로 경호문제를 제외하고 일본인들이 참여하지 않은 유일한 어가 행렬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롯데백화점 대구점 관계자는 “순종황제 남순행 관련 전시물 설치를 통해 대구역 일대를 역사적 관광자원화한 것은 크게 보면 샤롯데 광장 야경 명소화, 생태공원 조성 등과 같은 맥락으로 대구역 일대 환경을 개선해 주변 상권과의 상생 및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노력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다.

김혜성 기자

http://www.idaegu.com/?c=5&uid=337228

全体としては、こんな感じです。わりとよくできた模型だ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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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ここにあるのはこれだけですが、この展示も含めた純宗にまつわるツーリズムを大邱市は考えているみたいです。仮にも皇帝の足跡を辿るのに「ダークツーリズム」と言ってしまっていいのか?と思ったりもしたのですが、まあいいのでしょう。

대구 중구 '순종황제 어가길 조성사업' 구간
[뉴시스] 입력 2012.09.1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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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뉴시스】박광일 기자 = 대구 중구청은 19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가 1909년 전국 순행 당시 대구를 방문해 이동했던 대구역부터 달성공원까지 1632m 구간 '옛 순종황제 어가길'을 오는 2015년까지 사업비 70억원을 들여 '황제의 길'로 조성한다고 밝혔다. 사진의 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구간이 순종황제가 걸었던 '어가길'이다. (사진 = 대구 중구청 제공)

http://news.joins.com/article/9374603

日帝の侵奪史を忘れずにいよう」…韓国・大邱市、純宗御幸道を造成
2015年12月24日15時04分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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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宗皇帝の銅像鳥瞰図。大礼服姿の純宗が橋の上に立っている。(写真=大邱中区)

大韓帝国の最後の皇帝である純宗(1874~1926)は「悲運の皇帝」だ。即位直後の1907年、日本の強圧によって韓日新協約を締結する。これに伴い、日本人を韓国の官僚として任用できるようになり、法令制定などの権限を、事実上、統監に渡した。軍隊も解散した。1910年8月29日の韓日併合条約(庚戌国恥、韓国併合ニ関スル条約)で、結局は日本の植民地になった。皇帝は悲痛な毎日を送りながら昌徳宮(チャンドックン)でその生涯を閉じた。高宗(コジョン)と明成(ミョンソン)皇后の次男だ。

純宗を賛える銅像大邱(テグ)につくられる。大邱市中区(チュング)は22日、「純宗皇帝オガギル象徴造形物」のデザイン設計を終えたと明らかにした。オガギルとは国王などが通った御幸道のことだ。

実施設計を経て来年2月から製作に入り、4カ月後の6月に達城洞(タルソンドン)の達城公園入口に設置される予定だ。純宗の銅像がつくられるのは初めてのこと。

銅像は国家の重要な儀式の時に着用する大礼服姿の純宗皇帝がアーチ型の橋の上に立っている姿だ。銅像は高さ2.5メートルで、青銅製。ソウルの彫刻家ヤン・ジャンウォン氏(48)の作品だ。ヤン氏は「皇帝の権威をどうしたらうまく表せるか悩んでいたところ大礼服が思い浮かんだ」とし「橋の上に銅像を設置するのは『民の橋になりたい』という皇帝の気持ちが込められている」と説明した。

なぜ大邱に純宗の銅像がつくられることになったのか。純宗皇帝の訪問を記念しようとするものだが、単に純宗を追慕するだけがその趣旨ではない。日帝に侵奪された屈辱の歴史を再確認できるようにとの意味も込められている。暗い歴史から教訓を得ようとするダークツーリズム(Dark Tourism)の名所にしたい考えだ。

純宗皇帝が大邱を訪れたのは国を奪われる直前の1909年だ。同年1月7日、民政視察のために統監だった伊藤博文とともに大邱を訪問した。民の暮らしを確認するという純粋な趣旨の行事ではなかった。1905年乙巳勒約(第二次日韓協約)、1907年国債補償運動に続いて軍隊を解散したことで民心が荒れると日帝がこれを鎮めるために純宗皇帝を前に出した。

国王の乗った御輿の「オガ」が通り過ぎたところは大邱(テグ)駅~北城路(プクソンノ)~寿昌洞(スチャンドン)~達城公園だった。当時慶尚北道キョンサンブクト)観察使だった朴重陽(パク・チュンヤン)はオガの通り道に銀色の砂を敷いてその上を布で覆った。達城公園の進入路を拡張し、冬季の枯れた木には造花をつけて春のようにした。

中区はこのうち北城路から達城公園までの1キロをオガギルとして整備している。中区はこのオガギルを「救国の道」と名付けて「大邱の近代路地ツアー」コースとして活用する方針だ。ユン・スンヨン区庁長は「近代史を学べるよい教育の場になると信じている」と話した。

http://japanese.joins.com/article/023/210023.html

“일제 침탈 역사 잊지 말자” … 북성로에 ‘순종 어가길’ 조성
[중앙일보] 입력 2015.12.23 02:17 수정 2015.12.23 02:36 | 종합 15면
홍권삼 기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방문했던 길
달성공원까지 1㎞에 벽화 등 마련
대례복 차림 동상 국내 최초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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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 동상 조감도. 대례복 차림의 순종이 끊어진 다리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 대구 중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874∼1926)은 ‘비운의 황제’다. 즉위 직후인 1907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한·일신협약을 체결한다. 이에 따라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용할 수 있게 됐고 법령 제정 등의 권한을 사실상 통감에게 넘겼다. 군대도 해산됐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경술국치)으로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황제는 비통한 나날을 보내다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이다.

 그를 기리는 동상이 대구에 세워진다. 대구 중구는 22일 순종 모습을 담은 ‘순종 황제 어가길 상징 조형물’의 디자인 설계를 마쳤다고 밝혔다. 실시설계를 거쳐 내년 2월 제작에 들어가 4개월 뒤인 내년 6월 달성동 달성공원 입구에 설치할 계획이다. 순종의 동상이 세워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동상은 국가의 중요한 의식 때 입는 대례복 차림의 순종 황제가 끊어진 아치형 다리에 서 있는 모습이다. 높이 2.5m에 청동으로 만들어진다. 서울의 조각가 양장원(48)씨 작품이다. 양씨는 “황제의 권위를 나타낼 방안을 고민하다 대례복 차림을 떠올렸다”며 “다리 위에 동상을 설치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다리가 돼주고 싶었을 황제의 마음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왜 대구에 그의 동상이 세워질까. 순종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를 추모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다. 일제에 침탈당한 굴욕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게 하자는 의미다. 어두운 역사에서 교훈을 깨닫게 하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명소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순종 황제가 대구를 찾은 것은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인 1909년이다. 그해 1월 7일 민정 시찰을 위해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구를 방문했다. 백성의 삶을 돌아보는 순수한 취지의 행사는 아니었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이어 군대가 해산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제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순종 황제를 내세웠다.

 어가(임금의 수레)가 지나는 길은 대구역∼북성로∼수창동∼달성공원이었다. 당시 경상북도 관찰사였던 박중양은 어가 통과길에 은빛 모래를 깔고 그 위를 천으로 덮었다. 달성공원 진입로를 확장했고 겨울철 마른 나무에는 조화를 달아 봄처럼 꾸몄다.

 중구는 이 중 북성로에서 달성공원까지 1㎞를 어가길로 꾸미고 있다. 중구는 이 길을 ‘구국의 길’로 이름짓고 ‘대구 근대골목투어’ 코스로 활용할 방침이다. 윤순영 중구청장은 “근대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교육장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홍권삼 기자

http://news.joins.com/article/19292631

*1:本文中に挙げた記事は大邱日報のものですけど、NEWSISも同じ写真を(クレジット表記を入れて)使ってますねえ。→ 롯데百 대구점, ‘순종황제 어가길’ 전시물 설치

東京に住みたいと思ったことはない。

それは、二十三区内であれ郊外であれ多摩であれ、です。

「住まざるを得ないことがあ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のを完全に排除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が、積極的に「住みたい」と思ったことは一瞬たりともないなあ。天地神明に誓って。

まして、この家賃相場見て「賃貸で」なんて…。ないわーありえんわーたまらんわ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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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元民はともかくとして、なんで住みたいのん?

ま、とりあえず、この朝日新聞の記事は、「東京Deep案内」のこの記事との併読をお勧めしますよ。

tokyodeep.info

賃貸で住みたい駅、赤羽が急浮上 吉祥寺は魅力低下か
有吉由香 2017年2月2日01時13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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賃貸で人気の首都圏の駅と賃貸相場

 首都圏で賃貸で住みたい駅は目黒、荻窪、武蔵小杉の順で人気が高く、ランキング上位の常連だった吉祥寺は2年連続で11位以下に転落……。不動産情報を扱うオウチーノ総研が、オウチーノの賃貸サイトへの2016年のアクセス数を基にランキングを発表した。

 ランキングを始めた12年の首位は吉祥寺で13~14年も2位だったが、15年からトップ10圏外に転落。代わって14年に圏外からトップに躍り出たのが目黒で、15年も2位につけた。

 同総研によると、目黒はJR山手線など4路線が乗り入れる交通利便性の高さに加え、駅前の大規模再開発事業が今年中に完成予定。家賃相場はシングル向け(1R~1LDK)で16万8千円、ファミリー(2K~3LDK)で30万2千円と高めだが、美術館や公園、目黒川などの自然も豊かで、落ち着いた雰囲気も備えているのが魅力だ。

 一方、15年から4位に急浮上したのが赤羽。清水菜保子・主任研究員は「家賃が手頃なのに加え、漫画やドラマの影響もあるのではないか」と言う。15年には漫画家・清野とおるのコミックが原作のドキュメンタリードラマ「山田孝之東京都北区赤羽」が深夜に放映され、ディープな赤羽の様子が改めて注目された。

 “吉祥寺離れ”を描いている漫画「吉祥寺だけが住みたい街ですか?」(マキヒロチ作)も昨年ドラマ化された。不動産業を営む双子の姉妹が、吉祥寺の物件を探す客に対してほかの街の魅力的な物件を紹介していくストーリー。コミックでは6位の恵比寿、10位の中野、赤羽の隣駅の十条も紹介されている。

 清水さんは「吉祥寺は駅前が発展しすぎて、駅近の物件が少なく、休日の混雑などからも住む街としては魅力が下がったのでは。通勤の利便性なども含め、幅広い選択肢の中から自分に合った街を選ぶようになっているようだ」と分析している。(有吉由香)

◆人気の沿線ランキン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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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JR京浜東北線
10 JR総武線

http://www.asahi.com/articles/ASK1L4TP3K1LUTIL01X.html

うむ、やはり阪急沿線こそ至高(異論は認めるが受け入れない)。

www.youtube.com
www.youtube.com

「陸軍特別志願兵・李仁錫上等兵」の話

たまたま気になって調べてみた調べ物の記録として。

目にした順番に並べておきます。

d.hatena.ne.jp

【その時の今日】日本「特別志願兵」を口実に学徒出陣させる
2010年01月20日13時10分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f:id:bluetears_osaka:20100120133819j:plain:left 1941年12月の真珠湾攻撃以降、日本帝国は破竹の勢いで東南アジア全域を手にしたが、半年ぶりの翌年6月、ミッドウェー海戦(日本側作戦名「M作戦」)をターニングポイントに破滅の道を歩みはじめた。

B29爆撃機が帝都・東京の空を襲いはじめ、米軍は日本本土に向かい戦線を狭めてきた。「賢者は宗教的信仰を守るため、神様と教祖に献身するが、我々凡夫が身を捧げるのは国のためである。今日置かれている国家の危急というときは、もはや国と自己は同体だ」。

「大東亜共栄」という名分とは異なり、明白な侵略戦争の「アジア・太平洋戦争(1931~45)」が終末へ向かっていた1943年5月。京都帝国大学の哲学教授、田辺元は「死生」という演説で、生き方ではなく死に方を語ることにより、大学生を死地に追いやった。そのとき、日本の共産主義者すらほぼ全員が転向し、戦争に協力した。

同年10月20日。窮地に追い込まれた日本は「陸軍・特別志願兵の臨時採用規則」を発布し、植民地・朝鮮(チョソン 1392~1910)の専門学校・大学の在学生や卒業者まで戦線に追い出した。各媒体を総動員して学徒兵の志願を宣伝することに必死になった。

「同じ国の同じ国民として、内地人(日本人)だけ第一線で血まみれになって活躍している。、我々半島の人も学窓で勉強ばかりしてはいられない」「李仁錫(イ・インソク)上等兵が私のように死ななかったら、今ごろ無名の農夫にしかなれなかったはずだ。無名の農夫か、勲章をいただくため一躍世の中に名を馳せた護国英霊のうち、どちらがいいだろうか」

1943年11月15日付の総督府の機関紙「毎日新報」に掲載された「学徒出陣激励・母親の座談会」で、日本と朝鮮の母親が交わした座談は、当時の実像を伝えている。

学徒兵は、志願兵という美名とは裏腹に、実像は対象者の100%志願を目ざし、各種の宣伝による懐柔や警察を前面に出した脅威を通じて強制的に動員された。朝鮮の専門大学(短大)の在学生1000人のうち959人、日本と満州の留学生2929人のうち2150人、それぞれ96%と77%に上る志願率がその強制性を雄弁する。

「あなたたちが血を流した後も、日本が韓民族に良いものを与えなくても私が血を流し戦うだろう」(李光洙「私の告白」、1942)。この地の青年に侵略戦争に加わるよう訴えた者はナショナリストだけではなかった。1943年の「京城日報」に「半島の2500万人に上る同胞に訴える」という文を掲載し、学徒兵の参加を勧めた独立運動家・呂運亨(ヨ・ウンヒョン)や小説家・李光洙(イ・グァンス)を攻撃した金明植(キム・ミョンシク)のような社会主義者らもその隊列に入っていた。民族の指導者や民衆、誰も時代の狂気から自由になれなかった時であった。

慶煕(キョンヒ)大学部大学長・許東賢(ホ・ドンヒョン、韓国近現代史

http://japanese.joins.com/article/342/125342.html

[그때 오늘] 일제, ‘특별지원병’ 구실로 대학생들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
[중앙일보] 입력 2010.01.20 02:13 수정 2010.01.20 15:29 | 종합 33면

f:id:bluetears_osaka:20170201145634j:plain
1944년 1월 20일은 육군성 영(令) 제48호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에 의해 이 땅의 청년학도들이 학병으로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된 날이다. 사진은 학병 출정식 장면을 담고 있다(『한일병합사:사진으로 보는 굴욕과 저항의 근대사』, 눈빛).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제국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 전역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반년 만인 이듬해 6월 미드웨이해전을 전환점으로 파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B-29 폭격기가 제도(帝都) 도쿄의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고, 미군은 일본 본토를 향해 전선을 좁혀 왔다. “현자는 종교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과 교조를 위해 헌신하겠지만, 우리들 범부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한다. 오늘 국가 위급의 시기에 이미 국가와 나 자신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대동아공영’이란 명분과 달리 명백한 침략전쟁인 ‘아시아·태평양전쟁(1931~45)’이 종말을 향해 치닫던 1943년 5월. 교토제국대학 철학교수 다나베 하지메(田邊元)는 ‘사생(死生)’이란 제하의 연설에서 어떻게 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이야기함으로써 교토대학생들을 사지(死地)로 떠밀었다. 그때 일본의 공산주의자들조차 거의 모두 전향해 전쟁에 협력했다.

같은 해 10월 20일. 막바지에 몰린 일제는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발포해 식민지 조선의 전문학교나 대학교 재학생과 졸업자들까지 전선으로 내몰았다. 각종 매체를 총동원해 학병 지원을 선전하는 데 혈안이 됐다. “같은 나라의 같은 국민으로서 내지(일본)인만 제일선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활약하고 있는 것을 돌아볼 때 우리 반도인도 학창에서 공부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인석 상등병이 저처럼 죽지 않았으면 지금쯤이야 이름 없는 농부밖에 더 되었겠습니까? 그래 무명의 농부와 훈장을 받자옵고 일약 세상에 이름을 떨친 호국영령 어느 것이 좋겠습니까?”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 1943년 11월 15일자에 실린 ‘학도출진격려 어머니좌담회’에서 일본과 조선의 어머니가 나눈 좌담은 당시의 실상을 잘 전해 준다.

학병은 ‘지원병’이란 미명과는 달리 실상은 대상자 100% 지원을 목표로 각종 선전을 통한 회유와 경찰을 앞세운 위협을 통해 강제로 동원됐다. 조선 내 전문대학 재학생 1000명 중 959명, 일본과 만주 유학생 2929명 중 2150명, 각각 96%와 77%에 달하는 지원율이 그 강제성을 웅변한다. “그대들이 피를 흘린 뒤에도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것을 아니 주거든, 내가 내 피를 흘려 싸우마(이광수 ‘나의 고백’, 1942).” 이 땅의 청년들에게 침략전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 이는 민족주의자만이 아니었다. 1943년 ‘경성일보’에 ‘반도 2500만 동포에게 호소함’이란 격문을 실어 학병 참여를 권한 여운형이나 이광수를 공격하던 김명식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다. 민족 지도자나 민초 어느 누구도 시대의 광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그때였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http://news.joins.com/article/3975902

이인석 (군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발굴 옥천현대사 - "형님이 이용당한 것...''
일제에 의해 영웅으로 미화된 이인석 상병의 가족이 겪은 아픈 역사
이안재 기자
[691호] 승인 2003.09.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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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석 상병이 군복을 입은 모습. 매일신보 옥천지국이 64년전인 1939년 부인 유서분씨에게 기증한 것이다.

군서면 하동리 새터에서 태어난 이인석 상병은 일제에 의해 영웅으로 떠받들어진 사람이다. 1938년 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이후 중일전쟁에 동원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전사(1939년 6월22일이라고 신문 보도)했다며 일제가 영웅만들기에 나서 당시 사람들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인석 상병은 당시 일제가 준 금치훈장과 공로훈장 등 많은 훈장도 받았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 모든 신문에 큼지막하게 보도됐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는 이인석 상병이 동원되었던 지역이 나오지 않지만 매일신보는 중국 산서전투였다고 구체적인 지명까지 보도했다. 그리고 지원병 군복을 입은 이인석 상병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 한 장 가지고 있지"라며 옥천읍 삼양리에 살고 있는 이인석 상병의 부인 유서분(87)씨는 예의 사진을 내놓았다. 반듯한 얼굴에 잘생긴 외모다. 유씨는 이인석 상병과 18살 때 결혼했다. 이인석 상병은 19살. 남동생 셋, 여동생 넷 등 여덟 명의 자녀 중 맏이였다.

동생들은 공부를 못시켰지만 이인석 상병은 지금은 없어진 옥천농업실습학교(이인석 상병의 동생 이종두씨는 실습학교가 옥천읍 삼청리 지금의 은성산업이 있던 자리에 있었다고 증언한다)에 다녔다. 결혼 후에 다닌 학교였고 졸업 후에는 실습학교에서 강사 자리를 얻었다.

현재 군서면 증산리에 살고 있는 첫 딸을 낳은 후 덜컥 지원병으로 나간다고 했다. "학교 선생(동생 이종두씨는 강사라고 기억했고 부인 유씨는 선생이라고 기억했다)으로 갔는데 교장이 꼬셔서 지원병으로 갔던 거야. 말하자면 전장에 나가자마자 전사한 거지." 아흔에 가까운 나이지만 그때 일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하면서 학교 관사에 나와 있다가 지원병 나가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살았지. 하루는 일하고 고단해서 잠이 들었는데 누가 불러. 시아버님이 나갔는데 군청에서 왔나, 어디에서 사람이 와서 `이인석이 운명했다'라며 울면서 종이조각을 읽고 한참을 강연을 해. 잠자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울어보지도 못했어. 사람이 세상을 그렇게 살다 말고 갔어."

그때부터 3년이 넘게 군서면 하동리 이인석 상병의 집은 옥천 뿐 아니라 전국에서 온 순례객들로 넘쳐났다.

"어디서든 안온 데가 없었어. 선생들이 학생들 데리고 왔고, 그때는 사람은 죽었어도 이름은 안 잊어버리고 찾아온다 싶었어." 부인 유씨는 그래도 시어머니가 천지사방을 다니며 천 사람으로부터 한 뜸씩 뜬 일명 `천인침'을 남편에게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고생해 가면서 전쟁터에서 잘 있게 해달라고 천인침을 완성했는데 끝내 보내지 못한 채 전사통지서를 받았더란다. 남편이 전사함에 따라 둘째 동생의 장남을 양자로 들였다. 유씨가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이가 양자로 들인 아들이다.

동생 이종두(79)씨의 기억은 좀더 구체적이었다. 이씨는 당시 지원병으로 간 사람이 충북에서 7명, 그중 3명이 형을 포함한 옥천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강제로 지원시킨 거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뭘. 해방되고 나서 청주 반민특위(친일행위자나 친일부역자 등을 처벌하기 위해 해방후 구성한 특별기구)에서 우리를 불렀어. 조사관들이 조사해보더니 미안하다고, 옥천갈 차비는 있느냐고 묻데. 우리가 형님 덕분에 큰 부자나 됐고 하면 반민으로 몰렸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잖아."

형님이 전사한 뒤 이들 가족들은 일제 강점기 동안 전국에서 온 부의금 등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만주좁쌀을 팔아 순례한다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점심이라도 줄 수 있었다.

"형님 전사한 뒤 처음에는 월전리에 묘소가 있었어요. 그후에 고향 뒷산을 내가 사서 모시게 된 거지. 일본놈들이 더 열심이었어. 영웅이라 순례해야 한다고. 어머니는 형님 전사하고 6개월을 찬물만 마시고 살았는걸."

이씨는 고향인 하동리 새터와 가까운 이웃 상중리 신대마을에 살고 있지만 옛 집터는 잘 가지 않는다.행랑채는 이미 허물어졌고 페허가 되어 있는 집을 보기에도 그렇거니와 형제들이 오르내리며 감을 따먹던 집 울타리의 감나무 두 그루가 당시의 기억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일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그 자신 기구한 삶을 살아온 이씨는 지금 `혈액순환부전증'이라는 병을 얻어 3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참전자에게 주어지는 6만여원의 연금과 노인연금, 국민기초생활수급자에게 주어지는 10여만원 등 20만원이 채 되지 않는 돈으로 한 달을 살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이인석 상병이 남기고 간 일가족의 상흔을 느낄 수 있다.

이인석 묘, 아직도 일제때 세운 상석이 여전히
일본연호·일제 공훈등급 그대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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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지원병 최초 전사자 이인석 상병의 묘에는 아직 일제때 세운 상석이 그대로 있다. 상석에는 〈훈8등공7급 고 육군상등병 이인석지묘-소화 19년 7월7일(勳八等功七級 故 陸軍上等兵 李仁錫之墓-昭和 十九年 七月七日)〉로 표기되어 있다.

공훈 등급이 8등과 7급이라는 말은 일제의 기준으로 이인석 상병의 공훈을 설정해 부여한 것이다. 일제가 연호로 썼던 소화 19년이면 1944년이다. 이인석 상병이 전사한 뒤 5년이 지난 해이다.

문제는 일제에 의해 수여된 공훈등급이 표기된 상석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상석을 세운 시기를 나타낸 일본 연호 역시 마찬가지로 일제의 잔재이다.

이인석 상병은 일제의 영웅, 또는 친일파가 아닌 최대의 피해자였다. 상석을 없애지는 않더라도 당시 상황을 설명할 비석을 세우거나 하는 방법으로 비록 지하에서나마 한스러웠을 일제 지원병 굴레를 벗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영웅만들기에 골몰했던 군수 등 일제 앞잡이들이 만들어놓은 이인석 상병의 상석에 아직도 드리우고 있는 일제의 망령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인석 전사, 반도인 영예로 미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물론 조선·동아도 `지원병의 꽃'으로 찬양

■ 「지원병 이인석군/ 최초로 영예의 전사/ 적진 중으로 돌입 분투」-조선일보
■ 「지원병 최초의 꽃/ 옥천출신 일등병 이인석군 전사!/ 조선인지원병의 영예」-동아일보
■ 「반도인의 영예/ 지원병 최초의 전사/ 충북 옥천출신의 이인석군」-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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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석 상병의 전사 사실을 미화해 보도했던 동아, 매일신보, 조선일보.(오른쪽부터)

위 기사는 1939년 7월8일 국내에서 발행된 각 신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대륙 침략을 시작한 이후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광분한다.

1930년대 이후 조선을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의 구실을 강제해 인력과 물자를 전쟁터로 내몰았고 `내선일체', `일선융합' 등 조선인과 일본인은 하나라는 구호로 민족말살과 황민화정책을 강행했다.

1937년부터는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강요했고 1938년에는 학교의 조선어과를 폐지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으며 `육군지원병제도'를 실시했다. 1939년에는 창씨개명제도를 실시해 조선인의 성명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 기간, 언론은 물론 문인과 음악가, 미술인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친일 지식인들이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강연을 다녔고 일제는 이를 활용해 `영웅만들기'에 나섰다.

그 하나의 예가 이인석 상병의 사례이다. 이인석 상병이 1939년 중일전쟁 과정에서 조선인 지원병 가운데 첫 전사자라는 점을 일제는 놓치지 않았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물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이르기까지 언론은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이들 세 신문은 모두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을 4단 기사로 처리했다.

조선이나 동아일보의 보도보다는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이 더 구체적이다. 이인석 상병의 전사 소식을 미화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쓴 흔적이 바로 신문 기사이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이인석 상병의 죽음은 일제 통치를 합리화하고 전쟁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쓰여진 것이다.

http://www.ok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592

m.blog.daum.net

www.ohmynews.com

http://iss.ndl.go.jp/books/R100000002-I0000006912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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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の上の初めての15回目

今日みたいなネタは、

比較的うまく捌けるんですけどねえ。

得手不得手が露骨に出るようでは、

まだまだです。

ようやくこなれてきたところなんですけど、

そろそろ終わりにしないといけません。

名残惜しさは、正直あります。


半年振り5年目の16回目

どぉなんやろう、ちょっと難しかったんかな。

答えはそこにあるものばかりやし、

ちゃんと道筋はつけといたんやけど。

事あるごとに読み聞かせたのを聞いてなかったら、

なかなか大変やったかもね。

ま、あとはやっときます。

ああ、そうそう。

出待ちでラブレター渡されても、

浮かれてブレたりはしませんよ。

残念ながら、そこは冷たい人間です。

日韓間(Jリーグ⇔Kリーグ)の移籍現況:高萩洋次郎・安田理大・イボムヨン・クォンスンテ

順不同ですが。

ここのところFCソウルで主力級の働きをしていた高萩洋次郎FC東京への移籍。ACL目線で言えば「格落ち」感があるように思うんですけど、FC東京や名古屋にいたハデソンのFCソウル復帰との絡みもありそうです。

FCソウルの高萩洋次郎 - 大塚愛と死の哲学

だとすれば、必ずしも本人の意向が100%反映された移籍では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これはこれでまた新たなチャレンジになるでしょう。ガンバ大阪戦以外での活躍を期待しています。

高萩のFC東京移籍が決定。3年ぶりJ復帰で「FC東京がタイトルを獲れるように」
2017年01月25日(Wed)16時10分配信
photo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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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萩洋次郎Jリーグに復帰【写真:Getty Images】

 FC東京は25日、日本代表MF高萩洋次郎の加入を発表した。FCソウルからの完全移籍となる。

 サンフレッチェ広島ユース時代の2003年に同クラブの2種登録選手としてトップチーム昇格を果たすと、16歳8ヶ月3日でJリーグ最年少出場記録(当時)を樹立。愛媛FCへのレンタル期間を含め、広島を退団する2014年末まででJリーグ通算270試合に出場した。

 2015年1月にオーストラリア1部のウェスタンシドニー・ワンダラーズへ移籍し、半年後に韓国のFCソウルへ加入。昨年は主力としてリーグ戦32試合に出場し、FCソウルKリーグ・クラシック(韓国1部)優勝に大きく貢献した。

 高萩はFC東京加入にあたり「このたびFCソウルから加入しました高萩洋次郎です。FC東京の一員になることができて、嬉しく思っています。FC東京がタイトルを獲れるように全力でプレーしたいと思います。ファン・サポーターのみなさん、応援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とコメントしている。

 新シーズンに向けてGK林彰洋をはじめ、太田宏介大久保嘉人永井謙佑といった日本代表クラスの選手を多数獲得したFC東京。高萩は司令塔として豪華な攻撃陣を操り、クラブをタイトル獲得へ導くような活躍が期待される。

【了】

https://www.footballchannel.jp/2017/01/25/post195261/

で、逆に韓国への移籍が決まったという安田理大Kリーグチャレンジ釜山アイパークですか。Kリーグの中でも屈指の古豪が2シーズン目の2部を戦う中に飛び込んでいくという形になります。Jリーグで例えるならば、まさに今の名古屋グランパスのような立ち位置の釜山。たぶんそこに骨を埋めるような覚悟での移籍ではないでしょう。短期の契約になるはずです。

2部だから楽に活躍できるというわけではない、というのは、日韓ともに変わりません。ですが、ここで目立ったものを見せられれば、元ガンバ大阪の元日本代表選手がもう一花咲かせるきっかけになるかもしれません。

安田理大の名前で過去記事を検索したら出てきたこの記事の試合。スタメンが誰も残っていないという…これも時代の流れか。)

【ACL・水原三星戦】未来のガンバに光を見た勝利 - 大塚愛と死の哲学

元日本代表DF安田、韓国2部・釜山移籍 昨季限りで名古屋退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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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2部リーグの釜山に移籍することが決定的となった元日本代表DF安田 Photo By スポニチ

 昨季限りで名古屋を退団したDF安田理大(29)が韓国2部リーグの釜山に移籍することが28日、決定的となった。契約の細部を残す段階になっており、近日中にも正式発表される。

 釜山はKリーグを4度制覇し、元韓国代表FW安貞桓アン・ジョンファン)や、広島、C大阪などで活躍したMF盧廷潤ノ・ジュンユン)らもプレーした名門。15年に2部に降格し昨季は5位。3年ぶりの昇格を目指し、経験豊富なサイドバック獲得を目指していた。

 06年にG大阪でプロキャリアをスタートさせた安田にとっては7クラブ目。海外は11〜13年まで所属したフィテッセ(オランダ)以来4年ぶりの挑戦となる。昨オフにはC大阪も獲得に動くも破談になっていた。
[ 2017年1月29日 05:30 ]

http://www.sponichi.co.jp/soccer/news/2017/01/29/kiji/20170128s00002000350000c.html

で、釜山アイパークと言えば、昨シーズンアビスパ福岡にいたGKイボムヨンの元所属クラブだったわけですけど、彼はKリーグクラシックに昇格を決めた江原FCに移籍を決めています。江原FCと言えば、ガンバ大阪のオジェソクの元所属クラブ。しばらく2部生活が続いていましたが、ようやく1部昇格ですね。元五輪代表であるイボムヨン、個人的には日韓で1部リーグ所属を継続できている形になります。

韓国五輪代表DFのガンバ大阪移籍 - 大塚愛と死の哲学
アビスパ福岡に行くイボムヨン、全北現代に行くキムボギョン - 大塚愛と死の哲学

2016.12.28 16:24
福岡、GK李範永が韓国・江原へ移籍

 来季J2の福岡は28日、GK李範永(27)が韓国の江原へ移籍することが決まったと発表した。

 また、J1のG大阪からDF岩下敬輔(30)が加入する。

http://www.sanspo.com/soccer/news/20161228/jle16122816240010-n1.html

とはいえ、Jリーグを見ていればわかるように、いま韓国代表のGKは激戦区なので、さらに上を目指すのであれば、いるところで結果を出し続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代表級のGKが軒並み日本に来ている中、Kリーグでイボムヨンがどんな風に評価されていくか、地味ですが今シーズンの注目ポイントの一つです。

2017/01/28 12:15:33
鹿島が全北現代から韓国代表GKを獲得。3年連続リーグベストイレブンの守護神が、曽ヶ端とポジション争い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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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屈指のGKが鹿島に加入!(C) J.LEAGUE PHOTOS

1月28日、鹿島アントラーズは、全北現代モータース(韓国)よりクォン・スンテ(權純泰/32歳)が完全移籍で加入すると発表した。ポジションはGKで、184センチ、85キロ。

クォン・スンテは2014年から3年連続でKリーグベストイレブンを受賞。昨シーズンは全北現代ACL優勝に貢献した。なお、韓国代表として2試合出場している。

鹿島では長年にわたり、曽ヶ端準(37)がゴールマウスを守っているが、韓国屈指のGKと熾烈なポジション争いを繰り広げることになりそうだ。

http://www.goal.com/jp/news/127/j%E3%83%AA%E3%83%BC%E3%82%B0/2017/01/28/32034012/%E9%9F%93%E5%9B%BD%E4%BB%A3%E8%A1%A8gk%E3%82%AF%E3%82%A9%E3%83%B3%E3%82%B9%E3%83%B3%E3%83%86%E3%81%8C%E9%B9%BF%E5%B3%B6%E3%81%AB%E5%AE%8C%E5%85%A8%E7%A7%BB%E7%B1%8D3%E5%B9%B4%E9%80%A3%E7%B6%9Ak%E3%83%AA%E3%83%BC%E3%82%B0%E3%83%99%E3%82%B9%E3%83%88%E3%82%A4%E3%83%AC%E3%83%96%E3%83%B3%E3%81%AE%E5%AE%88%E8%AD%B7%E7%A5%9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