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3の顕忠院「漣川顕忠院」、2023年度着工へ

まあ、国立墓地自体はこれからも安葬者が増え続けることは間違いないので、増設があること自体は自然なことです。

これが顕忠院である必要性は、未だにイマイチわかりませんけど。護国院でよくないかなあ…。

「この事業は、980億ウォンをかけ、新西面大光里93万9200平方メートルに10万基(1次5万基)規模の奉安施設と付帯施設を造成することで、2025年完工が目標だ」とありますけど、大田護国院が332万平方メートルありますから、(火葬して奉安するのが原則になったとはいえ)顕忠院としては小ぶりな気がします。

ともあれ、この新西面大光里一帯は、陸軍第5師団新兵教育隊が移転した跡地のようで、経済の再活性化も期待されているみたいですね。鐵原邑のすぐ南、白馬高地駅のすぐ手前の一帯です。訪問はなかなか大変か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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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국립현충원 조성사업 '순풍'…내년 연천서 착공할 듯
송고시간 2022-01-27 09:56
우영식 기자
우영식 기자

(연천=연합뉴스) 우영식 기자 = 국립연천현충원 조성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돼 내년 하반기 공사를 개시할 전망이다.

27일 경기 연천군에 따르면 국립연천현충원 조성사업은 올해 9월 실시설계가 완료돼 연말까지 보상과 인허가 절차를 끝내면 내년 하반기 착공한다.

현재 토지 보상은 30%가량 진행된 상태다.

국립연천현충원은 서울과 대전에 이은 3번째 국립현충원이다.

이 사업은 980억원을 들여 신서면 대광리 93만9천200㎡에 10만기(1차 5만기) 규모의 봉안시설과 부대시설을 조성하는 것으로, 2025년 완공이 목표다.

연천군은 국립현충원이 조성되면 군부대 이전으로 침체한 신서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연천군은 국립현충원 조성사업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연천군은 국립현충원 조성에 맞춰 올해 신서면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용역도 추진한다.

연천군 관계자는 "신서면 대광리 일대는 육군 5사단 신병교육대가 이전한 뒤 지역경제가 침체한 지역"이라며 "이곳에 국립현충원이 들어서면 방문객 증가 등으로 다시 활기를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2022/01/27 09:56 송고

https://www.yna.co.kr/view/AKR20220127062800060

こちらの記事には、「報勲処は、首都圏および江原圏の国家有功者の安葬のために昨年(2019年)、国立漣川顕忠院の敷地として京畿道連川郡新西面大光里を最終的に選定した」とあります。これも、限定地域を対象にした護国院にふさわしい設定です。まあ今後は、そうした用語と用途の区別が徐々に曖昧になっていくのかもしれません。

보훈처, 27일 국립연천현충원 조성사업 추진 업무협약
송고시간 2020-11-26 09:12
김귀근 기자
김귀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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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연천현충원 조감도 [보훈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국가보훈처는 27일 오후 3시 경기도 연천군청 대회의실에서 국립연천현충원 조성 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다고 26일 밝혔다.

협약식에는 박삼득 보훈처장과 이용철 경기도 행정1부지사, 김광철 연천군수 등이 참석한다.

이번 협약은 작년 8월에 체결한 양해각서(MOU)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사업추진과 관련된 지역경제 활성화, 인허가 등 행정절차 지원, 토지 보상 및 진입로 확장 등 기반시설 설치 등에 대한 상호협력과 의무 이행의 내용을 담았다.

보훈처는 수도권 및 강원권 국가유공자의 안장을 위해 작년 국립연천현충원 부지로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를 최종 선정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 기본계획 용역을 완료하고, 내년 설계를 시작으로 2025년까지 국비 980억 원을 투입해 5만기 규모의 봉안시설과 부대시설을 조성할 예정이다.

2020/11/26 09:12 송고

https://www.yna.co.kr/view/AKR20201126039600504

보훈처-연천군, '연천현충원 조성사업 양해각서' 체결
송고시간2019-08-05 07:50
이준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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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세종청사 국가보훈처 건물 [국가보훈처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국가보훈처는 지난 2일 연천군과 국립연천현충원 조성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5일 밝혔다.

이번 협약서에는 연천현충원 조성에 대한 협력 내용과 향후 실시협약 체결에 대한 노력 등이 담겨있다.

국립연천현충원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일대 92만m² 부지에 5만기 규모로 조성된다. 사업 기간은 올해부터 2025년까지로 국비 980억 원이 투입된다.

보훈처는 지난해 5월 국립묘지 입지선정 타당성 및 기본구상 연구용역을 진행했고, 같은 해 10월 부지 적격성 평가를 거쳐 연천군이 최종 선정됐다.

연천현충원 조성이 완료되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에 이은 세 번째 국립현충원이 된다.

2019/08/05 07:50 송고

https://www.yna.co.kr/view/AKR20190805014300504

南海追慕ヌリの委託運営者交代、というニュース

慶尚南道南海郡の南海追慕ヌリと言えば、定点観察ポイントとして何度も訪れている場所です。ここは南海郡が開設した総合葬墓施設ですが、近年の流れで委託運営を行なっており、その事業者が交代したというニュースが出ていました。

新任のチョンギョングン代表、48歳で高校に入学して卒業し、さらに大学の平生(生涯)教育院の葬礼指導士課程で資格を取得して互助会社や葬儀場の運営に携わった経験を持つ人物であるとのことです。

南海追慕ヌリは、様々な面で韓国の葬墓文化変容の「フロントランナー」と言ってよい存在なので、それが今後どのように変化していくのか、引き続き注視したいと思います。

남해추모누리, 장례문화 변화 이끌 새 얼굴 맞이했다
김희준 기자 승인 2022.01.14 09:47 호수 778

정경근 신임대표,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을 사회에 환원할 것"


지난해 위탁운영자 공모 경쟁을 뚫고 선정된 정경근 남해추모누리 장례식장 대표.

 2022년 남해추모누리장례식장을 이끌 인물이 2007년 개장한 이후 15년 만에 바뀌었다. 새 얼굴의 주인공은 남면 구미마을 출신 정경근(64·남해읍) 대표이다. 오랜 세월 장례문화 선도에 노력해온 정경근 대표에게 앞으로의 추모누리 운영 계획과 장례문화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악착같은 학구열, 장례의 길에 쏟아

 남해군 남면 토박이로, 남해읍에서 식당을 운영 중이던 2005년, 못다한 학업에 대한 열망을 이루려 48세에 해성고등학교에 입학해 2008년에 늦깎이로 졸업하며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정경근 대표, 학업에 대한 그의 열의는 <인간극장>, <생로병사의비밀>과 각종 신문 인터뷰 등으로 소개됐다. 다양한 매스컴에 얼굴을 알린 그는 이후 남해병원장례식장에서 7년간 근무하는 중에 경상국립대 평생교육원에서 장례지도사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획득, 직접 상조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후 남해전문장례식장 대표로서의 활동을 마친 후에는 다년간의 장례지도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마지막으로 남해에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지난해 남해추모누리장례식장 위탁 운영자 공모에 입찰해 경쟁을 뚫고 2022년부터 대표직을 맡게 됐다.

우리 장례문화 변화
서서히 이끌겠다

 최근 장례문화가 예전에 비해 간소화하고 있기도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이런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예전에 비해 장례식 제물도 줄었으며 많은 인원의 조문객이 모이지 않아 이를 나눠먹는 풍습도 사라져가고 있다. 서서히 소규모화, 비용 합리화가 이뤄지며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는 방향으로 인식이 전환하던 중에 코로나19 사태로 대규모 장례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 정 대표 역시 이런 추세가 옳다고 보고 "추모누리장례식장의 변화를 천천히 이끌어가며 장례문화의 거품을 뺀다는 먼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추모누리는 화장까지 가능해 따로 이동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즘은 동네에서 노제를 지내지도 않을뿐더러 제물을 나눠먹지도 않아,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차라리 내 부모 형제가 살아있을 때 효도하고 우애를 나누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추모누리를 마지막 봉사의 기회로

 정 대표는 추모누리의 변화를 이끄는 동시에 앞으로 그간 장례지도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환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해에서 나고 자란 그가 이제 남해에 어떻게 보답할지 아직은 고민 중이지만, 소외계층을 찾아가는 형태의 봉사를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평생의 장례지도 경험을 살려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장례에 임할 생각이며, 남해추모누리가 욕심없이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장례식장이 되도록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남해추모누리장례식장은 선진 장묘문화를 선도하기 위해 장례와 화장, 안치를 모두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해 설립됐으며, 자연분해되는 납골함을 땅에 묻는 방식의 `납골평장`과 일반매장묘역, 납골당을 모두 운영하고 있다.

김희준 기자김희준 기자

http://www.nh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760

慶尚南道咸陽に韓国戦争期民間人犠牲者追慕公園が竣工

朝鮮戦争期、民間人虐殺事件は各地で発生しているんですが、それらの人々のための追慕公園が造成されるという話は耳にしているものの、なかなか「その後」を聞かないもので、いろいろ検索している中でこちらのニュースが出てきました。

ただしこれは、慶尚南道の咸陽地域に限定された施設のようです。場所的には、咸陽郡の中心から東北に行った山間部ですね。


[함양]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추모공원 준공
함양군 수동면 도북리 ... 차용현 유족회장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21.12.17 16:44 l 최종 업데이트 21.12.17 16:44 l 윤성효(cjnews)


▲ 한국전쟁전후 함양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 준공식 ⓒ 함양군청


▲ 한국전쟁전후 함양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 준공식 ⓒ 함양군청

경남 함양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공원이 생겼다. 함양군은 17일 오후 수동면 도북리에서 '한국전쟁 전후 함양 민간인 희생자 추모공원' 준공식을 열었다.

함양지역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을 거쳐, 1954년 빨치산 토벌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기까지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과 그 유족을 위로하기 위해 추모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이날 준공식에는 서춘수 함양군수와 황태진 함양군의회 의장을 비롯해 관련 기관·단체와 주민 등 9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차용현 유족회장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에 의해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고 위령탑 건립에 헌신한 점을 인정받아 함양군과 유족회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추모공원은 2018년부터 함양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회의 요구로 추진되었다. 2019년 3월 사업 부지 정비와 주차장 조성공사가 시작되었고, 올해 6월 공개경쟁입찰을 거쳐 사업이 공사가 진행되었다.

추모공원은 군비 5억원을 들여 전체 3045㎡ 면적에 조성되었다. 10.2m 높이의 '위령탑'이 세워졌고, 합동묘역의 비석, 정각 정비, 조경공사, 추모객 편의를 위한 파고라,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서춘수 군수는 추도사를 통해 "무고하게 돌아가신 희생자 분과 유족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위로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며 "추모공원 조성은 우리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민간인 희생자를 위로하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자유와 평화의 교훈을 전달하는 산교육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차용현 유족회장은 "추모공원을 조성하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며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해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전쟁전후 함양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 준공식 ⓒ 함양군청


▲ 한국전쟁전후 함양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 준공식 ⓒ 함양군청


▲ 한국전쟁전후 함양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 준공식 ⓒ 함양군청


▲ 한국전쟁전후 함양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 준공식 ⓒ 함양군청


▲ 한국전쟁전후 함양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 준공식 ⓒ 함양군청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95960

顕忠院、独立有功者の夫婦を平等に扱う方針へ

オーマイニュースが記事にしていました。

夫婦墓において、夫の名前を中央に大書し、妻の名前を脇に小さく書く、というスタイルはしばしば見かけます。「배위(配位)○○○」と書かれていることが多く、「配位」は「夫婦がともに死去しているときの妻への尊称」だと言います。

このスタイルが、夫婦ともに独立有功者である場合にも適用され、これまでにも時に問題とされてきたわけです。

www.ohmynews.com

今回の記事は、そうした墓石が交換され、慣習的に「そうしたもの」とされていた形式が「個人を個人として平等に扱う」ものに改められつつあることを報じています。特に異論のある話ではありませんので、作業を進めてもらえればい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と同時に、従来の墓碑は墓碑で、「過去、そうしたものがあった」ことを示す歴史資料として、記録に残しておくことも必要ではあるでしょう。

부부 독립운동가 묘비도 성평등 관점으로 '전면 교체'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의 '혁명적 변화'... 꾸준한 시민운동의 성과
21.03.30 20:57 l 최종 업데이트 21.03.30 20:57 l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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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서울현충원의 명물 능수벚꽃 국립서울현충원의 봄을 상징하는 벚꽃의 개화가 평년보다 약 5-10일 먼저 찾아왔다. ⓒ 김학규

국립서울현충원의 벚꽃은 유명하다. 예년 같으면 4월 초에 절정에 이를 벚꽃의 개화 시점이 열흘 가까이 당겨지면서 많은 혼란도 있지만, 국립서울현충원의 봄도 열흘 정도 당겨서 찾아왔다.

그런데 국립서울현충원 방문객에게 봄이 찾아왔음을 실감케 하는 것은 벚꽃만이 아니다. 독립유공자 묘역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변화를 통해 국립서울현충원에 봄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5·18 계엄군의 묘비를 '전사'에서 '순직'으로 바꿔 설치했던 국립서울현충원이 이번에는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는 부부 독립운동가의 묘비를 성평등 관점에서 '전면 교체'한 것이다.

남성 중심이었던 부부 독립운동가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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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 독립운동가 "이회영-이은숙"의 묘비 교체 이전(왼쪽)과 이후(오른쪽) 모습. 그동안 "배위 이은숙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던 묘비와 달리 "애국지사 이은숙"이 "순국선열 이회영"과 나란히 새겨져 있다. ⓒ 김학규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는 부부 독립운동가의 묘는 이은숙·이회영의 묘, 김학규·오광심의 묘, 오광선·정정산의 묘, 신건식·오건해의 묘, 박영준·신순호의 묘, 신송식·오희영, 신팔균·임수명의 묘, 강무경·양방매의 묘가 있고,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있는 부부 독립운동가의 묘는 이상룡·김우락의 묘, 지청천·윤용자의 묘, 오영선·이의순의 묘가 있다.

그런데 이들 부부 독립운동가의 묘비는 그동안 남성(남편)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심지어 같은 독립운동가인데도 '순국선열(또는 애국지사) OOO의 묘'라고 씌어 있는 묘비 옆에 작게 '배위 OOO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최근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묘비 교체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때도 국립서울현충원 측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 부족과 성평등 관점의 결여로 묘비 앞면에 부부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나란히 새긴 묘비로 교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묘비 뒷면 아래에 있는 '약력란'에 남성 독립운동가의 약력만 새겨 넣은 묘비명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관련 기사 : 독립운동가인데 빠지거나 작게 새겨진 이름, 여성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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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 독립운동가 "박영준-신순호"의 묘비 교체 이전(왼쪽)과 이후(오른쪽) 뒷면 아래 "약력란" 모습. 2021년 3월에 교체되면서 박영준과 신순호의 독립운동 이력이 함께 새겨져 있다. ⓒ 김학규

예외도 있었다. 김학규·오광심의 묘비에는 철저히 성평등의 관점이 반영되어 묘비 뒷면 아래의 '약력란'에도 김학규의 약력과 오광심의 약력을 이미 나란히 새겨 넣고 있었다. 물론 이들의 묘비도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국지사 김학규의 묘, 배위 오광심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던 김학규·오광심의 묘가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2014년의 일이다.

이렇듯 여성 독립운동가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죽어서도 수십 년간 차별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내 2021년 3월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 '혁명적 변화'는 그동안 조사·연구와 탐방에 기초하여 '여성길'을 조성하는 등 동작역사문화연구소와 인권도시연구소의 꾸준한 문제 제기와 활동이 밑바탕이 되었다.<경향신문>이 동작역사문화연구소의 협조를 받아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의 문제를 성평등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도(<독립운동가 부부 함께 안장됐는데, 공훈록·묘비에서 사라진 '여성의 공로'>, 2021. 3. 10)하면서 발동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들의 꾸준한 활동과 문제 제기가 국립서울현충원에 또 다른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의 '혁명적 변화'로 이제 국립서울현충원 '여성길' 탐방이 훨씬 활성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묘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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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요인 묘역 "이상룡-김우락"의 묘비 뒷면(왼쪽)과 부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이범석"의 묘비(오른쪽). "이상룡-김우락"의 묘비는 지난 2020년 교체하면서 부부 독립운동가의 생몰년을 나란히 새겨넣었으면서도 아래 "약력란"에는 여전히 이상룡의 약력만을 새겨놓은 예전 그대로다. "김마리아-이범석"의 묘비는 "국무총리 이범석의 묘"에 "배위 김마리아 합장"으로 새겨져 있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1977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으나 이번 전면 교체 과정에서도 누락되었다. ⓒ 김학규

그런데 무슨 일인지 성평등 관점에서 독립유공자 묘역를 '전면 재정비'했음에도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이상룡·김우락의 묘'와 국가유공자 제2 묘역의 '김마리아·이범석의 묘'는 여전히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상룡·김우락' 묘비 뒷면 아래 '약력란'은 이상룡의 약력만 새겨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국가유공자 제2 묘역의 '김마리아·이범석' 묘비는 '국무총리 이범석의 묘'에 여전히 '배위 김마리아'로 새겨진 채였고, 묘비 뒷면 아래 '약력란' 역시 이범석의 약력만 새겨져 있는 그대로였다.

특히 김마리아(1903-1970)는 44년 전인 1977년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지금까지도 독립운동가이자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의 '배위'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셈이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에 참여하고 한국광복군에서도 활약한 김마리아는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안치되어 있는 '혁명여걸' 김마리아(1892-1944)와는 동명이인이다.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국방부가 국립서울현충원을 관할하다 보니 발생한 문제가 아닐까 추정해 보지만, 두 묘비만 교체하지 않은 이유를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한 부분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1232

「礼山八味」の筆頭、牛カルビの話

「礼山」というのは忠清南道礼山郡のことですが、そこには「礼山八味」というのがあるそうで(何故か日本語情報が出てこない)、その第一に挙げられているのが「礼山牛カルビ」。

ja.wikipedia.org
www.yesan.go.kr
www.yesan.go.kr

예산의 대표 맛 예산8미 홍보 강화
소갈비, 붕어찜, 민물어죽, 곱창, 산채정식, 장터국밥, 국수, 한우
김갑수 기자 승인 2018.06.19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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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이 예산8미(味)에 대한 홍보를 강화하고 나섰다. (예산군 제공)

[굿모닝충청 예산=김갑수 기자] 충남 예산군이 예산8미(味)에 대한 홍보를 강화하고 나섰다.

군은 ▲예산 소갈비 ▲예당 붕어찜 ▲예당 민물어죽 ▲삽다리 곱창 ▲수덕사 산채정식 ▲예산 장터국밥 ▲예산국수 ▲광시 한우 등 예산8미의 대표 사진을 선정하고 19일 보도자료를 통해 인지도 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군은 기존 관광안내책자 및 관광안내지도를 모두 소진시킨 뒤 사진을 교체·제작해 배포할 예정이다. 관내 시설물의 경우 예산확보에 맞춰 점차적으로 교체해 나갈 방침이다.

군 관계자는 “고화질의 8미 사진을 확보함에 따라 관광홍보물 뿐만 아니라 시설물 등에 부착하는 등 홍보를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앞서 군은 시대 변화와 먹거리 다변화에 맞춰 기존 5미 중 2개의 명칭을 변경하고 3가지를 추가해 지난해 8미를 선정한 바 있다.

http://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91843

その由来をたどった記事がオーマイニュースに出ていました。老舗が少ないと言われる韓国で、80年の伝統を誇る牛カルビ店。礼山が豊かで富裕層の多い地域だったからこそ、高価な牛カルビの店が成立して人気を博し、3代にわたって受け継がれてきたと。こういう話は面白いですね。

사는이야기>대전충청
소갈비, 80년 전에는 어떻게 먹었을까
예산 지역 소갈비가 오래 사랑 받은 비결
21.03.03 08:38 l 최종 업데이트 21.03.03 10:02 l 김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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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8미중 하나인 예산소갈비. ⓒ 예산군

풍미 가득한 육즙, 부드러운 식감, 달달하고 짭짤한 그 맛에 감탄을 쏟아놓게 되는 음식. 귀한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을 때, 조금은 특별한 날에 찾는 음식. 바로 소갈비다.

먹거리가 풍부하고 맛집이 많아 웬만한 음식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예산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사로잡은 양념소갈비는 무려 80년 역사를 자랑한다. 오랜 전통과 깊은 맛으로 주민들은 물론 다른 지역 사람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지금도 비싼 가격인 소고기, 80년 전에는 어떻게 먹었을까? 예산사람들은 선술집 '소복옥'에서 양념소갈비를 맛보기 시작했다. 1941년 자그마한 국밥집으로 시작한 이곳이 선술집이 되면서 소갈비가 안주로 나왔다.

"지금 소복갈비 자리 주변에 화신옥, 소복옥, 삼선옥 등 유명한 술집이 모여 있었대요. 각자 내놓는 안주도 다 달랐는데, 우리 집은 소갈비를 숯불에 구웠어요. 그게 맛있어서 입소문을 타고 외지 사람들이 오기 시작한 거죠. 1958년부터 '소복옥'을 '소복갈비'로 이름을 바꿔 갈비전문 식당으로 운영했어요."

소복갈비 김영호(68) 대표가 옛 기억을 더듬는다. 김 대표에 따르면 그의 할머니가 일제강점기에 문을 열었고 김 대표의 고모 김복순 여사, 어머니 이수남 여사가 맛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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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소복갈비’ 건물. 간판에 쓴 ‘40년 전통’이 눈에 띈다. ⓒ 김영호

"귀하고 비싼 음식인데도 장사가 잘 된 이유는 예산이 부촌이었기 때문이에요. 이 시골에 호서은행이 세워질 정도니까요. 예산에 그렇게 부자들이 많았고, 음식 잘하는 식당이 예산읍내에 특히 많았어요. 그러니 소비가 잘 됐던 거지요. 다른 지역에는 전혀 없는 소갈비를 예산에서 맛있게 하니까 외지 손님도 정말 많이 왔어요. 주로 의사, 땅부자, 정치인, 직장인들이 와서 먹고, 손님을 대접하기도 했죠."

'갈비인생'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삼우갈비 박유진(66) 대표의 말이다. 대표 소갈비 맛집 2곳인 소복갈비와 삼우갈비는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삼우갈비 박유진 대표의 모친 이천종 여사는 당시 '소복옥' 주방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직원이었다.

박 대표는 그곳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일하며 '소복옥' 살림살이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끈끈한 관계를 잇던 김복순 대표가 세상을 떠나자 이 여사와 박 대표는 소복갈비 일을 그만두고 1986년 새롭게 '삼우갈비'를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소복옥'에서 일하며 제가 정육점에서 갈비를 가져왔어요. 정육점이 소 한 마리를 잡으면 갈비 두 짝을 자전거에 실어오는 거예요. 저녁에 하교하면 집에서 외상장부를 작성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신례원, 역전시장, 오가에 있는 정육점에 들러 갈비값을 계산하고 난 뒤 학교에 갔어요. 당시 하루 매출이 200만~300만 원이었으니 정말 어마어마하게 팔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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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름을 제거하고 살을 발라낸 뒤 간장양념에 버무려 2~3일 숙성하면 맛있는 양념소갈비가 완성된다(왼쪽). 숯불에서 적당하게 구워내고 식지 않도록 데운 석판에 담아 손님상에 낸다. ⓒ <무한정보> 김두레

예산 양념소갈비 명맥을 잇는 두 식당이 한우암소만을 고집해 사용하는 것은 타지역과 다른 우리 지역만의 특징이다. 암소는 기름이 많아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인력이 많이 들어 웬만한 식당은 거세우를 사용하지만, 거세우보다 육즙이 풍부하고 고소한 맛이 강하다.

맛있는 양념소갈비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갈비 손질부터, 양념, 숙성, 굽기 등 모든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겨 있다.

제일 먼저 갈비 겉에 붙은 기름을 떼 내는 게 가장 큰 일이다. 육절기로 갈비를 자르고 양념갈비 부위와 갈비탕 거리를 분리한 뒤 갈비살을 발라 칼집을 낸다. 간장을 기초로 갖은양념을 더해 버무려 2~3일 숙성하는데, 계절마다 숙성 속도가 달라 가장 맛있을 때를 찾는 것이 포인트다.

갈비를 구워 식탁에 올리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고기 굽는 곳 앞에서 하나하나 집어먹으며 술을 마시던 목로문화에서 유래된 거 같아요. 옛 건물에는 방마다 구이 시설을 갖추기 어려웠을 뿐더러, 소갈비를 먹을 정도면 거의 대접 받는 경우인데, 누구 한 명이 굽느라 바쁘면 힘들잖아요. 선술집이었을 때는 갈비를 구워 손님에게 낸 뒤 그 자리에서 잘라줬어요."

갈비 베테랑들이 알맞게 구워준 것을 맛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서민 음식도, 자주 먹을 수 있는 흔한 고기도 아니지만, 예산소갈비의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비결은 무엇일까.

"갈비는 달콤한 보물인 거 같아요. 어버이날이나 어린이날, 명절과 같은 특별한 날 소중한 사람들에게 사주고 싶은 마음으로 오잖아요. 내가 사줘도 뿌듯하고, 대접받는 사람도 기분 좋게 맛있게 먹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 음식하는 사람도 짜릿하고 예산의 갈비 맛을 이어온다는 자부심이 생겨요. 갈비가 참 '보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귀한 음식을 나누려는 '정'이야 말로 그 정답일 것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3313

【尼崎の風景】戸ノ内墓地

尼崎の墓地そぞろ歩き。このシリーズ、毎回いろいろ何か発見があって、なんだか面白くなってきました。

今回は戸ノ内墓地です。戸ノ内地区は、尼崎の中でも大阪市に接しており、しかも神崎川・藻川・旧猪名川で三方を囲まれた場所です。最寄りは、敢えて言えばJR東西線の加島駅。バスなら阪急園田駅から出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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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区の基本情報は、いつものようにまずapedia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戸之内 とのうち
(戸ノ内より転送) 出典: Web版尼崎地域史事典『apedia』

園田地区の大字。市域東部、かつて猪名川神崎川の合流地点の北、猪名川西岸、猪名川と藻川の間に位置していたが、猪名川改修工事により流路が変わり、現在では猪名川東岸となった。武士の居住地を意味すると考えられる殿ノ内〔とのうち〕という小字があるので、戸之内もこれに由来するとも考えられる。史料上の初見は1594年(文禄3)「善法寺村検地帳」(太田善夫氏文書)で「との内」とある。1605年「慶長十年摂津国絵図」に西倉橋とあり、中世には椋橋西荘に属したと考えられる。椋橋城の地に比定する説もある。

近世初期には幕府領、1626年(寛永3)に大坂城代武蔵国岩槻藩阿部氏(正次系)の領地となり、1648年(慶安元)には大坂定番上総国飯野藩保科氏の領地となり明治に至った。村高は「慶長十年摂津国絵図」に766.395石、「元禄郷帳」「天保郷帳」に788.395石とある。西明寺井組に属した。氏神素盞嗚神社、寺院は高野山真言宗治田寺・浄土真宗本願寺派祐光寺。治田寺は天平年間の開基と伝えられ、平安末期作と考えられる治田寺阿弥陀如来坐像がある。

1889年(明治22)以降は園田村、1947年(昭和22)以降は尼崎市の大字となった。1923年毛斯綸紡織戸之内工場が開設された。同社は神崎川対岸の加島に通ずるモスリン大橋を架け、園田村に寄付した。工場はのち鐘紡、さらに日本国際航空工業の工場となり、1945年空襲被害を受け閉鎖された。1961年の町名改正・1966年の土地区画整理と1971年の住居表示により戸ノ内町および、東園田町の一部となったほか、一部が弥生ヶ丘町となった。

執筆者: 地域研究史料館

http://www.archives.city.amagasaki.hyogo.jp/apedia/index.php?key=%E6%88%B8%E3%83%8E%E5%86%85

ここを訪れたのは初めてだったのですが、なかなか面白い履歴を持つ場所のようです。DEEP案内さんが紹介しているくらいですから。

ameblo.jp
osakadeep.info
www.archives.city.amagasaki.hyogo.jp

私が歩いた時には、工場と住宅とが密接に隣り合っている、といった印象しか持てなかったのですが、見る目がないのか、ルートの問題だったのか…。

ともあれ、その戸ノ内で、旧猪名川沿いに区画されている共同墓地が、戸ノ内墓地です。

www.lifedot.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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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地管理者の名前に「戸ノ内村」とあります。近代以降も園田村・尼崎市の大字として受け継がれた地名です。

www.archives.city.amagasaki.hyo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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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常に綺麗に保たれた墓地なのですが、江戸期の墓碑が多数確認できるうえに、無縁墓がある一方で「一族の墓」としてしっかり囲み込まれた墓もあり、近世からの面影を残しているような気が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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戸ノ内墓地の現代っぽくなさがいちばん表れているのは、こちらです。ここ、全体の約4分の1が、ある一族の墓として囲い込まれているんですよね。弥生ヶ丘墓園にも一族の墓が集まって立っているエリアはありますが、こんなに見事な区画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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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日は天気もよく、墓参に来られていた女性から西難波の妙光寺のところにあった火葬場の思い出などを伺うこともできて、さらに色んな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あの落とし物さえしなければ、ホントいい日だったはずなんですよね…。

金融都市・大阪の歴史遺産

大阪市内って、ごく一部を除いて緑が少ないことなどもあり、正直いって住みたいとは全く思わないのですが、近代都市としてみれば、けっこういろいろな歴史建築が残ってて面白いところです。金融都市・大大阪の在りし日の面影に過ぎないと言われればそうなんですけどね…。

ともあれ、こんな風に歴史を紐解いてみると、ただ眺めているよりも、いろんなことを想像することができて楽しいです。

銀行支店番号に再編の痕跡、金融都市・大阪の歴史映す
とことん調査隊
関西タイムライン 2021年3月9日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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会社の近くの銀行の支店で口座を開設した際、通帳にある「店番号」を見てふと疑問が浮かんだ。「この番号、どう決まっているんだろう?」。大阪は国内初の手形交換所が誕生した金融都市。背景を探ると、世紀をまたぐ銀行再編の歴史、関西に残る金融遺構の数々が見えてきた。

疑問の発端は三菱UFJ銀行の瓦町支店(大阪市中央区)だ。記者が子どものお年玉を預けようと開設した口座の通帳には、店番号が「003」とある。東京の本店(001)と丸の内支店(002)に次ぐ番号だが、なぜいきなり大阪の瓦町支店なのか。

全国銀行協会によると、各銀行は1973年から全国銀行データ通信システムを介して振り込みなどを行い、各口座を4桁の各金融機関コード、3桁の店番号、口座番号で識別。ただ、店番号は各行独自に決めており、並び順のルールも明確ではないという。

90年代のバブル崩壊を経て銀行の再編が進み、支店の整理・統合の際、各行は顧客の不便を避けるため、以前の店名と店番号をできるだけ引き継ぐ配慮をしたとされる。これが瓦町支店の謎に関わる。

三菱UFJ銀によると、前身の東京三菱銀行で1桁の店番号は001、002だけ。もう一方の前身、UFJ銀行は大阪を本拠にした三和銀行などが源流で、瓦町支店の003は同行から引き継がれた。大阪の船場支店(004)や玉造支店(007)なども三和の名残というわけだ。

驚いたのは瓦町支店の歴史の深さだ。1879年(明治12年)、大阪の両替商を前身とする山口銀行の本店として開設され、昭和初期に鴻池銀行三十四銀行との3行合併で三和銀行が誕生。同行瓦町支店として歩んできた。

次は堺筋を200メートルほど南へ。ここに、りそな銀行の本店ビルがある。同行で最も若い店番号は、意外なことに奈良の天理支店(005)。広報担当者が「奈良銀行の名残でしょう」と教えてくれた。

同行の前身は大和銀行。2000年代にあさひ銀行奈良銀行と合併した。大和銀の店番号は基本的に100番台が大阪市内、200番台が大阪府内で、りそな銀もほぼ同様の並び。合併した奈良銀などの店番号は、合併時に重複していなければそのまま使用していることが多いようだ。

大和銀の源流は1918年設立の大阪野村銀行(証券部門は後の野村証券)。24年建築の同行本店ビルの柱の一部は、りそな銀本店前に残る。さらに南へ1キロ、みずほ銀行南船場支店のあった所にも壮麗な柱が。銘板によると「旧第一勧銀高麗橋支店の正面玄関」にあった石柱で、26年建築の同支店からの移築物だ。

歴史的建築では三井住友銀行大阪本店も見逃せない。第1期工事の竣工は26年で、前身の住友銀行の本店営業部として使われた。今も三井住友銀の大阪本店営業部(101)が入り、現存する天井のステンドグラスが美しい。案内してくれた安部尚・管理部推進グループ長は「通勤のたび伝統を感じます」と誇る。

住友銀の店番号の始まりは100番台で、200番までは全て大阪府内の店舗だ。さくら銀行と合併し三井住友銀になった後も、ほぼ受け継がれており、大阪を拠点とした住友の存在感を今に残す。

一方、北浜地区の大阪中央支店も36年完成と古く、神殿風の列柱が目を引く。店番号が「710」なのは元が住友銀ではなく、三井銀行(後のさくら銀)の大阪支店だったからだが、合併時には住友銀の高麗橋支店を吸収した。「対等の精神」で合併した両行は、互いの伝統を尊重しつつ店舗再編に腐心したようだ。

インターネットバンキングの利用が増え、最近は店舗に行く機会は減ったが、その背景に目をこらすと金融再編の歴史が垣間見える。日本経済を支えてきたバンカーたちの姿を思った。(堀越正喜)

https://www.nikkei.com/article/DGXZQOHC16AFO0W1A210C2000000/

【尼崎の風景】吹上霊園

尼崎のお墓そぞろ歩き。目標となるお墓は各地に点在しているので、ネタに困ることは当分ありません。

続いては吹上霊園。所在地の住所は武庫之荘。最寄りも阪急の武庫之荘駅です。徒歩ならまあ、20分かからない程度ですか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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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あたりは、もともと武庫村。武庫之荘といえば尼崎でも高級住宅街のイメージがありますけど、1937年に武庫之荘駅ができる前は農村地帯であり、その後、戦後にかけて駅周辺の住宅開発が進んだ場所です。

武庫庄 むこのしょう 出典: Web版尼崎地域史事典『apedia』

地元では「むこんしょ」と発音している。武庫地区の大字。市域北西部に位置する。弥生時代の武庫庄遺跡がある。中世の武庫荘の中心地であったと考えられる。史料上の初見は1190年(文治6)「内宮役夫工科未済注文」(吾妻鏡/『尼崎市史』第4巻)。

近世初期には幕府領、1617年(元和3)尼崎藩領となった。村高は「慶長十年摂津国絵図」に222.7石、「元禄郷帳」「天保郷帳」に325.691石とある。また、天和・貞享年間(1681~1688)「尼崎領内高・家数・人数・船数等覚」(『地域史研究』第10巻第3号)には家数32軒、人数147人、1788年「天明八年御巡見様御通行御用之留帳」(『地域史研究』第1巻第2号・第3号)には27軒、119人とある。富松井組に属した。氏神須佐男神社(近世には牛頭天王社)。ほかに春日神社があったが1907年(明治40)須佐男神社に合祀された。

1889年(明治22)以降は武庫村、1942年(昭和17)以降は尼崎市の大字となった。1978年の住居表示により武庫之荘本町となったほか、一部が武庫之荘武庫之荘東となった。

執筆者: 地域研究史料館

http://www.archives.city.amagasaki.hyogo.jp/apedia/index.php?key=%E6%AD%A6%E5%BA%AB%E5%BA%84

武庫村 むこむら 出典: Web版尼崎地域史事典『apedia』

1889年(明治22)4月の町村制施行によって、当時の常吉組戸長役場管轄区域(西昆陽・常松・時友・友行・常吉・西武庫・東武庫・武庫庄・西富松・生津・守部の11か村)がそのまま武庫村となった。人口は2,965人(1889年末)、村役場は常吉村の旧戸長役場におかれた。1937年(昭和12)阪急電鉄武庫之荘駅を開設し、その周辺に住宅地を開発したので人口も漸増したが、1942年2月11日尼崎市と合併した当時もようやく1万900人にすぎず、全体としてはなお純農村地域であった。

執筆者: 山崎隆三

http://www.archives.city.amagasaki.hyogo.jp/apedia/index.php?key=%E6%AD%A6%E5%BA%AB%E6%9D%91

武庫之荘駅(阪急電鉄) むこのそうえき(はんきゅうでんてつ)
武庫之荘駅より転送) 出典: Web版尼崎地域史事典『apedia』

阪急電鉄武庫之荘駅は園田駅が開設された翌年、1937年(昭和12)10月に駅北側の阪急住宅地の売り出しと同時に開設された。駅名は、はじめは「武庫ノ荘」であったが、小林一三の意見で「ノ」を「之」に改めたという。武庫之荘住宅地は総面積6万坪、戸数70戸、1戸当たりの面積が100~200坪、値段は7,300~1万9,000円で、広くて新しい住宅街として注目された。駅南側に南改札口が設置され、駅前広場がつくられ市営バスが乗り入れるようになったのは1970年のこと。それまで駅南側には田園風景が広がっていた。なお、1937年の駅の開設とあわせて南側のプラットホーム沿いに植えられた桜並木は今では約80本となり、春にはその木々に公募した短冊が結ばれ“ホームで花見”に興をそえている。

執筆者: 津金澤聡廣

http://www.archives.city.amagasaki.hyogo.jp/apedia/index.php?key=%E6%AD%A6%E5%BA%AB%E4%B9%8B%E8%8D%98%E9%A7%85

武庫土地区画整理事業 むことちくかくせいりじぎょう 出典: Web版尼崎地域史事典『apedia』

市西北部にあって、武庫川に接した武庫豊町・武庫町・武庫元町・武庫之荘の各一部で63.7haを対象に、公共団体(市)により1959年度(昭和34)から1967年度まで施行された。事業費は3億7,000万円。戦時中の1942年、この地区は広範囲な防空緑地として指定され、県がその土地43.3haを買収して一部はグライダーの滑空場として整備したが、戦後、農地改革により大部分が解放された。市はこの地区に大学の誘致や大規模公園の設置等を検討していたが、一部7.1haを県営公園に、一部を年々膨張する人口対策として住宅公団の団地(建設戸数2,192戸)を誘致することに決め、前記の緑地指定を整理して両者を包括した周辺整備を土地区画整理事業により実施した。地区は阪急電鉄武庫之荘駅から約1.2kmと近く、武庫之荘住宅街に沿接した戦後初の市施行宅地造成事業として完成した。竣工時には、交通公園を主体とした県営西武庫公園・公団住宅等に見学者が絶えなかった。

執筆者: 枝川初重

http://www.archives.city.amagasaki.hyogo.jp/apedia/index.php?key=%E6%AD%A6%E5%BA%AB%E5%9C%9F%E5%9C%B0%E5%8C%BA%E7%94%BB%E6%95%B4%E7%90%86%E4%BA%8B%E6%A5%AD

ということで吹上霊園。武庫之荘駅からここまでの道、よく観察してみれば、かつて農村であった面影、その後新たな住宅として開発されたという履歴が、感じられるような気がします。

場所的には武庫東小学校の目の前にな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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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は、入り口すぐところに由来記を刻んだ石碑があります。この地域の区画整理と宅地化を受けて、古い墓地の整備が行われ、今に至ることがわかります。

「友行」はこの辺りの大字ですが、地名としては「武庫之荘」の陰で消滅したとい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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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行 ともゆき 出典: Web版尼崎地域史事典『apedia』

武庫地区の大字。市域北西部に位置する。弥生~古墳時代の道ノ下遺跡・南戸板遺跡があり、また時友にかけて平安~鎌倉時代の時友遺跡がある。史料上の初見は1277年(建治3)「醍醐寺報恩院領年貢注進状」(醍醐寺文書/『尼崎市史』第4巻)で野間村友行名〔みょう〕とある。野間荘の名田開発領主名に由来する地名であろう。隣村の時友も同荘の名田であり、中世から近世にかけて野間荘が野間・時友・友行の3村に分離していったものと考えられる。

近世には1617年(元和3)旗本長谷川氏(守知系)知行所、1632年(寛永9)大部が同氏守勝系に分知され、残る小部は1646年(正保3)幕府領、1694年(元禄7)武蔵国忍藩阿部氏(忠吉系)の領地、1823年(文政6)幕府領、1828年尼崎藩領となった。村高は「慶長十年摂津国絵図」に295.2石、「元禄郷帳」「天保郷帳」に300.862石とある。富松井組に属した。氏神須佐男神社(近世には牛頭天王社)で時友と立会、寺院は高野山真言宗白衣観音寺(旧称観音寺)、ほかに近世には真言宗瑞光山常法寺があった。

1889年(明治22)以降は武庫村、1942年(昭和17)以降は尼崎市の大字となった。1978年の住居表示により武庫之荘となったほか、一部が武庫之荘本町・西昆陽〔こや〕となり、友行という地名は消滅した。

執筆者: 地域研究史料館

http://www.archives.city.amagasaki.hyogo.jp/apedia/index.php?key=%E5%8F%8B%E8%A1%8C

綺麗に整理された墓域内には、尼崎市内の他の墓地と同様、明治から江戸期の墓地が散見され、軍人墓のほか、無縁化した墓碑を集めた一角を見ることもでき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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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地の由来を知り、近代の歴史を知ってからこの墓地を眺めれば、そこにはもうないものも含めて、いろんな物事について考えることができます。

新旧の阿蘇大橋の狭間で

熊本地震のあと、2018年に阿蘇を訪れた時には、豊肥線阿蘇大橋の周辺もとても復旧をイメージできる状態ではなかったのですが、豊肥線が開通し、こうして新阿蘇大橋が開通し、主要交通網としてはあと南阿蘇鉄道を残すのみになりつつあります。様々な変化を飲み込みつつ、歳月は確実に過ぎています。

また機会を見つけて、訪れることはあると思います。

「息子の遺品探し続ける」故大和晃さんの両親 新阿蘇大橋に複雑な心境も
2021/3/6 19:50 (JST)3/7 09:40 (JST)updated
©株式会社熊本日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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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和晃さんが犠牲となった旧阿蘇大橋近くで花やたばこを供える父卓也さん=3日、南阿蘇村河陽

 2016年4月の熊本地震で崩落し、約600メートル下流で再建していた国道325号新阿蘇大橋(南阿蘇村)が7日、開通する。地元では観光客増や交通の利便性向上に期待が高まる。一方、崩落現場付近の土砂崩れで車ごと流されて犠牲になった大和晃[ひかる]さん=当時(22)=の父卓也さん(62)は、復興の進展を歓迎しつつも、「まだ車体の半分が現場に残っている。もろ手を挙げて開通を喜べない」と複雑な心境をのぞかせる。

 3日、卓也さんは崩落現場近くにある、アスファルト片を積んだ祭壇を訪問。花とジュースを供え、晃さんが好んだ銘柄のたばこに火を付けた。「妻からは、『あなたが吸っていたから晃が吸い始めたのよ』と怒られていた」と頭をかきながら懐かしむ。

 地震から5年がたとうとしている今でも、晃さんの遺品を探し続けている。1、2週間に1度は祭壇に行き、雑草が茂ると刈り払い機できれいにする。真下を流れる黒川が見えなくなるからだ。「体は戻って来たが、車には持ち物が残っているかもしれない。それは晃の一部。これからも川を見つめ続ける」

 卓也さんと妻忍さん(53)は、他の犠牲者の遺族や元の住居に戻れていない被災者の存在に触れ、「(復興から)取り残されていると感じる人は多いと思う」とおもんぱかる。祝賀ムードが広がる中、卓也さんは「まだ新しい橋を渡る気になれない」。忍さんは今も、昨年10月に復旧した国道57号の崩落現場を通ることができない。

 心の支えとなっているのは、当時の県災害対策本部による捜索が一時中断した後、家族と一緒に手掛かりを探してくれたボランティアや、苦しい思いを共有してくれた報道関係者だ。

 自らの結婚や出産といった人生の節目を報告に訪れたり、卓也さんの還暦祝いを一緒に開いたりしてくれた。忍さんは「支援してくれる人がたくさんいたから、この5年を生きられた。私たちが寂しくないように、晃がいろいろな縁をつないでくれたのかな」。晃さんの遺影を見て、ほおを少し緩めた。(東誉晃)

https://this.kiji.is/740885824894976000?c=92619697908483575

阿蘇大橋、揺れ逃がす工夫 構造も強く最善の技術
2021/3/8 11:00 (JST)
©株式会社熊本日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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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蘇大橋の建設で工期短縮のために用いられた超大型移動作業車(熊本復興事務所提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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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蘇大橋の建設で工期短縮のために用いられたオートクライミングシステム工法(熊本復興事務所提供)

 熊本県阿蘇村に7日開通した新阿蘇大橋は、熊本地震で崩落した旧大橋から約600メートル下流の渓谷に架かり、村の中心部方面と立野側の国道57号をほぼ直線でつなぐ。全長525メートルは旧大橋(206メートル)の約2・5倍。地震の教訓を生かして揺れに強く、揺れを逃すための工夫が施されており、国土交通省は「熊本地震級でも壊滅的なダメージは避けられる」と強調する。

 新大橋は、黒川から約100メートルの高さにある長さ345メートルの本体部と、国道57号からの180メートルのアプローチ部の大きく二つに分かれる。

 本体部は、複数の橋脚と上部の橋桁を一体化させた造りで、ドイツ語の「骨組み」に由来して「ラーメン橋」構造と呼ばれる。両岸の2点で支えるアーチ構造に橋桁を載せた旧大橋に比べ、揺れに強いのが特徴だ。

 実際、新大橋のやや下流にある同じラーメン橋の阿蘇長陽大橋(276メートル)は、熊本地震でも本体部が崩れず残った。そのため地震後1年4カ月という早い段階で応急復旧が完了し、阿蘇地域復興の大きな支えとなった。

 新大橋はアプローチ部にも工夫がある。

 直下に活断層があると推定されるため、橋桁を65メートルと115メートルの二つの部分に分けた。活断層直上の65メートルの橋桁は、橋脚との接合部の強度をあえて弱め、強い地震が起きれば橋桁がずれて、揺れの力を逃がす仕組みだ。

 T字形をした橋脚の上部構造も、通常より幅を広げて橋桁が落ちにくくした。仮に橋桁が落ちた場合も、65メートルのアプローチ部だけに被害がとどまるため、新大橋全体では早期の復旧が可能という。

 建設においても、作業用の足場とコンクリートの型枠が一体化した状態で橋脚を造る「オートクライミングシステム」や、「超大型移動作業車」を使って橋桁を伸ばすように造るなど最新の工法を採用。国交省熊本復興事務所の藤川真一・工務第二課長は「こうした工法がなければ、開通は来年の夏前まで1年4カ月ほど伸びた可能性がある」と話す。

 地盤防災学の専門家として新大橋の工事に助言した北園芳人・熊本大名誉教授は「現在考え得る最善の技術を取り入れた。新大橋の開通が阿蘇地域の経済的な復興につながってほしい」と期待する。(太路秀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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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当時の青年射殺を戒厳軍元兵士が遺族に直接謝罪

このニュース、「5.18」についてある程度の関心を持ってきた者として、個人的にかなり衝撃を受けました。これは、誰にとっても簡単なことではないですよ。強制的に実現でき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

40年という歳月の経過と、時代状況と、関係各位のセットアップや説得、そして当事者の受容。いろいろな要素が絡み合って実現したのだ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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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一件はもしかしたら、様々な立場の関係者や公的機関、最終的には国家の選択にも、影響を及ぼすかもしれませんね。

청년 쏴죽인 5.18 계엄군, 유족 앞 첫 공개 사죄
5.18묘지서 만나 41년 만에 회한의 눈물... 유족 "사과해줘 고맙다" 용서
21.03.17 13:19 l 최종 업데이트 21.03.17 14:54 l 소중한
[기사 수정 : 17일 오후 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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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왼쪽부터 고 박병현씨 형 박종수씨, 송선태 위원장, A씨.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41년 만의 첫 사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한 청년을 사살했던 계엄군 출신 A씨가 지난 16일 유족을 직접 찾아 사과했다. 계엄군 출신이 유족 앞에서, 특히 자신이 직접 죽인 이의 가족을 만나 공개 사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청년의 형은 A씨의 사죄를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사과해줘 고맙다"며 외려 그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 용서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고백과 증언'은 이렇게 첫발을 내딛었다.

유족 "오래 전 다 용서, 명령 내린 놈이 나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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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왼쪽부터 A씨, 김영훈 유족회장(중앙), 고 박병현씨 형 박종수씨.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5.18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라며 "그간 진압 작전에 참여했던 계엄군들이 목격한 사건들을 증언한 경우는 많이 있었으나 가해자가 자신이 직접 특정인을 숨지게 했다며 유족에게 사과 의사를 밝힌 경우는 최초"라고 발표했다.

앞서 A씨는 위원회를 통해 자신이 1980년 5월 23일 광주시 남구 노대동 소재 '노대남제' 저수지 인근에서 시민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위원회는 당시 그곳에서 죽은 피해자의 신상을 A씨에게 제시했고, A씨는 그 사람이 자신이 죽인 이가 맞다고 인정했다.

A씨가 사살한 인물은 '국립5.18민주묘지 2-02'에 잠들어 있는 고 박병현씨다. 1956년생인 박씨(5.18 당시 25세)는 광주의 시계점에서 일하던 중 고향 보성의 농촌 일을 돕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7공수여단 33대대 8지역대 소속의 A씨에게 총을 맞아 사망했다.

위원회는 A씨가 유족에 사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박씨의 형을 만나 이를 전했다. 박씨의 형은 "우리 가족은 이미 오래 전에 다 용서했다. 그 군인이 무슨 죄가 있겠나. 명령을 수행한 죄밖에 더 있겠나. 명령을 내린 놈이 나쁜 놈"이라며 사죄를 받아들일 의사를 밝혔다.

위원회는 두 사람 만남의 공개 여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A씨의 사죄를 개인의 도덕적 반성을 넘어 공적 영역으로 이끌어 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원회의 공개 사죄 제안에 고민을 이어가던 A씨는 결국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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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왼쪽부터 A씨, 김영훈 유족회장, 송선태 위원장, 고 박병현씨 두 형제.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A씨와 박씨의 두 형제는 16일 국립5.18민주묘지 민주의문 접견실에서 만났다. A씨는 이 자리에서 유족에게 엎드려 절하며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려 죄송하다. 저의 사과가 또 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아 망설였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 "지난 4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유족을 이제라도 만나 용서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박씨의 형 박종수(73)씨는 "늦게라도 사과해줘 고맙다.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며 "용기 있게 나서줘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다. 과거의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떳떳하게 마음 편히 살아달라"고 답했다.

위원회는 "그간 위원회는 조사 활동을 통해 A씨의 고백과 유사한 사례를 다수 확인했다"며 "향후 계엄군과 희생자 간 상호 의사가 있는 경우에는 위원회가 이를 적극 주선해 조사위 설치 목적대로 사과와 용서를 통한 불행한 과거사 치유 및 국민통합에 기여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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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왼쪽부터 송선태 위원장, A씨, 고 박병현씨 두 형제.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7701

5.18 계엄군·유족 만남 이끈 이 사람 "양심고백 이어지길"
[스팟인터뷰] 최용주 5.18진상조사위 1과장 "유족 찾아 공개 사죄, 세계사적으로도 드물어"
21.03.17 15:57 l 최종 업데이트 21.03.17 16:49 l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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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고 박병현씨의 형 박종수씨(오른쪽)와 박씨를 죽인 A씨가 부둥켜안은 채 오열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익명의 대상을 상대로 사과하는 사례는 그 동안 많았는데, 자신이 죽인 이를 특정해 그 유족을 만나 사죄한 건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한 청년을 사살했던 계엄군 A씨가 지난 16일 유족을 직접 찾아 사과했다. 그 동안 일부 계엄군의 목격담은 여럿 있었지만, 계엄군이 직접 자신이 죽인 이의 유족을 만나 공개 사과한 건 41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관련기사 : 청년 쏴죽인 5.18 계엄군, 유족 앞 첫 공개 사죄 http://omn.kr/1sgv4).

고백과 증언, 사과와 용서가 이뤄지기까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의 역할이 컸다. 지난해(2020년) 7공수여단의 작전사항을 살피기 위해 고 박병현씨(1956년생)의 사례를 추적하던 위원회는 A씨가 박씨를 죽인 인물임을 알게 됐다.

지난 1월 A씨를 만난 위원회는 그로부터 '사죄하고 싶다'는 의사를 확인했고, 이를 전남 해남에 사는 박씨의 형 박종수(73)씨에게 전했다. 박씨는 고민 끝에 A씨를 만나기로 했다.

위원회는 A씨의 사죄를 개인의 도덕적 반성을 넘어 공적 영역으로 끌어오고자 했다. 그래서 A씨에게 공개 사죄를 요청했다. A씨로선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위원회 설득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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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조사1과장 ⓒ 이희훈

이번 만남을 총괄한 최용주 위원회 1과장은 17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유족도 '응어리가 풀렸다'고 말하고, A씨도 연신 '고맙다'고 그러더라.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라며 "우리 위원회로서도 가장 보람된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사례를 통해 계엄군들의 양심고백이 이어졌으면 한다. 결국 사과와 용서가 아픔을 치유하고 사회통합으로 나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 아니겠나"라며 "앞으로 이러한 사례가 축적되면 자연스레 5.18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야만적 국가폭력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아래 최 과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유족도 고마워했다... 보람된 순간"

- 어떻게 해서 계엄군을 만나게 됐나.

"2001년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문사위)'에 신고됐었던 박씨의 죽음은 (죽인 사람을 특정할 순 없었지만) 사망 원인이 명확했고 보상 절차가 진행됐었기에 의문사위 역할 상 조사가 개시되지 않은 사건이었다. 우리도 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건 (박씨가 숨진 곳 인근에서의) 7공수여단 이동경로 및 작전사항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안을 훑어보던 중 7공수여단 소속 군인의 양심고백을 발견했고 이것이 박씨의 죽음과 연관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A씨를 찾아갔더니 그도 놀라면서 '당시의 행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우리에게 고백했다. 그는 '이제라도 유족을 만나 용서를 빌고 싶으니 위원회가 자리를 마련해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 그래서 박씨의 유족을 찾아가게 된 것인가.

"그렇다. (당시 25세였던 박씨의) 아버님,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형제 분들이 계셨다. 전남 해남에 살고 계신 큰형님을 직접 만났다. 나와 조사관이 '당신 동생을 사망하게 한 계엄군의 신원을 알게 됐다. 그가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더니 그는 한참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고통을 내려놔야 할 것 같다'며 사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 계엄군과 유족의 만남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을 두고 위원회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국가폭력에 의한) 사과와 용서는 개개인 간의 문제로 끝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의미가 있다. A씨의 신원은 공개하지 않는 선에서 그의 사과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유족도 이를 받아들였다."

- 공개 사과를 제안하자 A씨는 어떤 반응이었나.

"고민을 많이 하더라. 다만 이 과정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고 이에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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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왼쪽부터 고 박병현씨 형 박종수씨, 송선태 위원장, A씨.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 계엄군이 자신이 직접 죽인 이의 유족을 만나 사죄를 했다는 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5.18 이후 처음 있는 일이며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기존엔 계엄군의 목격담 등이 전부였는데 A씨는 본인의 행위에 대한 고백을 한 것 아닌가. 또한 익명의 대상을 상대로 사과하는 사례는 그 동안 많았는데, A씨처럼 자신이 죽인 이를 특정해 그 유족을 만나 사죄한 건 매우 드물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유족도 '내가 용서하고 싶어도 누굴 용서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렇게 나서줘 고맙다'고 하더라."

- 어디선가 보고 있을 다른 계엄군 출신들에게도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될 것 같다.

"그렇다. 이번 사례를 통해 계엄군들의 양심고백이 이어졌으면 한다. 실제로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사과와 용서가 아픔을 치유하고 사회통합으로 나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 아니겠나. 이미 우리 위원회도 유사한 사례 몇 건을 더 다루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사례가 축적되면 자연스레 5.18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야만적 국가폭력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유족도 '응어리가 풀렸다'고 말하고, A씨도 연신 '고맙다'고 그러더라.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A씨는 오늘 아침에도 전화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왔다. 우리 위원회로서도 가장 보람된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위원회의 역할이 앞으로도 중요하겠다.

"위원회 설립 목적인 진실규명을 위해선 가슴 아픈 과거사 때문에 찢긴 사회 구성원의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과제를 풀어내야 한다. 사회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관점에서 위원회 활동을 이어가겠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7776

オーマイニュースに比べると、京郷新聞のこちらの記事は短いですが、1980年当時の状況についてより詳しく伝えています。

5·18 때 계엄군 유족 찾아 참회...직접 용서 구한 첫 공수대원
강현석 기자 2021.03.17 20:43 입력

“겁에 질려 도망가는 민간인을 사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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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됐다가 고향으로 가던 박병현씨를 사살한 것으로 확인된 공수부대 출신 A씨가 16일 박씨 묘지를 찾아 용서를 구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 제공

묘지 앞에 무릎 꿇고 “사죄”
직접 용서 구한 첫 공수대원
“40년간 죄책감에 시달렸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이 희생자의 유족을 만나 사죄했다. 계엄군이 자신이 직접 사살한 사망자의 유족을 만나 용서를 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5·18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원 A씨(66)가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박병현씨 유가족을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고 17일 밝혔다.

A씨는 5·18묘지에 안장된 박씨의 묘역을 찾아 무릎을 꿇고 참배했다. 이날 A씨의 참배에는 박씨의 형과 동생 등 유가족 3명이 함께했다. A씨는 5·18 당시 25세였던 박씨에게 총격을 가해 사살한 당사자다.

박씨는 1980년 5월23일 농사일을 돕기 위해 광주에서 고향인 보성으로 가는 길에 사망했다. 당시 광주 외곽을 차단한 계엄군들로 인해 차량이 운행되자 않자 박씨는 걸어서 보성으로 가기 위해 친구와 함께 노대동 ‘노대남제’ 저수지 인근을 지나다 A씨 부대와 맞닥뜨렸다.

7공수 33대대 8지역대 소속이었던 A씨는 정찰을 하고 있었다. 박씨 일행이 도망치자 A씨는 곧바로 M16 소총으로 사격을 가했다. A씨 부대원들은 죽은 박씨를 인근 야산에 묻고 철수했다. 박씨의 시신은 5·18 직후 가족들에 의해 6월2일 발견됐다. 고향에 묻혔던 A씨는 6월11일 진행된 부검에서 머리 총상이 확인됐다. A씨는 5월30일 부대로 복귀한 뒤 전역했다.

5·18 당시 숨진 시민들의 개별 사망경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5·18진상규명위는 지난 1월 A씨 부대가 박씨 사망장소에서 작전을 폈던 사실을 확인했다. 조사관들이 찾아가자 A씨는 “내가 비무장한 사람을 사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고 한다. A씨는 2차례 면담에서 “당시 정찰을 하다 도망가는 민간인이 있었는데 (부대원 중)나만 무의식적으로 총을 쐈고 부대원들이 매장했다”면서 “박씨는 단지 겁에 질려 도망가던 상황이었다”고 진술했다.

A씨가 진술한 지역에서 사망한 시민은 박씨가 유일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이 박씨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A씨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뒤 유가족을 만나 용서를 빌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지난 1월에는 혼자 광주를 찾아 박씨의 묘역을 참배하고 사죄하기도 했다.

박씨의 유족들도 고심 끝에 A씨를 만나기로 했다. 2시간여 동안 박씨의 유가족을 만난 A씨는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렸다. 40년간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오열했다. 박씨의 형인 박종수씨(73)는 “늦게라도 고맙다.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며 용서했다.

5·18진상규명위는 “5·18 당시 시민들을 사살했다”는 당시 계엄군 3~4명의 증언을 확보하고 사망한 시민이 누구인지를 추가로 추적하고 있다. 5·18진상규명위 관계자는 “A씨처럼 계엄군들이 당당히 증언해 5·18의 진실을 밝혀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103172043005

京郷新聞と言えばこちらでもこの件が取り上げられています。時事問題を風刺する4コマ漫画とは言え、取り上げるのが早いですね。

またこの件、日本語で記事になっているのは今のところこれだけでしょうか。

www.thenewstance.com

朝鮮日報でも記事になっているので、いずれは日本語版に出るかもしれません。

www.chosun.com