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安所管理人の日記:韓国現代語訳出版

韓国では出版されたようです。朝鮮日報がスクープした安秉直さんの研究を無視して高麗大の記者会見の記事を配信していた聯合ニュースも、この新刊については記事にしています。

<신간>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번역·해제

일제강점기에 미얀마와 싱가포르에서 2년 5개월 동안 일본군 위안소의 관리자로 일했던 조선인의 일기. 당시 일본 군부가 조선인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위안소 운영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다.

일기의 원본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타임캡슐'이라는 개인 박물관 운영자가 10여 년 전 경주에서 우연히 발견한 고문서다. 그는 이 문서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제공했고,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주도하는 낙성대 경제연구소 팀이 현대어로 번역하고 해제와 함께 출간했다.

이숲. 424쪽. 2만5천원.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3/08/13/0901000000AKR20130813190700005.HTML

とりあえず今のところ、「ヘラルド経済」と「オーマイニュース」のサイト上に紹介記事が見えます。前者は日記の記述内容について、後者はこの資料の意義について、かなり詳細に言及しています。

内容とは別の面で下世話なことを言えば、市民メディア色の強い「オーマイニュース」の名前のもとに安秉直さんの研究を取り上げられていることの意義は、小さくないかもしれませんね*1

<새책>일본 제4위안단의 실체를 보여준 위안소 관리인 일기
기사입력 2013-08-16 08:25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무라야마 씨가 경영하는 위안소 이치후지루가 병참 관리로 되어 무라야마 씨와 아라이 씨는 병참사령부에 갔다 왔다.”(1943년 7월 20일)

“인센의 위안소 2곳이 병참 관리로 넘어간 뒤, 위안부 검미도 병참의 군의가 하기로 되어 일요일마다 김천관에서 수검하게 되었다.”(1943년 7월 26일)

일본 군부가 조선인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동원했다는 사실을 담은 첫 물적 기록인 일본군 위안소의 관리자, 조선인 박 씨의 일기가 단행본으로 나왔다.

안병직 교수가 발굴해 해제를 붙인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 일기’(이숲 펴냄)는 박 씨가 버마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위안소의 관리자로 일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개인 일기로, 특히 제4위안단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제4위안단은 일본이 1942년 5월 초 의뢰인을 경성에 파견, 군 사령부의 협조를 얻어 위안소 업자에게 모집을 의뢰해 이뤄졌다.

1943년 1월 1일부터 1944년 12월 31일까지 진행되는 이 일기는 위안소 경영이나 위안부 문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게 아닌 생활일기이지만 위안소 상황에 대한 정보가 지속적으로 등장해 전시 위안소의 성격과 운영 실태를 파악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다.

필자가 처남 등과 버마 아캬브시에서 위안소를 경영할 1943년 연초에는 부대에 위안부 수입보고서를 제출하긴 해도 군 소속으로 직접 관리를 받진 않았다. 그러다 43년 중반께부터 병참 관리로 바뀌면서 체계가 바뀐다. 병참사령부에 영업일보를 제출하고 필요한 콘돔 등을 배급받았다. 위안부 위생검사와 방공교육도 수시로 받았다.

일기에는 버마 위안소에서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생활을 하려고 나간 이를 병참이 다시 위안부로 불러들이도록 명령했다는 얘기, 임신 7개월의 위안부가 유산한 얘기 등이 담담하게 실려 있다. 필자는 위안부조합회의에 참석해 조합비로 경영자 30엔, 위안부 한 사람당 2엔, 합 62엔을 지급했다고 썼다. 위안부 15명을 데리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손님은 점점 줄어 수입이 갈수록 줄었다. 필자는 관리인으로 있던 위안소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자 싱가포르로 이주하기로 한다.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군용열차를 타고 병참 숙사를 전전하며 이름 모를 강들을 달려 태국을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한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싱가포르로 이주한 뒤 필자는 택시부의 사무를 맡아 하다가 다시 싱가포르 키쿠수이 클럽에서 쵸우바 일을 다시 시작한다. 타국에서 남녀가 들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농촌생활을 그리워하거나 음력 십오야 만월을 보고 언제 고향의 하늘에서 달을 볼 수 있을까 감상에 젖는가 하면, 방향 없는 삶에 대한 막막함을 드러낸 대목도 있다.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투영화로 알려진 ‘망루의 결사대’, 육군 장교의 미망인을 향한 헌신을 다룬 군영화 ‘무호우마츠의 일생’ 등의 영화 관람, 흥남 복권 8등(50엔)에 당첨된 이야기 등 여가생활도 엿볼 수 있다.

식민지의 지식인그룹에 말단으로나마 있던 필자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은 당시 조선 지식인의 풍경이라 해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필자는 1943년 벽두에 쓴 일기에서 “대동아성전 2주년인 1943년 신춘을 맞이하여 1억 민초는 엎드려 삼가 폐하의 만수무강하심과 황실의 더욱 번영하심을 봉축하는 바이다”며 동쪽을 향해 절한다. 또 8월 1일 버마 독립선언일에는 “일본-버마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영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금후 영원히 우리나라를 맹주로 버마국의 융성함을 축하한다”고 썼다.

이 외에 필리핀의 독립과 인도 가정부 수립, 신생 말레이 2주년 기념일 등 당시 격변기 동남아 정세, 전황에 대한 기록도 짧은 일기에 간간이 등장한다.

박 씨의 일기는 기록의 힘을 역시 보여준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평균 다섯 줄 정도 써내려간 반복적인 일상의 기록이지만 그 반복의 일상이 어떻게 바뀌고 깨지는지 전체적인 흐름에서 읽을 수 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적지 않다. 다만 1942년의 일기가 분실돼 조선에서 위안부를 어떻게 모집하고 버마에 배치했는지 알 수 없는 게 안타깝다.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30816000024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한반도 이슈 2013/08/14 09:50 김 혁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버마와 싱가포르에서 2년 5개월 동안 일본군 위안소의 관리자[帳場]로 일했던 조선인의 일기다. 당시 일본 군부가 조선인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위안소 운영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하는 자료다.

일본 군부는 위안소 정책을 운용하면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처음부터 자료의 생산과 공개를 극단적으로 억제했다. 또 위안소 운영에 관계했던 사람들도 관련 기록을 남길 수 없었기에 지금까지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은 신문·잡지 등에 게재된 2차 자료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구술 증언에 의지했을 뿐, 객관적 증거로서 1차 자료를 제시할 수 없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조사·발표한 『종군위안부 관계자료 집성』에도 조선총독부의 자료는 통째로 빠져 있어 일본의 극우 세력은 ‘물적 증거’가 없다는 구실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자료의 발간으로 이제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부가 조선인 위안부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성노예로 삼고, 이들을 철저히 관리·통제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이 됐다.

필자가 버마와 싱가포르에 체류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이 일기에는 위안소 경영에 관한 다양한 정보가 나온다. 단지 이것은 필자 개인의 생활에 관한 기록이어서 정보가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또한 1942년의 일기가 분실돼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하고 버마에서 배치하는 과정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하지만 이 일기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협력했던 필자가 해방 이전에 남긴 개인 기록이다. 그리고 1990년대 초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으로 부각하기 이전의 자료여서 필자가 여론의 영향과 무관하게 남긴 솔직한 기록인 만큼 오히려 왜곡 없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제4차 위안단

일본은 1942년 5월 초 제4차 위안단을 동원하기 위해 의뢰인을 경성에 파견했다. 일본의 위안부 동원은 의뢰인을 파견하고 군사령부의 협조를 요청해 위안소 업자에게 모집을 의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경성에 파견됐던 의뢰인이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조선군사령부에 협조를 요청한 이유는 태평양전쟁 이후 위안부 동원 업무가 육군성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위안소 업자들은 전차금(前借金)을 미끼로 자행한 인신매매와 더불어 ‘유괴나 다름없는’ 사기 수법을 동원해 조선 여성들을 모집했다. 대부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안부가 되어버린 이 여성들은 낯선 타국에서 성노예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

이 일기의 필자 역시 처남과 함께 제4차 위안단에 합류했던 인물이다. 제4차 위안단의 존재는 위안부 동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면 ‘제4차’란 조선에서 차례로 1차, 2차, 3차 위안단을 조직한 바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4차 위안단에 소속됐던 문옥주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위안부들은 150~200명씩 그룹을 이뤘다. 그룹마다 위안소 경영자와 종업원이 한두 명씩 딸려 있었다. 또한 연합국 최고사령부 연합번역통역국 조사보고서는 1942년 7월10일 부산항을 떠난 일본 군함에 조선인 여성 703명과 약 90명의 일본인 남녀가 타고 있었다고 밝혔다.

위안소 운영을 일본 군부가 직접 주도했다는 증거

제4차 위원단은 일본 군부가 조직했기에 위안소 업자들과 위안부는 군속(軍屬) 대우를 받았고 외국으로 출국하면서도 여권이 아니라 군이 발행하는 여행증명서를 지참했다. 또한 그들은 출국할 때 여객선이 아니라 군용선을 이용했으며 육지에서 이동할 때에도 주로 군용 교통수단을 무료로 이용했다. 그리고 위안부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인 전차금의 출처에 관해서도 일본의 전문가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군에서 지출되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필자의 일기나 연합군의 『포로심문보고』에 따르면 제4차 위안단의 위안부들은 버마의 각 지역으로 흩어져 각 부대의 위안소에 부속됐다. 운영자는 ‘영업일보’, ‘영업월보’, ‘월별수지계산서’ 등을 일본군사령부에 제출하고 군의 지시에 따라 위안부들의 신고, 성병검사, 피임기구 배급 등을 맡았다. 개업과 폐업, 위안소나 위안부의 이동 등에 일본군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또한 위안부들은 ‘성적 노예 상태’에서 일본군을 상대했으며 설령 이전에 받았던 전차금을 변제해도 폐업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결혼해 ‘부부생활하러 나간’ 위안부도 군에서 불러들이면 위안부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등 성노예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이 일기는 밝히고 있다.

작가 소개

번역·해제 : 안병직

1936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했다. 1965년 서울대학교 전임강사였으며, 2001년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직 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정약용 연구, 한국근대경제사를 전공 하고 있다. 저서로는『대한민국 歷史의 岐路에 서다』,『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등이 있다.

박속심

http://blog.ohmynews.com/yby99/304528

*1:いちおう確認しておきますと、これは「オーマイニュース」のニュース記事ではなく、ブログの記事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