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日のソウル中心部では、これもあったんですよね。光化門広場の混雑は一日、たいへんだった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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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ここに至る一連の事態の推移については、聯合ニュースがまとめてくれています。
故백남기 농민 사망 42일만에 광주 망월묘역에 영면(종합)
송고시간 | 2016/11/06 18:35(광주=연합뉴스) 장아름 박철홍 기자 =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 물대포에 맞은 뒤 숨진 고(故) 백남기(69) 농민이 6일 오후 고향인 보성·광주 노제를 끝으로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됐다.
故백남기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영면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6일 오후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고(故) 백남기 농민 하관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백씨는 지난해 11월 14일 서울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 치료 중 올해 9월 25일 숨을 거뒀다. 2016.11.6유족들과 장례위원회는 보성장례식장에 안치된 고인의 시신을 전남 보성군 웅치면 생가로 운구해 이날 오전 8시 30분 제사를 지냈다.
9시 30분부터는 보성역 광장에서 노제가 열렸다.
백남기 전남 투쟁본부 주관으로 열린 노제에는 고인의 지인과 시민사회 관계자 등 50여명이 참석해 추모사 낭독, 헌화·분향, 추모 살풀이공연 등이 이어졌다.
고인의 시신은 보성역부터 군청까지 운구된 뒤 광주로 옮겨졌다.
정오부터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5천여명 이상의 시민들 참여 속에 노제가 열렸다.
평생을 민주화운동과 농민운동에 헌신한 약력 소개를 시작으로 각계각층의 조사가 잇따랐다.
특히 히다얏 그린필드 국제식품연맹(IUF) 아태지역위원회 사무총장도 조사를 통해 "백남기 농민의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고 밝혔다.
백씨의 딸 백민주화씨는 "아버지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단 한 번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지난 317일 동안과 그 이후에서 마음껏 슬퍼한 적이 없다"며 "그런 저희 가족 곁에 함께 해주신 많은 국민 덕분에 그 시간을 다 이겨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노제를 마친 뒤 금남로에서 대인시장, 광주고 앞, 말바우시장까지 3km가량을 행진한 운구 행렬은 화장의식을 마치고 한 줌 재로 변한 백씨의 유골함을 앞세우고 광주 북구 망월동 5·18 구묘역에 도착했다.
천주교식 장례로 1시간여간 열린 하관식은 무덤축복, 영구안장, 헌화, 청원기도, 흙 덮음 순으로 진행됐다.
백 농민과 광주고 동급생이었던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은 이 자리에서 "이제 모두 내려놓고 땅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 편히 쉬길 바란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고인의 무덤에 흙을 덮고 꽃을 바치며 눈물로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故백남기 운구 행렬고인의 장례는 사망 41일만인 지난 5일 서울에서 민주사회장(葬)으로 거행됐다.
전날 오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천주교 수도자들과 유족 등 일부만 참석한 발인식이 열렸고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장례미사를 집전했다.
이어 광화문 광장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고인의 시신은 고향인 보성으로 옮겨졌다.
1947년 보성에서 태어난 백씨는 중앙대 행정학과 재학 시절 학생운동에 가담, 1980년 체포됐다가 이듬해 3·1절 특별사면됐다.
이후 보성으로 내려가 농업에 종사하며 가톨릭농민회에서도 활동했다.
백씨는 지난해 11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1차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 차벽 앞에서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뒤 병원으로 옮겨졌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그는 한 번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다 지난 9월 25일 숨을 거뒀다.
유족과 시민단체는 고인이 물대포에 맞아 사망에 이른 것이 명백하다며 책임자 처벌과 사과를 요구했으나 검찰과 경찰은 명확한 사인 규명을 위해 시신 부검이 필요하다며 영장을 청구해 논란이 벌어졌다.
조건부로 발부된 부검 영장은 유족 측의 완강한 거부로 집행 시한인 이달 25일까지 집행되지 못하다가 검경이 영장을 재청구하지 않기로 하면서 비로소 장례 절차가 시작됐다.
2016/11/06 18:35 송고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1/06/0200000000AKR20161106023951054.HTML
で、その詳細については、やはりハンギョレさんが詳しいです。
1980年の光州事件の犠牲者が当初葬られていた、望月洞の光州市立墓地の一角にある5.18旧墓地は、国立5.18民主墓地の成立にともなって事件当事者である「5.18有功者」がそちらに移り、現在はそれ以外の民主化運動・労働運動に献身した人々の墓域となっています。中でももっとも有名なのが、李韓烈でしょう。
ひび割れる5.18旧墓地 - 大塚愛と死の哲学
【光州の風景】5.18旧墓地の空室状況 - 大塚愛と死の哲学
ペクナムギ氏も、そうした人々に列して眠ることになるわけです。
光州望月洞の5.18旧墓地には何度も行ったことがあります。が、全斗煥のこんな「碑」があるとは知りませんでした。ただ、この記事の内容でそこをことさらフォーカスする必要があるのかどうか、私にはよくわかりません…。
“전두환 비 밟고 간다”…백남기 농민 묻힐 5·18 구 묘역
등록 :2016-11-05 18:17 수정 :2016-11-05 19:27광주 망월동 5·18 구 묘역에 6일 오후 영면 예정
이한열·강경대 등 46명 안장된 ‘민족·민주열사 묘지’
5일 오후 고 백남기 농민이 묻힐 광주 5.18 구 묘역은 고요했다. 고 최현열 묘지 바로 옆(팻말 있는 쪽)이 고인이 묻힐 자리다.‘들꽃 같은 삶을 사신 생명과 평화의 일꾼.’
5일 오후 광주시 북구 망월동 5·18 구 묘역 들머리에 고 백남기 농민을 기리는 펼침막들이 걸려 있었다. 평생을 생명과 평화,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 온 백남기 농민은 6일 오후 이 묘역에 안장된다. 광주시는 지난 2일 백남기 농민의 주검을 5·18 구 묘역에 안장하도록 허가했다. 시는 백남기 농민의 유족이 구 묘역 안장을 요청하자 관련자 회의를 열어 안장 허가를 결정했다. 백남기 농민의 안장 묘지는 일제강점기 피해자문제 해결을 촉구했던 고 최현열(1935~2015) 묘지 바로 옆이다. 시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는 백씨 유족이 신청한 5·18관련 보상자 인정 여부를 심의 중이다.
5.18 구 묘역 전경.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고 이한열 열사도 이 곳에 안장됐다.망월동 구 묘역은 5·18항쟁 직후 ‘폭도’로 몰린 희생자들이 처음 묻혔던 시립묘지다. 1997년 5·18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구 묘역 인근 운정동에 국립5·18묘지가 조성돼 5·18 유공자들이 이장된다. 이후 이 곳은 5·18 구묘역으로 불렸다. 이 곳엔 고 이한열·강경대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 46명이 묻혀 있어 민족·민주열사 묘지로 불린다. 5·18 구 묘역엔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을 지낸 고 정광훈(1939~2011)도 안장돼 있다. 정광훈 의장의 옆 자리엔 고 김남주 시인이 묻혀 있다.
5·18 구 묘역 들머리에 있는 ‘전두환 기념비’. 민주열사들이 묻혀 있는 구 묘역에 들어가는 이들은 모두 이 비를 밟고 지나간다.6일 백남기 농민의 유해는 ‘전두환 비석’을 밟고 지나간다. 1982년 전남 담양군 마을을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세운 비를 광주·전남 민주동지회가 1989년 부숴 구 묘역 들머리에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백남기 농민은 1984년 전두환 정권이 수매를 중단한 뒤 우리밀이 사라져가자 후배 농민들과 우리밀 종자를 찾아 전국을 돌며 2년 동안 모은 이름 모를 종자 24㎏을 다시 각 지역으로 내보냈다. 백남기 농민도 1989년 보성군의 ‘우리밀 1호 농민’이 됐다.
광주/글·사진 정대하 기자
백남기 농민 5·18 민주열사 묘역에 잠들다
등록 :2016-11-06 20:16 수정 :2016-11-06 20:206일 오후 하관의례 열고 5·18 옛묘지에 안장
유족 시민,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며 눈시울 붉혀
백남기씨의 유족들이 6일 광주 5·18 옛묘지에 만들어진 고인의 묘비를 살피고 있다.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숨진 농민 백남기씨가 광주 5·18 옛묘역에 잠들었다.
생명과 평화의 일꾼 고 백남기 농민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는 6일 오후 5시 광주시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천주교 의례로 하관식을 열고 유해를 안장했다.
하관의례는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이영선 신부의 집전으로 진행됐다.
고인의 유족과 지인들은 납골함을 모신 뒤 성수를 뿌리고 붉은 흙을 덮으며 눈시울을 붉혔다.추모객 500여명은 ‘부활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합창하며 숙연하게 안장의례를 지켜봤다.
정현찬 가톨릭농민회장은 조사에서 “무자비한 폭력으로 백남기님을 숨지게 만든 박근혜 정권을 반드시 쫓아내고, 폭력과 불의가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말했다.
백씨의 친구인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은 “우리밀밭 걱정도, 나락 논 걱정도 이제 다 내려놓고 편히 쉬시라”고 추모했다.
추모객들은 어둠이 깃든 뒤에야 백씨의 봉분이 만들어졌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국화를 바치며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장례위원회는 백씨의 묘비 뒤쪽에 “평생을 학생운동 농민운동 우리밀살리기운동으로 활화산처럼 살다가 희생된 백남기 선생 여기에 잠들다”라는 글귀를 새겼다.
앞서 전남 보성역과 광주 금남로에서는 백씨의 들꽃처럼 향기로운 삶을 기리는 노제와 운구행진이 열렸다.글·사진 안관옥 기자
광주시 북구 망월동 5·18 옛묘지에 조성된 고인의 봉분
백씨의 자녀인 민주화·도라지·두산씨가 조성된 묘비를 쓰다듬으며 이별을 안타까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