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추모누리, 장례문화 변화 이끌 새 얼굴 맞이했다
김희준 기자 승인 2022.01.14 09:47 호수 778
정경근 신임대표,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을 사회에 환원할 것"
지난해 위탁운영자 공모 경쟁을 뚫고 선정된 정경근 남해추모누리 장례식장 대표.
2022년 남해추모누리장례식장을 이끌 인물이 2007년 개장한 이후 15년 만에 바뀌었다. 새 얼굴의 주인공은 남면 구미마을 출신 정경근(64·남해읍) 대표이다. 오랜 세월 장례문화 선도에 노력해온 정경근 대표에게 앞으로의 추모누리 운영 계획과 장례문화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악착같은 학구열, 장례의 길에 쏟아
남해군 남면 토박이로, 남해읍에서 식당을 운영 중이던 2005년, 못다한 학업에 대한 열망을 이루려 48세에 해성고등학교에 입학해 2008년에 늦깎이로 졸업하며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정경근 대표, 학업에 대한 그의 열의는 <인간극장>, <생로병사의비밀>과 각종 신문 인터뷰 등으로 소개됐다. 다양한 매스컴에 얼굴을 알린 그는 이후 남해병원장례식장에서 7년간 근무하는 중에 경상국립대 평생교육원에서 장례지도사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획득, 직접 상조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후 남해전문장례식장 대표로서의 활동을 마친 후에는 다년간의 장례지도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마지막으로 남해에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지난해 남해추모누리장례식장 위탁 운영자 공모에 입찰해 경쟁을 뚫고 2022년부터 대표직을 맡게 됐다.
우리 장례문화 변화 서서히 이끌겠다
최근 장례문화가 예전에 비해 간소화하고 있기도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이런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예전에 비해 장례식 제물도 줄었으며 많은 인원의 조문객이 모이지 않아 이를 나눠먹는 풍습도 사라져가고 있다. 서서히 소규모화, 비용 합리화가 이뤄지며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는 방향으로 인식이 전환하던 중에 코로나19 사태로 대규모 장례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 정 대표 역시 이런 추세가 옳다고 보고 "추모누리장례식장의 변화를 천천히 이끌어가며 장례문화의 거품을 뺀다는 먼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추모누리는 화장까지 가능해 따로 이동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즘은 동네에서 노제를 지내지도 않을뿐더러 제물을 나눠먹지도 않아,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차라리 내 부모 형제가 살아있을 때 효도하고 우애를 나누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추모누리를 마지막 봉사의 기회로
정 대표는 추모누리의 변화를 이끄는 동시에 앞으로 그간 장례지도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환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해에서 나고 자란 그가 이제 남해에 어떻게 보답할지 아직은 고민 중이지만, 소외계층을 찾아가는 형태의 봉사를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평생의 장례지도 경험을 살려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장례에 임할 생각이며, 남해추모누리가 욕심없이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장례식장이 되도록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남해추모누리장례식장은 선진 장묘문화를 선도하기 위해 장례와 화장, 안치를 모두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해 설립됐으며, 자연분해되는 납골함을 땅에 묻는 방식의 `납골평장`과 일반매장묘역, 납골당을 모두 운영하고 있다.
[함양]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추모공원 준공 함양군 수동면 도북리 ... 차용현 유족회장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21.12.17 16:44 l 최종 업데이트 21.12.17 16:44 l 윤성효(cjnews)
▲ 한국전쟁전후 함양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 준공식 ⓒ 함양군청
▲ 한국전쟁전후 함양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 준공식 ⓒ 함양군청
경남 함양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공원이 생겼다. 함양군은 17일 오후 수동면 도북리에서 '한국전쟁 전후 함양 민간인 희생자 추모공원' 준공식을 열었다.
함양지역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을 거쳐, 1954년 빨치산 토벌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기까지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과 그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 추모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이날 준공식에는 서춘수 함양군수와 황태진 함양군의회 의장을 비롯해 관련 기관·단체와 주민 등 9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차용현 유족회장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에 의해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고 위령탑 건립에 헌신한 점을 인정받아 함양군과 유족회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추모공원은 2018년부터 함양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회의 요구로 추진되었다. 2019년 3월 사업 부지 정비와 주차장 조성공사가 시작되었고, 올해 6월 공개경쟁입찰을 거쳐 사업이 공사가 진행되었다.
추모공원은 군비 5억원을 들여 전체 3045㎡ 면적에 조성되었다. 10.2m 높이의 '위령탑'이 세워졌고, 합동묘역의 비석, 정각 정비, 조경공사, 추모객 편의를 위한 파고라,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서춘수 군수는 추도사를 통해 "무고하게 돌아가신 희생자 분과 유족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위로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며 "추모공원 조성은 우리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민간인 희생자를 위로하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자유와 평화의 교훈을 전달하는 산교육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차용현 유족회장은 "추모공원을 조성하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며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해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부부 독립운동가 "박영준-신순호"의 묘비 교체 이전(왼쪽)과 이후(오른쪽) 뒷면 아래 "약력란" 모습. 2021년 3월에 교체되면서 박영준과 신순호의 독립운동 이력이 함께 새겨져 있다. ⓒ 김학규
예외도 있었다. 김학규·오광심의 묘비에는 철저히 성평등의 관점이 반영되어 묘비 뒷면 아래의 '약력란'에도 김학규의 약력과 오광심의 약력을 이미 나란히 새겨 넣고 있었다. 물론 이들의 묘비도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국지사 김학규의 묘, 배위 오광심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던 김학규·오광심의 묘가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2014년의 일이다.
이렇듯 여성 독립운동가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죽어서도 수십 년간 차별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내 2021년 3월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 '혁명적 변화'는 그동안 조사·연구와 탐방에 기초하여 '여성길'을 조성하는 등 동작역사문화연구소와 인권도시연구소의 꾸준한 문제 제기와 활동이 밑바탕이 되었다.<경향신문>이 동작역사문화연구소의 협조를 받아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의 문제를 성평등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도(<독립운동가 부부 함께 안장됐는데, 공훈록·묘비에서 사라진 '여성의 공로'>, 2021. 3. 10)하면서 발동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들의 꾸준한 활동과 문제 제기가 국립서울현충원에 또 다른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의 '혁명적 변화'로 이제 국립서울현충원 '여성길' 탐방이 훨씬 활성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묘비도
▲ 임시정부요인 묘역 "이상룡-김우락"의 묘비 뒷면(왼쪽)과 부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이범석"의 묘비(오른쪽). "이상룡-김우락"의 묘비는 지난 2020년 교체하면서 부부 독립운동가의 생몰년을 나란히 새겨넣었으면서도 아래 "약력란"에는 여전히 이상룡의 약력만을 새겨놓은 예전 그대로다. "김마리아-이범석"의 묘비는 "국무총리 이범석의 묘"에 "배위 김마리아 합장"으로 새겨져 있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1977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으나 이번 전면 교체 과정에서도 누락되었다. ⓒ 김학규
그런데 무슨 일인지 성평등 관점에서 독립유공자 묘역를 '전면 재정비'했음에도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이상룡·김우락의 묘'와 국가유공자 제2 묘역의 '김마리아·이범석의 묘'는 여전히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상룡·김우락' 묘비 뒷면 아래 '약력란'은 이상룡의 약력만 새겨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국가유공자 제2 묘역의 '김마리아·이범석' 묘비는 '국무총리 이범석의 묘'에 여전히 '배위 김마리아'로 새겨진 채였고, 묘비 뒷면 아래 '약력란' 역시 이범석의 약력만 새겨져 있는 그대로였다.
특히 김마리아(1903-1970)는 44년 전인 1977년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지금까지도 독립운동가이자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의 '배위'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셈이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에 참여하고 한국광복군에서도 활약한 김마리아는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안치되어 있는 '혁명여걸' 김마리아(1892-1944)와는 동명이인이다.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국방부가 국립서울현충원을 관할하다 보니 발생한 문제가 아닐까 추정해 보지만, 두 묘비만 교체하지 않은 이유를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한 부분이다.
사는이야기>대전충청 소갈비, 80년 전에는 어떻게 먹었을까 예산 지역 소갈비가 오래 사랑 받은 비결
21.03.03 08:38 l 최종 업데이트 21.03.03 10:02 l 김두레
▲ 예산8미중 하나인 예산소갈비. ⓒ 예산군
풍미 가득한 육즙, 부드러운 식감, 달달하고 짭짤한 그 맛에 감탄을 쏟아놓게 되는 음식. 귀한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을 때, 조금은 특별한 날에 찾는 음식. 바로 소갈비다.
먹거리가 풍부하고 맛집이 많아 웬만한 음식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예산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사로잡은 양념소갈비는 무려 80년 역사를 자랑한다. 오랜 전통과 깊은 맛으로 주민들은 물론 다른 지역 사람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지금도 비싼 가격인 소고기, 80년 전에는 어떻게 먹었을까? 예산사람들은 선술집 '소복옥'에서 양념소갈비를 맛보기 시작했다. 1941년 자그마한 국밥집으로 시작한 이곳이 선술집이 되면서 소갈비가 안주로 나왔다.
"지금 소복갈비 자리 주변에 화신옥, 소복옥, 삼선옥 등 유명한 술집이 모여 있었대요. 각자 내놓는 안주도 다 달랐는데, 우리 집은 소갈비를 숯불에 구웠어요. 그게 맛있어서 입소문을 타고 외지 사람들이 오기 시작한 거죠. 1958년부터 '소복옥'을 '소복갈비'로 이름을 바꿔 갈비전문 식당으로 운영했어요."
소복갈비 김영호(68) 대표가 옛 기억을 더듬는다. 김 대표에 따르면 그의 할머니가 일제강점기에 문을 열었고 김 대표의 고모 김복순 여사, 어머니 이수남 여사가 맛을 이어왔다.
▲ 1980년대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소복갈비’ 건물. 간판에 쓴 ‘40년 전통’이 눈에 띈다. ⓒ 김영호
"귀하고 비싼 음식인데도 장사가 잘 된 이유는 예산이 부촌이었기 때문이에요. 이 시골에 호서은행이 세워질 정도니까요. 예산에 그렇게 부자들이 많았고, 음식 잘하는 식당이 예산읍내에 특히 많았어요. 그러니 소비가 잘 됐던 거지요. 다른 지역에는 전혀 없는 소갈비를 예산에서 맛있게 하니까 외지 손님도 정말 많이 왔어요. 주로 의사, 땅부자, 정치인, 직장인들이 와서 먹고, 손님을 대접하기도 했죠."
'갈비인생'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삼우갈비 박유진(66) 대표의 말이다. 대표 소갈비 맛집 2곳인 소복갈비와 삼우갈비는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삼우갈비 박유진 대표의 모친 이천종 여사는 당시 '소복옥' 주방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직원이었다.
박 대표는 그곳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일하며 '소복옥' 살림살이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끈끈한 관계를 잇던 김복순 대표가 세상을 떠나자 이 여사와 박 대표는 소복갈비 일을 그만두고 1986년 새롭게 '삼우갈비'를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소복옥'에서 일하며 제가 정육점에서 갈비를 가져왔어요. 정육점이 소 한 마리를 잡으면 갈비 두 짝을 자전거에 실어오는 거예요. 저녁에 하교하면 집에서 외상장부를 작성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신례원, 역전시장, 오가에 있는 정육점에 들러 갈비값을 계산하고 난 뒤 학교에 갔어요. 당시 하루 매출이 200만~300만 원이었으니 정말 어마어마하게 팔았습니다."
▲ 기름을 제거하고 살을 발라낸 뒤 간장양념에 버무려 2~3일 숙성하면 맛있는 양념소갈비가 완성된다(왼쪽). 숯불에서 적당하게 구워내고 식지 않도록 데운 석판에 담아 손님상에 낸다. ⓒ <무한정보> 김두레
예산 양념소갈비 명맥을 잇는 두 식당이 한우암소만을 고집해 사용하는 것은 타지역과 다른 우리 지역만의 특징이다. 암소는 기름이 많아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인력이 많이 들어 웬만한 식당은 거세우를 사용하지만, 거세우보다 육즙이 풍부하고 고소한 맛이 강하다.
맛있는 양념소갈비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갈비 손질부터, 양념, 숙성, 굽기 등 모든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겨 있다.
제일 먼저 갈비 겉에 붙은 기름을 떼 내는 게 가장 큰 일이다. 육절기로 갈비를 자르고 양념갈비 부위와 갈비탕 거리를 분리한 뒤 갈비살을 발라 칼집을 낸다. 간장을 기초로 갖은양념을 더해 버무려 2~3일 숙성하는데, 계절마다 숙성 속도가 달라 가장 맛있을 때를 찾는 것이 포인트다.
갈비를 구워 식탁에 올리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고기 굽는 곳 앞에서 하나하나 집어먹으며 술을 마시던 목로문화에서 유래된 거 같아요. 옛 건물에는 방마다 구이 시설을 갖추기 어려웠을 뿐더러, 소갈비를 먹을 정도면 거의 대접 받는 경우인데, 누구 한 명이 굽느라 바쁘면 힘들잖아요. 선술집이었을 때는 갈비를 구워 손님에게 낸 뒤 그 자리에서 잘라줬어요."
갈비 베테랑들이 알맞게 구워준 것을 맛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서민 음식도, 자주 먹을 수 있는 흔한 고기도 아니지만, 예산소갈비의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비결은 무엇일까.
"갈비는 달콤한 보물인 거 같아요. 어버이날이나 어린이날, 명절과 같은 특별한 날 소중한 사람들에게 사주고 싶은 마음으로 오잖아요. 내가 사줘도 뿌듯하고, 대접받는 사람도 기분 좋게 맛있게 먹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 음식하는 사람도 짜릿하고 예산의 갈비 맛을 이어온다는 자부심이 생겨요. 갈비가 참 '보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청년 쏴죽인 5.18 계엄군, 유족 앞 첫 공개 사죄 5.18묘지서 만나 41년 만에 회한의 눈물... 유족 "사과해줘 고맙다" 용서
21.03.17 13:19 l 최종 업데이트 21.03.17 14:54 l 소중한
[기사 수정 : 17일 오후 2시 55분]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왼쪽부터 고 박병현씨 형 박종수씨, 송선태 위원장, A씨.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41년 만의 첫 사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한 청년을 사살했던 계엄군 출신 A씨가 지난 16일 유족을 직접 찾아 사과했다. 계엄군 출신이 유족 앞에서, 특히 자신이 직접 죽인 이의 가족을 만나 공개 사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청년의 형은 A씨의 사죄를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사과해줘 고맙다"며 외려 그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 용서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고백과 증언'은 이렇게 첫발을 내딛었다.
유족 "오래 전 다 용서, 명령 내린 놈이 나쁜 놈"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왼쪽부터 A씨, 김영훈 유족회장(중앙), 고 박병현씨 형 박종수씨.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5.18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라며 "그간 진압 작전에 참여했던 계엄군들이 목격한 사건들을 증언한 경우는 많이 있었으나 가해자가 자신이 직접 특정인을 숨지게 했다며 유족에게 사과 의사를 밝힌 경우는 최초"라고 발표했다.
앞서 A씨는 위원회를 통해 자신이 1980년 5월 23일 광주시 남구 노대동 소재 '노대남제' 저수지 인근에서 시민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위원회는 당시 그곳에서 죽은 피해자의 신상을 A씨에게 제시했고, A씨는 그 사람이 자신이 죽인 이가 맞다고 인정했다.
A씨가 사살한 인물은 '국립5.18민주묘지 2-02'에 잠들어 있는 고 박병현씨다. 1956년생인 박씨(5.18 당시 25세)는 광주의 시계점에서 일하던 중 고향 보성의 농촌 일을 돕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7공수여단 33대대 8지역대 소속의 A씨에게 총을 맞아 사망했다.
위원회는 A씨가 유족에 사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박씨의 형을 만나 이를 전했다. 박씨의 형은 "우리 가족은 이미 오래 전에 다 용서했다. 그 군인이 무슨 죄가 있겠나. 명령을 수행한 죄밖에 더 있겠나. 명령을 내린 놈이 나쁜 놈"이라며 사죄를 받아들일 의사를 밝혔다.
위원회는 두 사람 만남의 공개 여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A씨의 사죄를 개인의 도덕적 반성을 넘어 공적 영역으로 이끌어 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원회의 공개 사죄 제안에 고민을 이어가던 A씨는 결국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왼쪽부터 A씨, 김영훈 유족회장, 송선태 위원장, 고 박병현씨 두 형제.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A씨와 박씨의 두 형제는 16일 국립5.18민주묘지 민주의문 접견실에서 만났다. A씨는 이 자리에서 유족에게 엎드려 절하며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려 죄송하다. 저의 사과가 또 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아 망설였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 "지난 4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유족을 이제라도 만나 용서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박씨의 형 박종수(73)씨는 "늦게라도 사과해줘 고맙다.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며 "용기 있게 나서줘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다. 과거의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떳떳하게 마음 편히 살아달라"고 답했다.
위원회는 "그간 위원회는 조사 활동을 통해 A씨의 고백과 유사한 사례를 다수 확인했다"며 "향후 계엄군과 희생자 간 상호 의사가 있는 경우에는 위원회가 이를 적극 주선해 조사위 설치 목적대로 사과와 용서를 통한 불행한 과거사 치유 및 국민통합에 기여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왼쪽부터 송선태 위원장, A씨, 고 박병현씨 두 형제.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5.18 계엄군·유족 만남 이끈 이 사람 "양심고백 이어지길" [스팟인터뷰] 최용주 5.18진상조사위 1과장 "유족 찾아 공개 사죄, 세계사적으로도 드물어"
21.03.17 15:57 l 최종 업데이트 21.03.17 16:49 l 소중한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고 박병현씨의 형 박종수씨(오른쪽)와 박씨를 죽인 A씨가 부둥켜안은 채 오열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익명의 대상을 상대로 사과하는 사례는 그 동안 많았는데, 자신이 죽인 이를 특정해 그 유족을 만나 사죄한 건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한 청년을 사살했던 계엄군 A씨가 지난 16일 유족을 직접 찾아 사과했다. 그 동안 일부 계엄군의 목격담은 여럿 있었지만, 계엄군이 직접 자신이 죽인 이의 유족을 만나 공개 사과한 건 41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관련기사 : 청년 쏴죽인 5.18 계엄군, 유족 앞 첫 공개 사죄 http://omn.kr/1sgv4).
고백과 증언, 사과와 용서가 이뤄지기까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의 역할이 컸다. 지난해(2020년) 7공수여단의 작전사항을 살피기 위해 고 박병현씨(1956년생)의 사례를 추적하던 위원회는 A씨가 박씨를 죽인 인물임을 알게 됐다.
지난 1월 A씨를 만난 위원회는 그로부터 '사죄하고 싶다'는 의사를 확인했고, 이를 전남 해남에 사는 박씨의 형 박종수(73)씨에게 전했다. 박씨는 고민 끝에 A씨를 만나기로 했다.
위원회는 A씨의 사죄를 개인의 도덕적 반성을 넘어 공적 영역으로 끌어오고자 했다. 그래서 A씨에게 공개 사죄를 요청했다. A씨로선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위원회 설득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 최용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조사1과장 ⓒ 이희훈
이번 만남을 총괄한 최용주 위원회 1과장은 17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유족도 '응어리가 풀렸다'고 말하고, A씨도 연신 '고맙다'고 그러더라.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라며 "우리 위원회로서도 가장 보람된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사례를 통해 계엄군들의 양심고백이 이어졌으면 한다. 결국 사과와 용서가 아픔을 치유하고 사회통합으로 나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 아니겠나"라며 "앞으로 이러한 사례가 축적되면 자연스레 5.18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야만적 국가폭력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아래 최 과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유족도 고마워했다... 보람된 순간"
- 어떻게 해서 계엄군을 만나게 됐나.
"2001년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문사위)'에 신고됐었던 박씨의 죽음은 (죽인 사람을 특정할 순 없었지만) 사망 원인이 명확했고 보상 절차가 진행됐었기에 의문사위 역할 상 조사가 개시되지 않은 사건이었다. 우리도 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건 (박씨가 숨진 곳 인근에서의) 7공수여단 이동경로 및 작전사항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안을 훑어보던 중 7공수여단 소속 군인의 양심고백을 발견했고 이것이 박씨의 죽음과 연관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A씨를 찾아갔더니 그도 놀라면서 '당시의 행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우리에게 고백했다. 그는 '이제라도 유족을 만나 용서를 빌고 싶으니 위원회가 자리를 마련해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 그래서 박씨의 유족을 찾아가게 된 것인가.
"그렇다. (당시 25세였던 박씨의) 아버님,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형제 분들이 계셨다. 전남 해남에 살고 계신 큰형님을 직접 만났다. 나와 조사관이 '당신 동생을 사망하게 한 계엄군의 신원을 알게 됐다. 그가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더니 그는 한참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고통을 내려놔야 할 것 같다'며 사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 계엄군과 유족의 만남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을 두고 위원회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국가폭력에 의한) 사과와 용서는 개개인 간의 문제로 끝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의미가 있다. A씨의 신원은 공개하지 않는 선에서 그의 사과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유족도 이를 받아들였다."
- 공개 사과를 제안하자 A씨는 어떤 반응이었나.
"고민을 많이 하더라. 다만 이 과정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고 이에 공감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왼쪽부터 고 박병현씨 형 박종수씨, 송선태 위원장, A씨.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 계엄군이 자신이 직접 죽인 이의 유족을 만나 사죄를 했다는 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5.18 이후 처음 있는 일이며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기존엔 계엄군의 목격담 등이 전부였는데 A씨는 본인의 행위에 대한 고백을 한 것 아닌가. 또한 익명의 대상을 상대로 사과하는 사례는 그 동안 많았는데, A씨처럼 자신이 죽인 이를 특정해 그 유족을 만나 사죄한 건 매우 드물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유족도 '내가 용서하고 싶어도 누굴 용서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렇게 나서줘 고맙다'고 하더라."
- 어디선가 보고 있을 다른 계엄군 출신들에게도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될 것 같다.
"그렇다. 이번 사례를 통해 계엄군들의 양심고백이 이어졌으면 한다. 실제로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사과와 용서가 아픔을 치유하고 사회통합으로 나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 아니겠나. 이미 우리 위원회도 유사한 사례 몇 건을 더 다루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사례가 축적되면 자연스레 5.18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야만적 국가폭력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유족도 '응어리가 풀렸다'고 말하고, A씨도 연신 '고맙다'고 그러더라.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A씨는 오늘 아침에도 전화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왔다. 우리 위원회로서도 가장 보람된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위원회의 역할이 앞으로도 중요하겠다.
"위원회 설립 목적인 진실규명을 위해선 가슴 아픈 과거사 때문에 찢긴 사회 구성원의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과제를 풀어내야 한다. 사회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관점에서 위원회 활동을 이어가겠다."
5·18 때 계엄군 유족 찾아 참회...직접 용서 구한 첫 공수대원
강현석 기자 2021.03.17 20:43 입력
“겁에 질려 도망가는 민간인을 사살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됐다가 고향으로 가던 박병현씨를 사살한 것으로 확인된 공수부대 출신 A씨가 16일 박씨 묘지를 찾아 용서를 구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 제공
묘지 앞에 무릎 꿇고 “사죄” 직접 용서 구한 첫 공수대원 “40년간 죄책감에 시달렸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이 희생자의 유족을 만나 사죄했다. 계엄군이 자신이 직접 사살한 사망자의 유족을 만나 용서를 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5·18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원 A씨(66)가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박병현씨 유가족을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고 17일 밝혔다.
A씨는 5·18묘지에 안장된 박씨의 묘역을 찾아 무릎을 꿇고 참배했다. 이날 A씨의 참배에는 박씨의 형과 동생 등 유가족 3명이 함께했다. A씨는 5·18 당시 25세였던 박씨에게 총격을 가해 사살한 당사자다.
박씨는 1980년 5월23일 농사일을 돕기 위해 광주에서 고향인 보성으로 가는 길에 사망했다. 당시 광주 외곽을 차단한 계엄군들로 인해 차량이 운행되자 않자 박씨는 걸어서 보성으로 가기 위해 친구와 함께 노대동 ‘노대남제’ 저수지 인근을 지나다 A씨 부대와 맞닥뜨렸다.
7공수 33대대 8지역대 소속이었던 A씨는 정찰을 하고 있었다. 박씨 일행이 도망치자 A씨는 곧바로 M16 소총으로 사격을 가했다. A씨 부대원들은 죽은 박씨를 인근 야산에 묻고 철수했다. 박씨의 시신은 5·18 직후 가족들에 의해 6월2일 발견됐다. 고향에 묻혔던 A씨는 6월11일 진행된 부검에서 머리 총상이 확인됐다. A씨는 5월30일 부대로 복귀한 뒤 전역했다.
5·18 당시 숨진 시민들의 개별 사망경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5·18진상규명위는 지난 1월 A씨 부대가 박씨 사망장소에서 작전을 폈던 사실을 확인했다. 조사관들이 찾아가자 A씨는 “내가 비무장한 사람을 사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고 한다. A씨는 2차례 면담에서 “당시 정찰을 하다 도망가는 민간인이 있었는데 (부대원 중)나만 무의식적으로 총을 쐈고 부대원들이 매장했다”면서 “박씨는 단지 겁에 질려 도망가던 상황이었다”고 진술했다.
A씨가 진술한 지역에서 사망한 시민은 박씨가 유일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이 박씨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A씨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뒤 유가족을 만나 용서를 빌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지난 1월에는 혼자 광주를 찾아 박씨의 묘역을 참배하고 사죄하기도 했다.
박씨의 유족들도 고심 끝에 A씨를 만나기로 했다. 2시간여 동안 박씨의 유가족을 만난 A씨는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렸다. 40년간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오열했다. 박씨의 형인 박종수씨(73)는 “늦게라도 고맙다.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며 용서했다.
5·18진상규명위는 “5·18 당시 시민들을 사살했다”는 당시 계엄군 3~4명의 증언을 확보하고 사망한 시민이 누구인지를 추가로 추적하고 있다. 5·18진상규명위 관계자는 “A씨처럼 계엄군들이 당당히 증언해 5·18의 진실을 밝혀주기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